[근대유학문선]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게시기간 : 2019-09-03 07:00부터 2031-01-01 00:00까지 등록일 : 2019-08-30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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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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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 유학자 임한주(林翰周, 1871∼1954)는 한국 근대사의 산증인이다. 1895년 홍주의병에 참여했고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했으며 1927년 유교부식회 지부장을 맡았다. 임한주의 조카 임경호(1888∼1945)는 임시정부 국내특파원과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임한주의 문인 임긍호(1901∼1964)는 임시정부 국내특파원으로 활동하고 반민특위에 참여했다. 임한주가 마흔을 전후한 시기 한국의 국망과 청국의 혁명이 차례로 일어났다. 청국의 혁명은 한국의 유림 사회에 유교 왕정과 서양 공화정에 관한 논의를 촉발시켰다.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임한주는 나그네와 함께 산중문답을 나누었다. [번역] 나그네가 말했다. “이것은 그렇겠습니다. 그대와 더불어 천하의 일을 범론(汎論)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주인이 말했다. “말씀해 보시오.” “지금 천하에는 제국주의(帝國主義)가 있고 민국주의(民國主義)가 있습니다. 공화정치(共和政治)가 있고 전제정치(專制政治)가 있습니다. 이 네 가지는 또한 우열을 말할 수 있습니까?” “제국이라 하는 것은 황실이 있고 정부가 있음을 이르오. 임금과 신하가 시키고 돕는 것이 처음엔 모양을 이루었소만 단지 황실이라 높여 놓고 부귀를 누리게 하나 정치에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니 나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옛날엔 하급 관리도 모두 하는 일이 있어서 위로부터 급료를 얻었는데 지금 우뚝 한 나라의 군주가 되어 자리나 차지하고 상중(喪中)에 있는 것처럼 되니 어찌된 일이오? 명칭은 있으나 실질은 없으니 도리어 민국의 주지(主旨)만도 못하오. 민국의 경우 민권(民權)과 정당(政黨)이 공의(公議)로 정치를 행하오. 민당(民黨)이 원하지 않는 것을 정부가 감히 함부로 하지 못하니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함을 함께한다는 뜻1)에서는 합당한 듯하오. 그러나 민당이 반드시 모두 군자는 아니고 정부가 반드시 모두 소인은 아닌데 민당의 말을 어찌 다 믿고 정부의 말을 어찌 다 버리겠소? 따를 것인가 어길 것인가 말이 어지럽고 시비가 흐릿한 것이 비유컨대 마치 죽을 끓이는 저녁에 어른에게 한 사발이 부족하면 어른이 없는 집에서는 뭇 아이들이 모두 다투는 것과 같소. 또 정부라고 하는 것이 봉록이 무거운 높은 벼슬아치라서 민당에 비할 바가 아니니 반드시 백성의 말을 기다려 정치를 행한다면 이 정부를 어디에 쓰겠소? 공화라고 하는 것은 위와 아래가 함께 화합함을 이르고 전제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통치함을 이르오. 이러한 명칭은 역대로 누차 변해서 오늘날 서양 사람의 학설도 이런지는 모르겠소만 대개는 이렇소. ‘공화’ 두 글자는 본래 서주(西周)의 여왕(厲王)과 선왕(宣王) 사이에 나와 요샛 사람이 이를 차용하는데 그 뜻은 민국의 주지와 대략 서로 비슷하오. 전제라는 것의 경우 삼대 이하 송․명(宋․明)의 정치가 모두 이것이오. 그 우열을 하필 말한 뒤에야 알겠소?” 나그네가 말했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음에 이를 위해 사목(司牧)을 세우니 이에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맹자는 ‘백성이 중하고 사직이 다음이고 임금이 그 다음이다’라고 했습니다.2) 주자도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다. 