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유학문선] 수구(守舊)란 무엇인가?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근대유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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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세상이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굴원(屈原)의 슬픔이다. 세상이 탁하면 나도 탁하고 세상이 취했으면 나도 취하리. 어부의 지혜이다. ‘여세추이(與世推移)’의 경지이다. 나라가 있을 때에도 ‘여세추이’는 떳떳하지 못했다. 이항복은 어느 날 수박을 선물받자 광해군의 조정에서 타협하는 자신의 ‘여세추이’를 비판하는 뜻임을 알아차렸다. 하물며 나라가 없어진 뒤의 ‘여세추이’는 무엇이었을까? 1912년 호남 유학자 유영선은 영남에서 온 손님과 문답을 나누었다. ‘수구(守舊)’를 붙들 것인가? ‘여세추이’로 돌아설 것인가? 그는 추호도 망설임이 없었다. [번역] 현곡(玄谷) 주인이 곤궁한 집에 틀어박혀 세상을 붙좇지 않고, 새것을 싫어하며 수구(守舊)를 한 지 몇 년 되었다. 하루는 경상 좌도에서 손님이 왔다. “성인은 세상과 함께 옮겨가는데 그대는 어찌 괴롭게 그리 지내시오?” 주인은 묵묵히 한참을 있었다. “성인은 일이 이치에 해롭지 않은 것은 속세를 따르지만 이치에 해로우면 따르지 않으오. 만약 일이 이치에 해로운지 여부를 묻지 않고 세상과 함께 옮겨간다면 성인이라는 것이 도리어 물 위의 조롱박1)이니 어찌 성인을 귀하게 여기겠소?” 손님이 대번에 대꾸했다. “심하도다, 그대의 오만함이여! 내 듣기로 성인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시중(時中)2) 때문인데,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3) 어느 하나만 고집하는 것이니, 어느 하나만 고집한다면 어찌 도를 해치지 않겠소? 태백(太伯)이 형만(荊蠻)에 달아나 그 풍속을 따라 단발을 하고 문신을 했는데 공자는 지극한 덕이라 칭찬했으니4) 이것이 세상과 함께 옮겨가는 일이 아니겠소?” 주인은 무연(撫然)했다. “그대가 말하는 ‘시중’은 군중을 따르는 일이지 우리 성인의 시중이 아니니 성인을 무욕(誣辱)하는 잘못이 어느 쪽이 더 크오? 태백이 단발하고 문신한 것은 그가 천하를 사양하기 위해서였소. 단발하고 문신해서 세상에 버려진 사람이 되었음을 알린 뒤에야 계력(季歷)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태왕(太王)의 뜻을 지킬 수 있었으니5) 이것이 태백이 ‘지극한 덕’이 되는 까닭이오. 만약 태백이 이것을 위해 단발하고 문신한 것이 아니라면 어찌 성문(聖門)의 죄인에서 벗어날 수 있겠소?” 손님이 아연 다시 청했다. “『중용』을 보면 현재 이적(夷狄)의 위치에 있으면 이적에 맞게 행동하라고 했고6) 지금의 세상을 살면서 옛 도로 돌아가면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고 했으니7) 이 말이 무슨 뜻이겠소? 나는 이적의 세상을 살면 이적의 일을 하고 지금 세상을 살면 지금의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주인이 정색했다. “그대 모습을 보니 어리석고 몰지각한 무리와 떨어져 있지 않은데 감히 성인을 들먹인단 말이오?” 손님이 말했다. “그대의 밝은 가르침을 원하오.” 주인이 말했다. “(그대가 말한) 『중용』 제14장은 현재 처한 위치를 보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라고 말한 것이오. 