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잠에서 깨려는데 밖에는 빗방울 소리가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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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의 제재는 다양하다. 눈, 꽃, 달, 구름처럼 자연과 계절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험산(險山)과 격랑, 기물(奇物)과 맹수(猛獸)와 같이 위압적이고 기괴한 것들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제재에 인간사의 다단한 경험이 얽히면서 한시는 다채로운 맛을 발산한다. 그런데 때로는 밋밋하거나 진부한 것들이 시의 그릇에 담기면서 오히려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에 주목한 시 한 편을 읽어 보자. 이 시는 세종 조에서 성종 연간에 걸쳐 활동한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의 것이다. 서거정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대구, 호는 사가정(四佳亭)이다. 1444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 집현전 박사 등을 거쳐, 이조ㆍ병조판서ㆍ좌찬성을 지냈다. 문장에 탁월한 능력을 지녀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올 정도였다. 한 시대의 문풍을 좌우하는 대제학(大提學)을 23년이나 맡았는데, 이로 인해 동시대의 인재였던 강희맹(姜希孟, 1424∼1483)ㆍ이승소(李承召, 1422∼1484) 등이 대제학을 해보지도 못한 채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평온한 시대를 배경으로 화미(華美)하고 부려(富麗)한 시를 창작했다. 스스로 “눈과 귀에 접하는 모든 것을 시로 지어 평생 만천 수나 된다. 僕少有詩癖 凡懽娛悲慽 寓目屬耳 一於詩發之 有書于稾者 有不書者 不知其幾 今搜閱舊稾 已萬有千首 猶不廢日課 誰知不切於時 無益於後 亦不自已”(『四佳集』 卷52, 「書拙稾後」)고 말할 만큼, 생활이 시이자 시가 곧 생활인 시인이기도 했다. 이 시는 그의 문집 『사가집』에는 보이지 않고 허균(許筠)이 조선 중기까지 최고의 시만을 뽑아 엮은 『국조시산』에만 실려 있다. 시의 제목을 그대로 번역하면 “자다가 일어나서” 또는 “졸다가 깨어” 정도가 될 것 같다. ‘연꽃 향기’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연꽃이 피는 여름 어느 날에 쓴 작품으로 보인다. 평범한 내용의 이 작품은 한 번 읽은 눈을 다시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그 이유는 오래전 시인의 경험이 오늘 우리의 생활 경험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 맞이한 어느 휴일, 그날따라 비가 내릴 듯 날이 침침했는데, 소파에 기대 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통화의 내용일 수 있고 잡담의 일부일 수도 있는 말이다. 이 같은 평범한 신변사를 시인은 독특한 방식으로 읽어냈다. 첫 두 구를 보자. 발[簾]에 가린 방안은 날이 흐려지면서 어둑해지고, 연꽃 향기는 문을 통해 언뜻언뜻 다가온다. 현실과 잠의 경계에서 잠으로 접어드는 순간을, 시인은 어슴푸레 보이는 그림자와 바람결에 다가오는 향기로 대신 표현한다. 3구에 와서 시상(詩想)의 비약이 이루어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곤한 잠이 깨려던 참이다. 아직 잠의 힘이 온몸을 붙잡고 있는데, 큼지막한 오동잎에 후드득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도 한 번쯤은 겪었을 일상의 장면을 시인은 지금의 일인 듯 실감이 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성공 요인은 잠에 빠져드는 흐름과 기상의 변화를 흔적 없이 엮은 데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감각’의 형태를 통해 어필한 데에 있다. 나른함 끝에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나는 흐름을, ‘발의 그림자’(시각), ‘연꽃의 향’(후각), ‘빗소리’(청각)를 통해, 모호함에서 명료함의 이미지로 매끄럽게 전환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현장의 느낌이 살아나고 유사한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선인들이 가졌던 ‘일상 속의 감각’이다. 바꿔 말하면, 생활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섬세하게 느끼고 그것을 감각적으로 향유하는 모습이다. 그들의 감각은 항상 외계(外界)를 향해 열려 있었고,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고단한 현실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의 흐름으로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세상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또는 어떻게 경제적인 성장을 이루어왔는지 등에 관해 이런저런 것들을 열거하며 정리하는 습관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정신사이거나 경제사이다. 그런데 잊기 쉬운 또 다른 역사가 있다. 예를 들면, 저물녘의 노을이며, 양철 지붕을 두드리던 소나기의 리듬, 교실에 들어섰을 때의 싫지 않은 매캐함, 한 시대의 기억과 맞먹는 어느 대중 가수의 음색(音色), 고독을 벗 삼아 기울이던 독주(毒酒)의 맛. 이러한 것들은 누군가의 개인사를 이루는 ‘감각의 사건’들일 수 있다. 아기가 엉금엉금 엄마의 품을 찾아가는 것은 자신과 분리될 수 없는 냄새와 소리, 맛과 촉감이 엄마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정신의 역사, 경제의 역사가 아니라 나만의 감각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잊고 지냈던 나의 일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사에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는 것일 수도 있고 무언가에 위축된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일 수도 있으리라. 잃어버린 감각을 복기해 가는 것은 곧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또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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