곧 천하의 천하이다.’라고 했습니다.3) 거룩하고 밝은 제왕은 이러함을 알았기 때문에 음식과 의복은 검소했고 정치할 때에는 근심하고 조심했습니다. 백성을 보기를 다친 사람 보듯 했고 널리 베풀어 뭇 사람을 구원했습니다. 천하로서 한 사람을 받들지 않고 한 사람으로서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백성이 이 세상에 태어나 분수가 편안하고 살아갈 힘이 충분했습니다. 때문에 전제에 해롭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하(夏)나라 계(癸, 걸왕), 상(商)나라 신(辛, 주왕), 진(秦)나라 정(政, 시황제), 수(隋)나라 광(廣, 양제)의 무리가 위에 있으니 백성이 도탄에 빠져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된 자는 선정은 항상 적고 악정은 항상 많으며 백성은 그 사이에 있으면서 즐거움은 항상 적고 괴로움은 항상 많았습니다. 하늘이 이 백성을 낳은 뜻이 어찌 이러하기를 원해서였겠습니까? 그러니 민주․공화의 정치가 그래도 전제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주인이 말했다. “성인의 법이라도 오래되면 폐단이 발생하니 또한 이치가 항상 그렇소. 밝고 슬기로운 사람만이 제 때에 변혁하고 올바른 도로 구원하나 대체(大體)는 변할 수가 없소. 하늘이 백성을 낳음에 욕망은 있고 주인이 없으면 곧 화란이 일어나니 반드시 한 사람을 시켜 만물을 통리(統理)토록 하여 쟁탈을 다스리고 생양(生養)을 이루게 하였소. 공자는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귀천이 제자리를 얻었다.’ 하였소.4) 또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 하였소.5) 이것은 천지의 변함 없는 정해진 이치이오. 천지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이 이치는 미상불 그 사이에서 행하겠지만 중간에 극도의 혼란을 만나면 사람들마다 제왕이라 칭하리니 이는 기수(氣數)의 변고이며 생민(生民)의 불행이오. 그대를 위해 자세히 말해도 되겠소?” (후략) [원문] (전략) 客曰: “此則然矣. 請與子汎論天下事, 可乎?” 主人曰: “試言之.” 曰: “今天下有帝國主義, 有民國主義, 有共和政治, 有專制政治, 此四者亦有優劣之可言乎?” 曰: “所謂帝國者, 有皇室有政府之謂也. 君臣佐使, 初成模樣, 然但尊之爲皇室, 使享其富貴, 而不與乎政治. 吾不知其何說也. 古者府史胥徒亦皆有所事, 而仰食於上, 今巍然爲一國之主, 而尸居素食, 何也? 名存而實無, 反不如民國主旨矣. 至於民國則民權與政黨, 公議行政, 民黨所不欲, 政府不敢擅爲, 則其於與民好惡之意, 似爲得之, 然民黨未必皆君子, 政府未必皆小人, 則民黨之言何可盡信, 政府之言亦何可盡廢? 從違之間, 言議紛拏, 是非眩瞀, 譬如煮粥之夕, 長少一鉢, 無長之家, 群兒並爭矣, 且所謂政府者必高官重祿, 非民黨之比, 而必待民言而行政, 亦焉用此政府爲哉? 所謂共和者, 上下共和之謂也. 專制者, 以一人統治之謂也. 此等名言, 歷世屢變, 不知今日西人之說亦如此, 然大槩則若是爾. 共和二字, 本出於西周厲宣之間, 而今人借用之, 其義與民國主旨略相似, 至於專制云者, 三代以下, 至于宋明之治, 皆是也. 其優其劣, 何待於言而後知耶?” 客曰: “天生斯民, 立之司牧, 乃爲民也. 是故孟子曰: 民爲重, 社稷次之, 君次之. 朱子亦曰: 天下者, 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 聖帝明主, 知其如此, 故菲食惡衣, 憂勤惕厲, 視民如傷, 博施濟衆, 不以天下奉一人, 而以一人治天下, 民生斯世, 分安而力足, 故無害於專制矣. 不幸而夏癸商辛秦政隋廣之類在上, 則民墜塗炭, 無以聊生. 自古爲君者, 善恒少而惡恒多, 民在其間, 樂恒少而苦恒多, 天生斯民之意, 豈欲其如是也? 然則民主共和之治, 不猶愈於專制乎?” 主人曰: “雖聖人之法, 久則弊生, 亦理之常也. 惟明智之人, 隨時變革, 捄之以道, 然其大體, 不可變也. 惟天生民, 有欲無主乃亂, 必使一人統理萬物, 治其爭奪, 遂其生養. 仲尼曰: 天尊地卑, 貴賤位矣. 又曰 天無二日, 土無二王, 此天地不易之定理也. 天地不滅, 則此理未嘗不行於其間, 而間値昏亂之極, 則人人稱帝, 人人稱王, 此氣數之變, 而生民之不幸也. 請爲子詳言, 可乎?” (후략) [출전] 임한주(林翰周), 『성헌집(惺軒集)』 권5 「속산중문답(續山中問答)」 [해설] 1919년 반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이다. 