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중원의 황혼, 최치원(崔致遠)과 황소(黃巢) 게시기간 : 2019-09-04 07:00부터 2030-01-01 01:01까지 등록일 : 2019-09-02 16:5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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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년 겨울 21살의 최치원(崔致遠, 857∼?)은 한 해 남짓 복무하던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를 사직하고 낙양(洛陽) 종남산(終南山)에서 굉사과(宏詞科)를 준비하였다. 시(詩)ㆍ부(賦)ㆍ논(論)의 3편으로 선발하는 굉사과에 합격하면 기한이 채우지 않고도 최소한 종6품 현령(縣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현위가 비록 종9품 최말단이라도 빈공과(賓貢科) 진사 2년 만에 얻은 직책이었던 만큼, 웬만큼 문장에 자신이 있지 않고서는 박차고 나서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굉사과는 결원을 보충할 때 실시하는 임시로 개설되는 과거였고 권력자의 추천이 필요하였다! 강소성 진강(鎭江)의 진해군절도사(鎭海郡節度使) 고병(高騈, 821∼887)에게 그간 지은 백 수십 편의 시문과 함께 자신을 추천하는 글을 올렸다. “저는 신라 사람입니다. … 12살에 계림(雞林)을 떠나 20살에 꾀꼬리가 날기 전 살던 골짜기[鶯谷]를 벗어나 나무[溧水縣尉]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잠시 일개 현위(縣尉)를 떠나서 굉사과에 응시해 보고자 합니다. …만물이 정성을 바치고 천하가 귀의하는 이때에 상공(相公)의 객관을 찾아가지 않고 상공의 덕문(德門)에서 노닐지 않는다면, 문인이 부끄럽게 여길 일이요, 뭇사람의 비방을 받을 일입니다.”1) 고병은 ‘발해(渤海) 고씨(高氏)’ 산동 명문 출신으로 시인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고문진보』에 실린 「허공을 걷는 노래 步虛詞」는 불로장생 연단(鍊丹)에 심취하고 『주역』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듯이 그려낸 명품이다.
그런데 굉사과는 없었다. 최치원은 고병의 도통순관(都統巡官) 즉 종사관으로 나섰다. 군막에서 황제에게 바치는 상주문을 비롯하여 절도사가 여러 관료에게 보내는 서찰 첩문 등 일체 문서를 작성하였으니, 붓 농사[筆耕]를 지었던 셈이다. 산동의 소금장수로서 향락정치 가렴주구에 분기탱천한 ‘기의(起義)’ 지도자 황소(黃巢, ?∼884)의 기세가 맹렬할 때였다. 황소는 한때 고병에게 패배하여 양자강 넘어 광동성(廣東省) 광저우(廣州)까지 퇴각하였다가, 백성들의 환호와 귀의에 힘입어 회하와 장강 하류(安徽省과 江蘇省, 浙江省) 일대를 피하여 오늘날의 호남(湖南)ㆍ호북성(湖北省)을 휘돌며 북상하였다. 어느덧 60만 대군의 황소는 낙양을 접수하고 곧장 서쪽으로 치달아 황제가 빠져나간 장안(長安)에 들어가 황제에 오르고 ‘대제(大齊)’를 선포하였다. 880년 7월 가을이었다. 최치원은 「황소에게 보낸 격서 檄黃巢書」를 지었다. ‘천하 사람들이 온통 그대를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땅 가운데 귀신까지 가만히 베어 죽이려고 의론할 것이라는 현륙음주(顯戮陰誅) 대목에서 황소가 놀라 평상에서 떨어졌다’는 천하 명문이었다. 황소가 몇 차례 진사에 낙방하였지만, 5살에 시를 짓고 여러 서책을 섭렵하였음을 감안하였음일까? 고금 사적과 경전을 종횡무진 구사하였으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느냐? 『도덕경』에 ‘사나운 회오리바람은 아침나절을 넘기지 않고, 퍼붓는 소낙비도 한나절을 넘지 않는다. 하늘과 땅도 오래가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하였다. 또 듣지 못하였는가? 『춘추전』에 ‘하늘이 선하지 못한 자를 잠시 놔두는 것은 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흉악한 짓을 더 많이 저지르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하였다.” 이 글은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 討黃巢檄文’으로 알려지며 황소 패망을 앞당겼다고 평가받지만, 기실 ‘봉토를 받고 제후가 되라’는 귀순 권유문이었다. 실제 고병은 장안을 수복할 뜻이 없었다. 