그래서 부귀와 빈천과 이적과 환난을 차례로 말하면서 어디에 들어가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소. (그대가 말한) 『중용』 제28장은 자기 생각을 쓰고 자기가 전횡하는 잘못을 말한 것이오. 그래서 지금 세상에 태어나 옛날로 돌아가면 재앙이 미친다고 경계하였소. 여기서 지금 세상이라는 것은 곧 주나라가 앞의 두 시대를 본보기로 삼아 찬란하게 빛났다8)는 때이니 폭군이 인륜을 어지럽히고 오랑캐가 중화를 어지럽히는 날을 함부로 가리키지 않소. 만약 그대의 소견대로라면 ‘당하자연’(當下自然)9)이 제일의 도리가 되는데 무슨 까닭에 성인이 괴롭고 괴롭게 경계하는 말을 했겠소?” 손님은 마침내 지팡이를 던져 버리고 두 번 절했다. “제가 도를 들었소이다. 군자가 아니었다면 거의 이번 생을 그르칠 뻔했소이다.” [원문] 玄谷主人杜門窮廬, 不肯與世追逐, 而厭新守舊者有年. 一日客自嶺左而來, 曰聖人與世推移, 子何苦乃爾? 主人默然良久, 曰聖人於事之無害於理者從俗, 而害於理則不從, 若不問其事之害理與否而但與世推移, 則所謂聖人者乃一水上葫蘆, 何貴乎聖人? 客乃率爾而應, 曰甚矣, 子之傲也! 吾聞所貴乎聖人者, 以其時中, 若膠柱鼓瑟, 則亦執一也. 執一豈不賊道乎? 太伯逃之荊蠻, 而從其俗斷髮文身, 孔子稱之以至德, 此非與世推移者耶? 主人撫然, 曰子之所謂時中, 乃從衆之事, 而非吾聖人之時中也. 誣辱聖人孰大焉? 太伯之斷文, 以其讓天下也. 斷文而使知爲棄人, 然後可以安季歷之心而守太王之志. 此太伯之所以爲至德也. 若太伯非爲此而斷文, 則烏得免聖門罪人乎? 客忽訝然而更請, 曰思傳素夷狄行乎夷狄, 居今世反古道, 災及其身, 此言何謂? 吾則以爲居夷狄則行夷狄之事, 居今世則行今之事. 主人正色, 曰觀君狀貌, 不離於蒙騃沒覺之流, 而敢議到聖人耶? 客曰願吾子明敎之. 主人曰思傳十四章, 言其見在所居之位而行所當爲之事, 故歷言富貴貧賤夷狄患難, 而曰無入而不自得. 二十八章, 言其自用自專之非, 故戒生今反古之災及. 其所謂今之世乃周監二代郁郁文哉之時, 非泛指暴君亂倫裔戎亂華之日也. 若如子所見, 則只當下自然爲第一等道理, 何故聖人苦苦垂戒耶? 客乃投杖而再拜, 曰僕聞道矣. 若非君子, 幾誤此生矣. [출전] 유영선(柳永善), 『현곡집(玄谷集)』 권10 「야사문답(野舍問答)」 [해설] 새 천 년 들어와 자주 썼던 메일체에 서술어 종결어미 ‘당’이 있다. 그리 갑니당. 넘 재미있습니당. 이 표현 방식은 오래되었다. 『대동기문』에 의하면 어느 비오는 밤 두 나그네가 서로 장기를 두다가 심심풀이로 ‘공’과 ‘당’의 운을 써서 문답을 나누었다. “무엇하러 서울에 가는공” “녹사하러 올라간당” “내가 그대를 위해 얻어줄공” “우습다. 당치도 않당” 이것이 맹사성(孟思誠)의 유명한 ‘공당문답(公堂問答)’이다. 공당문답과 달리 진중한 문답들도 많았다. 이이(李珥)의 「동호문답(東湖問答)」, 홍대용(洪大容)의 「의산문답(醫山問答)」, 유인석(柳麟錫)의 「우주문답(宇宙問答)」은 조선 유학자의 삼대 문답이라 칭해도 좋을 정도로 걸출하다. 「동호문답」은 사가독서제에 따른 독서당 과제물이었지만 도학적 경세론에 입각한 정치개혁의 의지가 충만했다. 유계(兪棨)는 이를 이어받아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지어 논의를 확장했다. 대한제국기에는 구국의 방안을 논한 작품 「서호문답(西湖問答)」이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되었다. ‘동호자(東湖子)’가 묻고 ‘서호자(西湖子)’가 답하는 형식을 통해 동호의 구시대가 저물고 서호의 신시대가 도래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이에 앞서 송병선(宋秉璿)의 문인 이도복(李道復)은 『대한매일신보』에 「서호문답」을 투고해 을사오적을 필주했다. 전우(田愚)의 문인 유영선(柳永善, 1893∼1961)의 「야사문답」은 국망 직후의 작품이다. ‘수구’를 붙들 것인가, ‘여세추이’로 돌아설 것인가? 이적의 세상에서는 이적의 세상살이를, 지금의 세상에서는 지금의 세상살이를. 나그네는 끊임없이 집 주인에게 ‘여세추이’를 설득한다.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강조한다. 