오늘날의 헌법에 해당하는 헌장에 ‘대한민국’과 ‘민주공화제’가 나란히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대한민국’이란 일본에 빼앗긴 나라를 광복한다는 의지가 들어간 ‘대한’, 그리고 백성이 주인이 되는 새 국가를 만든다는 뜻이 들어간 ‘민국’이 결합된 국호이다. ‘민주공화제’란 대한민국이라는 새 나라의 새 정치가 군주국의 전제정치에서 벗어난 공화국의 민주정치임을 천명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헌장에 ‘민주공화제’를 명기한 것은 세계헌법사에 비추어 이례적인 사건으로 간주된다. 유럽에서도 헌법에 민주공화국이 명기된 것은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 헌법과 오스트리아 연방 헌법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당시 국내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융희제가 생존해 있었다. 황제가 있음에도 해외에서 공화국을 출범시켰다는 것. 1920년 신년 축하회에서 안창호는 말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황제가 있다. 과거의 대한에 황제는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2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이다. 이것은 국가 주권이 황제에서 이제 국민으로 옮겨왔다는 인식 하에 가능했다. 1917년 박은식ㆍ신채호ㆍ조소앙 등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융희제가 국가 주권을 포기한 날, 곧 1910년 8월 29일이 다름 아닌 한국 국민이 국가 주권을 계승한 날이고, 따라서 이날이 구한(舊韓)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신한(新韓)의 첫날이라고 명시하였다. 미주 지역의 한인 사회는 이미 1910년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투항했으니 인민 정신을 대표해 가정부(假政府)를 세우겠다고 밝혔고 해외 한인을 결집할 수 있는 ‘무형정부(無形政府)’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대한제국 광무제가 강제 퇴위했던 1907년 박은식이 번역한 『서사건국지』는 스위스 인민이 외국인 압제자를 몰아내고 자유를 되찾은 빌헬름 텔 이야기인 바, 유럽의 대표적 공화국 스위스의 건국 이야기에서 한국의 새로운 미래를 응시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번역물이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공화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된 것은 중국의 신해혁명 때문이었다. 중국의 수천 년 왕정을 쓰러뜨린 혁명의 결과 들어선 중화민국이라는 정치적 실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중국의 미래에 한국의 미래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데 친숙했던 동시기 한국의 유학자에게 중국의 공화정은 유교 왕정 체제의 완전한 종말을 의미하는 대사건으로 비쳐졌다. 1912년 유인석은 중화민국 총통 원세개에게 편지를 보내 ‘중화민국’의 이율배반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신해혁명은 분명 청이 물러나고 중화가 출현한 혁명인데 혁명의 결과는 서양의 공화정치이며 중화의 제통(帝統), 전장(典章), 의발(衣髮)을 회복하지 않으니 나라 이름은 중화이나 실질이 없다는 것, 곧 중화와 민국의 상호 모순이었다. 유인석은 신해혁명이 청에 대한 혁명이 아니라 요순 이하 4천 년에 대한 혁명이라는 관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왕정인가 공화정인가의 문제가 중국의 요순문무(堯舜文武)인가 서양의 워싱턴인가 하는 동서 택일의 문제라면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한국의 독립이란 중국에서 대중화가 회복되어 한국에서 소중화가 회복되는 중화 문명의 재건이었기 때문이다. 공화정을 둘러싼 중요한 논란거리는 폭정의 위험과 예방이었다. 