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고운(孤雲)과 고운(顧雲), 그리움은 구름처럼 게시기간 : 2019-09-10 07:00부터 2030-02-01 13:16까지 등록일 : 2019-09-09 13: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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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한창 시절을 군막에서 많은 문서를 감당하는 종사관을 지낸 최치원, 천하에 문명을 알리며 5품 이상의 비어대(緋魚袋)를 하사받고, 백관을 규찰 탄핵하는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이 되었다. ‘출신 입사하고 이삼십 년이 지나도 쉽게 될 수 없는’ 벼슬이었다.1) 비록 조정에 나가 실제 직책을 수행하지는 않았지만….2) 이때 거대한 제국의 황혼을 목격하였다. 황소의 기세에 편승하였다가 돌연 재물과 벼슬을 흥정하는 배반의 군상, 환관에 휘둘리며 향락에 휩싸인 무능한 황제! 더구나 절도사 고병은 회남에 할거하며 조정과 불화하고, 심지어 황제를 ‘망국의 군주’로까지 비방하였다. 어찌하나? 최치원은 ‘존엄한 분부를 따르지 않고 바른말[讜言]을 진달’하다가, 호소하였다.3) “비옵건대 저의 직책이 걸맞지 않다는 비방을 벗겨주소서. 제가 안정을 되찾도록 물러남을 특별히 허락해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혹여 내치지 않고 이대로 머물게 하시려면, 쓸데없는 자리[宂員]에 채워 주시거나 직책 없이 그냥 약간 곡식이나마 내려주옵소서.” 절도사는 돈과 곡식을 더해주고 옷감도 내려주었다. 달빛 아래 계수나무 동산에서 한가하였을까? 그간 군막에서 ‘필경’하며 쏟아낸 문서를 추려내 ‘계원필경(桂苑筆耕)’에 묶었다. 그러던 차, 신라국 사신이 회남으로 들어왔다. 신라국입회남사(新羅國入淮南使‘ 김인규(金仁圭)였다. 회남은 바다 건너 산동 내려 장안 가는 길목, 황소가 산동에서 기세를 올리자 사신 파견이 중단된 지 6년 만인 884년, ‘황소적(黃巢賊)’이 평정된 그해 가을이었다.4) 이때 사신단의 녹사(錄事)로 왔던 종제(從弟) 최서원(崔栖遠)이 소식을 전하였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기다리신다.” 동복형은 가야산으로 출가하였음도 알렸을 것이다. 아아, 12살 떠나올 때, ‘십 년 안에 진사에 오르지 못하면 나의 자식이라 하지 말라’ 하셨던 아버지! 최치원은 절도사에게 고향을 다녀오는 말미를 얻었다. 신라에 보내는 국신(國信)―필시 황소적이 격파되었으니 조공하라는 내용이었을 것―을 전송하는 임무와 함께. ‘회남입신라겸송국신등사(淮南入新羅兼送國信等使)’가 된 것이다. 어쩌면 잠시 다녀올 생각이었을까? 고병에게 보낸 ‘사례문’에 적었다.5) “오직 바라는 바는 잠시 동쪽으로 돌아갔다가 서쪽으로 다시 돌아와 모시면서, 우러러 어지신 봉토(封土)에 의지하여 오래도록 비루한 자취를 편안하게 하고 싶습니다.” 고병에게 이별장을 올렸다.6)
해 뜨는 고국에서 벼슬살이 티끌을 씻고 싶다고 하였을 뿐, 처음 귀성을 청원하며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은 오간 데가 없다. 기실 그간 최치원은 신라인임을 잊지 않았다. 고병에게 자천장(自薦狀)을 올리면서 ‘신라인’임을 분명히 밝혔고, 이후도 ‘해외인’ ‘동해의 일개 포의[東海一布衣]’, ‘공자의 생도를 일컫는 먼 나라 사람[今遠人稱尼父生徒]임을 드러냈다.7) 말 또한 달라서 경전을 우리말로 다시 풀이하며 공부하였던 어려움도 감추지 않았다.8) 물론 중국말을 익혀 의사소통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지만, 우리말로 경전을 풀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우리말을 버리지 않고 잊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훗날 쌍계사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850)의 탑비에도 적었다. “이중번역[重譯]을 하며 배움을 쫓아야 한다.”9) 고병이 마련해준 선편으로 떠나기 전, 사연 많은 벗과 석별의 자리가 없을 수 없었다. 오만(吳巒)에게 담담하게 건넸다. 다음은 절구 2수 중 두 번째다.10)
마침 장안으로 들어가 과거를 보러 가는 양섬(楊贍)에게는 아쉬움을 듬뿍 담았다.11) “… 그대는 꾀꼬리 골짜기에서 드높이 날겠지만, 나는 돌아가 요동의 돼지를 바친다면 부끄러울 것이야. 우리 마음 변치 말고 뒤에 만나서, 광릉의 풍월 속에 술잔을 나누세.” ‘요동의 돼지[遼豕]’는 낮고 좁은 식견을 말하며, 광릉(廣陵)은 양주 서쪽의 성곽이다. 양섬이 무척 서운해하여 ‘다시 만나 술잔을 나누세’ 하였음이다. 다른 전별시에서도 “슬픔보다 더한 슬픔은 아녀자의 일, 이별한다고 굳이 풀 죽을 것까지야!” 하였다. ‘여도사(女道士)’에게도 이별시도 건넸다.12)