그러나 집주인은 나그네를 설득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이다. 이적의 세상, 지금의 세상이 되었다고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사람다운 도리가 폐기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자연(自然)’보다 중요한 것은 천리의 ‘당연(當然)’이다. ‘여세추이’인가? ‘수구’인가? 이것은 전우의 문하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1921년 생애 말년의 전우가 자손과 문인에게 남긴 글이 있다. 요즈음 사람들은 입만 열면 ‘고금이의(古今異宜)’, ‘여세추이’를 말하지만 자신의 70여년 독서는 ‘수구’의 한 길이었으며 “시세가 변한들 내가 어찌 감히 변할까”를 말했던 정이(程頤)의 뜻을 본받아 결코 유속(流俗)에 휩쓸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수구’는 국망 이전부터 전우의 한결같은 지론이었다. 신문사와 학회가 ‘멸망’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협박해 신학(新學)에 들어가게 하지만 차라리 구학(舊學)을 지키다 죽겠다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국망 이전이든 이후이든 그에게 ‘수구’는 세속적인 세상에 대한 비타협이며 저항이었다. 그러면 전우의 ‘수구’는, 유영선의 ‘수구’는 연원이 오래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의 ‘수구’는 대개 술어적으로 ‘○守舊○’로 쓰였고 ‘순상수구(循常守舊)’라는 말에서 보듯 하던대로 한다는 ‘인순(因循)’의 뜻에 가까웠다. 비타협과 저항으로서의 ‘수구’는 근대에 출현하였다. 일본에서는 1877년 서남전쟁을 배경으로 정부에 저항한 구식 사무라이 집단을 ‘수구’라 일컬었고, 조선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정부의 ‘개화’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선비를 ‘수구’라 일컬었다. ‘수구’라는 이름의 저항은 미증유의 사건이었다. ‘수구’는 달라진 세상에 대한 다양한 저항 방식의 하나였다. 유인석은 조선 정부가 단발령을 강행하자 사우를 모아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의논했다. 그 세 가지는 거의소청(擧義掃淸), ‘거지수구(去之守舊)’, ‘자정수지(自靖遂志)’였다. 유인석의 의병이 ‘거의소청’에 해당하고 송병선의 자결이 ‘자정수지’에 해당한다면 전우의 선택은 ‘거지수구’의 실천이었다. 전우는 군산도로 떠나 ‘수구’의 기지를 세웠다. 곧 그곳에서 구학의 신학 비판이 전개되었다. 1909년 4월 전우는 양계초의 신학을 치열하게 비판했다. 동년 5월 ‘구학중인(舊學中人)’ 유영선도 신학 비판에 가세했다. 유영선은 1921년에는 ‘야소교’ 목사 홍우종(洪祐鍾)을 만나 기독교 교리를 비판했다. ‘수구’란 무엇인가? ‘여세추이’와 대립하는 개념으로서 ‘수구’란 무엇인가? 전우와 유영선은 유학 이념의 ‘수구’를 말했지만 민주주의 이념의 ‘수구’를 말할 수 있다. 헌정 질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끝내 민주주의를 붙들었던, 민주주의의 ‘수구’가 있었기에 4․19혁명이 가능했고 촛불혁명이 가능했다. ‘수구’란 세상에 대한 비타협이며 저항이었다. 1) 물 위의 조롱박 : 원문의 수상호로(水上葫蘆)는 불교 용어인데 大慧 宗杲 어록에 따르면 ‘자유자재로 다녀 구속이나 견제 받지 않고 깨끗한 곳 더러운 곳 드나들며 막히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는다.(自由自在, 不受拘牽, 入淨入穢, 不礙不沒)’고 하였다.