자연 상태에서 일어나는 온갖 혼란을 종식하고 왕정이 들어섰지만, 왕위 세습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폭군이 일어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릴 위험이 크다면 왕정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공화정이 합리적인 대안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긍섭이 지적했듯이 공화정의 정치 참여층의 기본적인 덕성이 마련되지 못한 상황에서라면 공자 후보, 맹자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은 적고 대통령 자리를 둘러싼 치열한 대립 속에 정치적 혼란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병헌은 공화제 하의 중국인이 격심한 당쟁을 벌이며 국가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 공화를 말하고 자유를 말하는 것은 성인이 아니면 바보라고 비평하였다. 임한주는 심지어 공화제를 취한 국가의 대통령이 왕왕 하민에게 피살되는 정치 불안을 언급했다. 1910년대 신해혁명과 중국 공화정의 전개는 동시기 한국 유학자의 공화 담론을 활성화시킨 주된 배경이었다. 중화민국 초기의 공화정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의 공화정을 모두 목도한 한국인이 체감한 공화란 무엇이었을까? 그러나 왕정인가 공화정인가 하는 물음이 공화의 전부일까? 미국 건국 이념의 핵심 키워드가 자유주의의 권리인가 공화주의의 덕인가 하는 물음을 한국사에도 던질 수 있을까? 3.1의 ‘대표’와 5.18의 ‘시민군’, 그리고 촛불혁명의 ‘촛불’은 한국의 공화주의를 위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공화정에서 공화주의로 시선을 옮길 때 한국의 공화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으리라. 1) 백성과 ~ 뜻 : 원문은 ‘與民好惡之意’이다. 이것은 『大學』의 ‘治國平天下’ 장의 뜻을 ‘與民同好惡而不專其利’로 풀이한 것을 축약한 말이다. 2) 맹자는 ~ 했습니다 : 『孟子․盡心』에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이라는 구절이 있다. 맹자는 ‘君爲輕’이라 했는데 林翰周의 글에서는 ‘君次之’라고 표현을 달리했다. 3) 주자는 ~ 했습니다 : 『六韜․武韜』에 ‘天下者 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朱子의 말이 아니다. 다만 『孟子․萬章』에 ‘堯以天下與舜, 有諸?’라는 만장의 질문과 ‘天子不能以天下與人’이라는 맹자의 대답이 있는데 이 구절에 대한 『孟子集註』의 주석에 ‘天下者, 天下之天下, 非一人之私有故也’라는 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朱子의 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4) 공자는 ~ 하였소 : 『周易․繫辭傳』에 ‘天尊地卑, 乾坤定矣. 卑高以陳, 貴賤位矣.’라는 구절이 있다. 5) 또 ~ 하였소 : 『禮記․曾子問』에 증자가 ‘喪有二孤, 廟有二主, 禮與’라고 묻자 공자는 ‘天無二日, 土無二王.’라고 답한 구절이 있다. [참고문헌] 柳麟錫, 『毅菴集』 권12 「與中華國袁總統-世凱」 柳麟錫, 『毅菴集』 권25 「與中國諸省士君子」 柳麟錫, 『毅菴集』 권51 「宇宙問答」 曺兢燮, 『巖棲集』 권17 「非共和論」 李炳憲, 『中華遊記』 조승래, 「공화국과 공화주의」『역사학보』198, 2008 박찬승, 「한국의 근대국가 건설운동과 공화제」『역사학보』200, 2008 이영록, 「한국에서의 민주공화국의 개념사」『법사학연구』42, 2010 김상기, 「임한주의 사상과 독립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47, 2014 김정인, 「초기 독립운동과 민주공화주의의 태동」『인문과학연구』24, 2017 이경구, 「조선시대 공화(共和) 논의의 정치적 의미」『역사비평』127, 2019 이기훈, 「3.1운동과 공화주의」『역사비평』127, 2019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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