황제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회남 양주에 할거하였을 뿐, 군대를 움직이지 않았다. 이웃 절도사들이 ‘원군을 보내지 않아서 인심이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2) 이 때문에 절도사 직책은 유지하였지만,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ㆍ강회염철전운사(江淮鹽鐵轉運使)와 같은 동남 방면의 병권과 재정을 관장하는 막강한 권한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황소는 ‘애꾸눈 호랑이[獨眼龍 飛虎子]’로 유명한 이극용(李克用)―돌궐 출신으로 그 부친이 당에 귀화하며 국성 ‘이씨’를 하사받았다―의 공세에 밀려 2년 넘게 차지하였던 장안의 궁궐을 불태우고 도망쳤다. 그리고 잇단 부하의 투항 배반을 겪다가 그의 형제ㆍ처자와 함께 다른 사람도 아닌 누이의 아들 생질에게 몰살당하였다. 884년 6월 여름이었다. 황소는 소금장수로 생계를 꾸려가며 신의를 임무로 삼던 협객 즉 임협(任俠)과 어울렸다. 날쌜 협(俠)에는 재물을 가볍게 여긴다는 경재(輕財)의 뜻과 함께 약자를 돕고 강자를 물리친다는 정의감과 어울린다. 더구나 의로울 의(義)와 읽은 소리가 비슷하다. 그러나 황소 휘하의 부장은 그렇지 않았다. 조정과 결탁하며 엄청난 재물을 받고 높은 관직에 올랐다. 특히 장안에서 내응하여 수훈을 세우며 ‘전충(全忠)’의 이름과 함께 양왕에 책봉되었던 주온(朱溫, 852∼912)은 머잖아 당 황제를 죽이고 후량(後梁)을 건국하였다. 주전충의 피는 새파랬을까? 부자 형제 일가의 골육상잔 아귀다툼은 기가 막히다. 주전충은 셋째 아들 우규(友珪)에게 살해되고, 우규가 시위대에게 목숨을 앗기자 황위에 오른 우정(友貞)―우규의 이복동생― 또한 형제 친지를 죽이다가 이존욱(李存勖)이 공격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존욱은 주전충에게 역습을 당하고 분사하였던 이극용의 아들이었다. 당 멸망(907)부터 송의 통일(979)까지의 반세기 넘게 화북의 다섯 왕조―후량(後梁, 907∼923), 후당(後唐, 923∼936), 후진(後晋, 936∼947), 후한(後漢, 947∼950), 후주(後周, 951∼960)와 여러 지방에 할거한 10개 왕국이 병립한 오호십국(五胡十國) 시대는 이렇게 열렸고 그렇게 흘러갔다. 흔히 ‘조씨(曺氏)의 위(魏)를 대신한 사마씨(司馬氏)의 진(晉)’을 몰아내며 돌출하였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304∼439)을 오랑캐가 주인이 되었던 치욕스러운 난세 혹은 대분열의 시대로 각인하지만, 기실은 호한(胡漢) 융합의 거대한 기운이 고취되는 시기였다. 즉 유학 하는 선비 사대부가 예전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대우를 받았으며 도교와 불교가 발흥하는 기틀이 다져진 것이다. 이러한 기틀 위에서 회하 이북을 통일한 북위 이후의 북조(北朝, 439∼581)와 양자강까지 쫓겼던 동진(東晉, 317∼419) 이후의 남경에 차례로 들어선 네 왕조 즉 남조(南朝, 420∼589)는 비록 통일을 이루진 못하였지만, 정치제도의 변화, 다양한 문화의 공존과 침투를 이끌어냈다. 더욱이 남조에서는 ‘바다와 물길’을 이용하여 놀랄 만한 농업 및 상업 발달을 이룩하였다. 인구도 크게 늘었다. 여기에서 거대한 제국, 수ㆍ당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오대는 후안무치 야만의 시대였다. 오대의 책임만은 아니었지만, 경제는 쇠락하고 학술과 정치의 최소한의 만남도 실현되기 힘들었으니, 그것은 민생파탄, 사상문화적 퇴폐였다. 따라서 오대의 상흔을 치유하자면 정치 군사 경제적 차원이 물론 중요하였지만, 교육과 학술의 부흥프로젝트가 절실히 요구될 터였다. 그것은 사람을 다시 보자는 새로운 성찰, 학문다운 학문에 대한 기대를 키웠고, 이를 감당할 사람 즉 선비 사대부를 새롭게 호출할 것이었다. ‘술 한잔으로 무신의 병권을 빼앗았던’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이 침전 곁방에 세운 서비(誓碑)에 다음과 같은 경구를 적었다. “사대부와 상소를 올려 나랏일을 말하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3) 1) 『桂苑筆耕集』 권17, 「태위에게 처음 올린 글 初投獻太尉啓」. 이때 고병은 檢校太尉를 兼帶하였다.
2) 『계원필경집』 권11, 「강서 왕상서에게 답한 글 答江西王尙書書, 代高騈」 3) 위잉스(余英時), 이원석 옮김, 『주희의 역사세계(상)』, 291ㆍ295쪽.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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