2) 시중(時中) : 『中庸』 제2장에 ‘군자가 중용의 도를 행하는 것은 군자의 덕으로 때에 맞게 하기[時中] 때문이다(君子之中庸也, 君子而時中)’라는 구절이 있다. 3) 변통을 하지 않는다면 : 원문은 교주고슬(膠柱鼓瑟)인데, 이 말뜻은 거문고의 기러기발을 아교로 붙여 고정시켜 놓아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으로 변통할 줄 모르는 고지식함을 가리킨다. 4) 공자는 ~ 칭찬했으니 : 『論語․太伯』에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 이를만하다(太伯其可謂至德也已矣)’는 공자의 칭찬하는 말이 있다. 5) 계력(季歷)의 마음을 ~ 지킬 수 있었으니 : 주나라 태왕이 막내아들 계력의 아들 창(昌 : 후일의 문왕)에게 성덕이 있음을 보고 계력에게 왕위를 전하고자 하니, 태왕의 맏아들 태백은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으로 떠났다. 6) 현재 이적의 ~ 행동하라고 했고 : 『中庸』 제14장에 ‘부귀의 위치에서는 부귀에 맞게 행동하고 빈천의 위치에서는 빈천에 맞게 행동하며, 이적의 위치에서는 이적에 맞게 행동하고 환난의 위치에서는 환난에 맞게 행동하니, 군자는 어디에 들어가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구절이 있다. 7) 지금의 세상을 ~ 미친다고 했으니 : 『中庸』 제28장에 ‘어리석은데 자기 생각을 쓰기를 좋아하고 비천한데 자기가 전횡하기를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태어나 옛 도에 돌아간다면 이와 같은 자는 재앙이 그 몸에 미친다’는 구절이 있다. 8) 주나라가 ~ 빛났다 : 『論語』 八佾에 ‘주나라는 앞의 두 시대의 제도를 본보기로 절충하여 문화가 찬란하게 빛났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는 구절이 있다. 9) 당하자연(當下自然) : 양명학의 본체관을 표현하는 어구이다. 王守仁의 문인 王畿에 따르면 양지는 “靈明함을 바탕으로 見在함을 자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곧바로 드러나며 이러한 드러남과 현재함은 양지의 고유한 자연적 능력이다.”(이상훈, 2012, 「왕용계 사상에 대한 주요 의난과 논변 고찰」『유학연구』27, 419면) 柳永善의 스승 田愚는 ‘당하자연’을 명말 양명학자 李贄의 종지라고 보았다. 곧 이지는 ‘당하자연’을 종지로 삼아 사람들마다 모두 見成의 聖人이라고 말해 천하에 함정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육구연의 ‘當下便是’와 이지의 ‘當下自然’이 모두 도에 해로운 발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항해 ‘當下當然’을 爲學의 요점으로 삼는다 하였다. 즉 앞뒤를 생각지 말고 利害를 헤아리지 말고 목전에서 이치에 합당함만을 보라는 것이다. (田愚, 『艮齋文集前編』 권4 「答朴應瑞-轍在」 ; 권15 「看李贄書識感」 ; 田愚, 『艮齋文集後編』 권6 「答崔炳翊」 ; 권8 「與高東是崔基俊」) [참고문헌] 柳永善, 『玄谷集』 권9 「新書論」 柳永善, 『玄谷集』 권10 「蘇學問答」 李珥, 『栗谷全書』 권15 「東湖問答」 兪棨, 『市南集』 권17 「江居問答」 洪大容, 『湛軒書』 권4 「醫山問答」 柳麟錫, 『毅菴集』 「宇宙問答」 柳麟錫, 『毅菴集』 권27 「雜錄」 田愚, 『艮齋文集後編』 권12 「示子孫門人」 田愚, 『艮齋文集別編』 권1 「答某」 李道復, 『厚山集』 권8 「西湖問答」 『大韓每日申報』 1906년 2월 7일, 「西湖問答」 『大韓每日申報』 1908년 3월 5일~18일 「西湖問答」 글쓴이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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