여도사는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 혹은 궁관(宮觀)에서 수련하는 여성에게 내리는 직책인데, 여관(女冠)이라고도 한다. 유명한 양귀비(楊貴妃)가 잠시 여관을 지냈다. 재주와 미모를 갖춘 여자들이 평범한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도관에 의탁한 경우가 적지 않았으리라. 어느덧 초겨울, 최치원 일행은 산동성 등주(登州) 오늘날 옌타이[煙台] 유산포(乳山浦)로 갔다. 그런데 배를 띄울 수 없었다. 큰바람이 무섭게 휘몰아친 것이다. 절도사가 ‘되돌아오라’ 할까를 걱정하였을까? ‘진흙탕에서 꼬리를 끄는 별주부’ 신세임을 알리면서 끝자락에 적었다. “슬기롭고 능란하게 대처하고, 일찌감치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13) 봄이 와도 여전히 풍랑은 거칠었다. 등주 참산(巉山)의 신령에게 제사까지 지냈다.14) “바라옵건대 좋은 경치를 구경하고 노래 부르며, 배 띄워 순식간에 바다를 편히 건너도록, 오직 대왕의 바람[大王之風]에게 부탁드리는 바이니, 군자의 나라[君子之國]에 빨리 돌아가서 황제의 명령을 전할 수 있도록 신령의 직분을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랍니다. 상향(尙饗).” 이제 배에 오르면 된다. 이즈음 회남에서 석별의 정을 나누지 못하였던 벗, 고운(顧雲)이 왔을까? 그간 최치원에게 신라의 산과 바다를 실컷 들었음이 틀림없다. 송별시로 건넨 ‘신선 선비의 노래 儒仙歌’가 다음과 같다.15)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마리의 금빛 자라 있고, 금빛 자라는 머리에 높고 높은 산을 이고 있다네. 산 위에는 진주로 만든 궁궐이 찬란하고, 산 아래엔 파도가 끝없이 넘실대리라. 한 켠에 한 점 계림(鷄林)이 새파란데, 금오산(金鰲山)이 잉태하여 빼어난 인재 낳았어라. 열두 살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으로 온 중국을 감동시켰지. 열여덟에 사원(詞苑)을 누비며 솜씨를 겨루더니만, 화살 하나로 금마문(金馬門)의 대책(對策)을 쏘아서 맞혔더라. 고운은 지주(池州)―처음 벼슬했던 선주의 율수현과 가깝다―출신으로 고병에게 최치원을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최치원과 같은 해 진사에 들었고 막부에서도 동사(同事)하였었다. 이후 ‘선종(宣宗)ㆍ의종(懿宗)ㆍ희종실록(僖宗實錄)’을 편찬에 참여하였던 고운은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사마광이 편찬한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고씨편유(顧氏編遺)』 10권 등이 전한다. 그런데 최치원 38살 때인 894년에 세상을 버렸으니, 그다지 오래 살지 못하였다. 혹여 소식을 들었을까? 최치원의 외로운 구름[孤雲], 바닷가 구름[海雲]이란 자호에 혹 고운(顧雲)을 담았음은 아닐까? 1) 『계원필경집』 권18, 「장계 長啓」
2) 崔瀣, 『拙藁千百』 권2, 「사명을 받들고 왔다가 원의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중보(李中父)를 떠나보내며 주는 글 送奉使李中父還朝序」. 최해(1287∼1340)는 최치원의 후손이며, 이중보는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이색(李穡, 1328∼1367)의 부친이며 박상충(朴尙衷, 1332∼1375)의 장인―으로 금강 하구 한산인(韓山人)이다. 3) 『계원필경집』 권18, 「장계 長啓」. 바로 앞에 「관직을 사양하는 장문 謝職狀」이 있다. 4) 『삼국사기』 권11(신라본기 11) 헌강왕 4년(878) 7월. 신라는 최치원이 귀국한 직후 ‘황소적 격파’를 하례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동왕 11년조). 5) 『계원필경집』 권20, 「귀근하도록 허락해 준 데 대해 사례한 계문 謝許歸覲啓」 6) 『계원필경집』 권20, 「태위에게 진정하며 올린 시 陳情上太尉詩」 7) 『계원필경집』 권18, 「장계」 및 「이부시랑에 제수된 것을 하례한 별지 賀除吏部侍郎別紙」 8) 『계원필경집』 권17, 「태위에게 두 번째 올린 글 再獻啓」 “伏以某譯殊方之語言 學聖代之章句” 9) 『孤雲集』 권2, 「眞監和尙碑銘 並序」 “重譯從學” 10) 『계원필경집』 권20, 「오만 수재의 석별 시에 답한 절구 두 수 酬吳巒秀才惜別二絶句」 11) 『계원필경집』 권20, 「양섬 수재의 송별에 답하다 酬楊贍秀才送別」 세주(細注) “時楊生有隨計之行” 및 「진사 양섬의 송별에 답하다 酬進士楊贍送別」 12) 『계원필경집』 권20, 「여도사와 작별하며 留別女道士」 13) 『계원필경집』 권20, 「태위에게 올린 별지 上太尉別紙」(5) 14) 『계원필경집』 권20, 「참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낸 글 祭巉山神文」 15) 『삼국사기』 권46, 열전 6, ‘최치원’ “我聞海上三金鰲 金鰲頭戴山高高 山之上兮珠宮貝闕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傍邊一點鷄林碧 鰲山孕秀生奇特 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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