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소치의 아들 게시기간 : 2019-09-05 07:00부터 2030-01-01 01:01까지 등록일 : 2019-09-02 17: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
||||||||
소치 허련(1808∼1892)이 우리나라 남종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소치 허련과 그의 아들 미산 허형(1862∼1938), 족손 의재 허백련(1891∼1977), 손자 남농 허건(1907∼1987) 그리고 아직도 그 뒤를 잇고 있는 많은 후손 화가들과 문제자들이 호남 화단을 수놓고 있다. 두 차례의 소치에 관련된 이야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소치가 아들에게 보낸 간찰과 아들을 지인(知人)에게 소개한 간찰 두 점을 소개한다. 첫 번째 간찰은 경진년(1880, 고종17) 서울에 세금을 상납하러 간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고, 두 번째 간찰은 병술년(1886, 고종23)에 장흥 보림사에 머물던 소치가 보성 반곡의 지인에게 그림 그리는 아들과 글씨 잘 쓰는 제자를 소개하는 간찰이다. 소치는 자신을 닮아 그림을 잘 그린 큰아들 은(溵)을 총애하였다고 한다. 호를 미산(米山)으로 하였다. 그러나 은이 일찍 죽자 뒤늦게 그림의 소질을 발견한 막내 형(瀅)이 형의 호를 계승하여 미산으로 칭하고 화업을 계승하였다. 사람들이 소미산(小米山), 대미산(大米山)이라고 구분하여 불렀다. 發船之後 風吹連好 万/幸 未知何日泊江 而船中/憊苦之餘 身上安好 上/納節次 隨機善圖 以至/無事了勘耶 了勘則似可/回程計日 能到家耶 來路/歷入羅浦擬意耶 我/之日夜關心 望眼欲穿/也 邑山家憂故之不撤/ 甚悶而次次廻完之勢/ 勿慮也 收刷上納 庶幾入/量云 而雲五上去 對話無/窮 而其將善處矣 第是/福祖事 甚怪耳 去月二十/日日暮也 母子出他 使我/不知而云謂羅浦去矣 日間/聞之 則尙淹于海南同宗/寡婦家云 其將前進耶/ 其將還來耶 心亂事耳/ 公納賣畓充完云 何賴/而爲生耶 神眩眼暗 只/此數行耳 庚辰五月十六日 父書 去夜忌故 不知何以成樣/ 而聞喜下去 今日因雨未廻/耳 배가 출발한 이후 바람이 연속으로 좋다니 다행이다. 언제 강에 정박하는지 모르겠구나. 배에서 피곤하고 고생하였을 텐데 몸은 괜찮으냐? 상납 절차는 기회를 봐서 잘 도모하여 무사히 마감했느냐? 마감했다면 돌아올 일정을 계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 집에 도착할 것 같으냐? 돌아오는 길에 나포(羅浦)에 들를 생각이냐? 나의 밤낮으로 마음이 쓰여서 눈이 빠질 것 같구나. 읍산(邑山)의 집 우환은 끊이지 않으니 매우 고민이지만 차차 회복할 형세이니 걱정 말아라. 거두어 상납하는 것이 대강 될 것 같다고 하던데 운오(雲五)가 올라가면 대화가 무궁할 것이니 잘 선처하라. 다만 시복(是福)의 할아비 일은 매우 괴이하다. 지난 달 20일 해가 진 뒤에 모자(母子)가 출타하였는데, 나 모르게 나포로 갔다고 한다. 일간에 들으니 해남의 같은 종씨 과부의 집에 아직 있다고 하는데, 장차 더 나갈 것인지 돌아올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심난한 일이다. 공납은 논을 팔아서 채웠다고 하는데, 이제 무엇에 의지해서 살 것이냐? 정신이 어지럽고 눈이 어두워 이 몇 줄로 줄인다. 경진년(1880, 고종17) 5월 16일 아비 씀 지난 밤이 기일인데 어떻게 제대로 제사를 지낼지 몰랐는데 소식을 듣고 기쁘게 내려갔다가 오늘은 비가 와서 돌아가지 못하였다.
위 편지는 1880년 5월에 일흔이 넘은 소치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들이 공세(公稅)를 상납하기 위하여 배를 타고 서울에 간 것 같다. ‘배가 출발했다[發船]’든가 배가 ‘강에 정박했다[泊江]’라는 표현이나 ‘상납 절차는 기회를 봐서 잘 도모하라’든가, ‘끝마금[了勘]’, ‘거두어 상납하는 것이 대강 계산이 된다[收刷上納 庶幾入量]’, ‘공납을 논을 팔아 채웠다[公納賣畓充完]’라는 어구(語句)들로 보아서 소치의 아들이 무언가 진도 고을의 공납을 거두어 납부하는 직임을 맡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들이 공납을 마치고 언제 올 예정인지, 오는 길에 나포에는 들를 예정인지, 모자가 출타하여 해남의 같은 종인(宗人) 과붓집에 머물고 있다는 등 집안일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나포는 지금의 군산 근처 임피에 있는 나리포를 말한다. 조선후기 함열의 성당창과 함께 전라도의 세곡의 주요 집하처이자 서울로 출발하는 포구였다. 의재 허백련의 부탁으로 위당 정인보가 쓴 소치 비갈(碑碣)에 의하면 소치에게는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 은(溵, 1831∼1865), 락(洛), 함(涵), 결(潔, 뒤에 瀅으로 개명)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네 아들 중 첫째인 은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막내인 형은 열아홉 살이다. 열아홉에 세곡을 서울까지 운반하는 일을 담당할 수 있을지는 알 수가 없다. 둘째인지 셋째인지도 모르겠다. 소치 비갈에는 소치의 동생인 전(鐫)이 가선대부의 품계를 받아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추증(追贈)된 사실도 밝히고 있다. 소치의 집안은 동생 전이 품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부모를 추증할 만한 자산이 있는 지역 사회의 유력 계층이었다. 조선 후기에 각 고을의 세곡을 운반하여 납부하는 책임을 맡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로서, 세곡을 서울 중앙 관사에 납부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고역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 사회의 유력 계층이 아니면 담당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 일 때문에 가산을 탕진하여 패가망신할 수도 있지만, 또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다.
그림2 소치가 반곡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
다음 편지는 1886년 여든에 가까운 소치가 반곡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겉봉 없이 둘러막아 마감한 이 편지는 발신자가 ‘보림사에서 곧 돌아갈 예정인 나그네의 안부 편지[寶寺歸客候書]’라고 되어 있고 수신자는 ‘반곡 전장의 장명자[盤谷庄上將命者]’이다. 보림사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했다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로 장흥 가지산에 있는 사찰이다. 소치가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 머물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곡 전장’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어느 정도 규모의 영농을 하는 부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명자(將命者)’는 ‘명을 받는 사람’ 즉 상대방을 바로 칭하기 어려워 존칭하는 의미에서 쓰는 글귀이다. 장흥 반곡의 세족이었던 영광 정씨 집안사람으로 생각된다. 임란 발발 당시 선산 군수로서 의병을 모아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과 함께 금오산에 왜적을 무찔렀으며, 이후 통제사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활약한 정경달(丁景達)과 다산 정약용에게 배웠던 정수칠(丁修七)이 그곳의 영광 정씨이다. [盤谷庄上將命者 寶寺歸客候書] 矯首雲山 所懷渺渺 况番/風夜雨 春色漸催乎 伏/詢辰下/ 侍節禧康 日前刀圭之/事 已撤無憂否 憧祝區區 記下/尙淹此地 寔有所待者矣 果/然家豚來見 喜不可量也 今又分路之勢 而兒聞/貴莊盛稱之事 思欲一往見/之 不必止而尙勸之 大抵此兒/ 能襲畫學 頗有跨竈之//譽 遠近俱知 今此往拜/之日 試其畵則可知矣 且//此作伴人李雅/ 卽門弟也 而能//善書 亦試之則可知矣 兩人聯/笻 欲作江山遊覽之行 疎放則甚/矣 寧復無妨 快許其意/ 是亦一痴歟 奉呵奉呵 不備 丙戌二月十八日 記下 許鍊 拜上 [반곡에 사는 분에게 보림사의 귀객의 안부 편지] 머리를 돌려 먼 산의 구름을 바라보면 그리움이 아득합니다. 하물며 봄바람과 밤비에 봄빛이 점차 짙어지는 데에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어버이 모시고 복되게 건강하시겠지요? 일전에 약을 먹던 일은 이제 걱정이 덜어지셨습니까? 마음 깊이 축원을 드립니다. 저는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는 기다리는 것이 있어서입니다. 과연 집 아이가 와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 이제 또 헤어질 때가 되었는데, 아이가 귀하의 명성이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한번 가서 보고 싶어 합니다. 말릴 것도 없고, 오히려 권장하였습니다. 대개 이 아이는 그림 공부를 잘 따라 해서 자못 아비보다 낫다는 칭찬이 있다는 것은 원근에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제 가서 인사드리는 날 그의 그림을 시험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에 함께 가는 사람 이 선비[李雅]는 바로 나의 제자인데 글씨를 잘 씁니다. 역시 시험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강산 유람을 떠나려고 하는데 너무 거칠고 방종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괜찮을 것 같아서 흔쾌히 그 뜻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도 역시 또 하나의 어리석음이지요. 껄껄. 이만 줄입니다. 병술년(1886, 고종23) 2월 28일 기하 허련 배상
그림3 미산의 12폭 묵모란 병풍 : 거친 흑색 삼베로 겉을 댄 전통 장황 병풍이다. 그림 주변을 초록 색지로 대고 위와 아래를 붉은 홍색 색지로 장식한 한말 일제시기 전라도 요호부민의 소박한 사치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편지에서 소치는 반곡의 지인에게 아들과 제자의 그림, 글씨 솜씨를 자랑하며 이들의 실력을 시험해볼 것을 권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그림 잘 그리는 아들은 물론 죽은 형으로부터 호를 물려받은 미산 허형이다. 형이 죽은 후 늦게서야 아버지로부터 그림 솜씨를 인정받아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미산 허형의 그림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거의 주목 받지 못하고 있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고 진도에 유배 온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에게서 글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정식으로는 누구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배웠다는 기록도 없다. 아버지 그림의 잔영이 짙게 드리워진 미산의 그림은 정형화된 산수와 묵모란, 묵죽, 묵란 등 패턴화된 장식 그림을 양산하여 호남의 요호부민 집안의 소박한 사치욕을 채워준 듯한 느낌이다. 근대화, 식민지가 되어가는 세상과 화단의 추세도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러한 과제는 제자이자 족손인 의재(毅齋)와 아들 남농(南農)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글쓴이 김현영(金炫榮) 한국고문서학회 명예회장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