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저 머언 땅, 석교의 스님에게 게시기간 : 2019-07-29 07:00부터 2030-01-01 17:00까지 등록일 : 2019-07-26 17:0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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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낯선 지점이 있다. 내가 선 자리가 제자리인지 아닌지 잠시 망설여지는 곳이 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도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이 같은 ‘위치 찾기’를 한 개인의 사회화와 연결하여 말하기도 하고, 예의와 교양의 척도로 평가하기도 한다. 사회적 삶이란 무수한 관계에서 불편하지 않을 등거리(等距離), 곧 타협의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타협의 지점에서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행복감에 이르지는 못한다. 행복감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선인들의 시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이 작품은 중종 조에서 선조 연간에 걸쳐 활동한 최경창(崔慶昌, 1539∼1583)이 지었다.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다.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했으며, 이후백(李後白, 1520∼1578)에게 사사하고 양응정(梁應鼎, 1519∼1581)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31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서 북평사, 예조ㆍ병조의 원외랑을 거쳤지만, 당대의 동인을 이끌던 실력자 허봉(許篈)ㆍ이산해(李山海) 등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는 요직을 맡지 못하였다. 영광군수ㆍ대동 찰방(察訪)으로 폄직(貶職) 되었으며 비변사가 천거하여 종성부사(鍾城府使)에 특별 제수되었으나 이마저 품계를 뛰어넘었다는 중상을 받고 파직되었다. 조선중기에 유행한 당시풍(唐詩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외직으로 전전해야 하는 데에서 오는 비애(悲哀)를 절제감 있게 표현한 시를 창작했다. 그의 시에 대해 이이(李珥, 1536∼1584)는 청신준일(淸新俊逸)하다고 평했으며, 허균은 청경(淸勁)하다고 한 바 있다. 시의 이해를 위해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할 것 같다. 제목의 ‘쌍계’(雙溪)는 지리산 쌍계사가 아니라, 전남 장성의 백양사(白羊寺)에 있는 쌍계루(雙溪樓)를 말한다. 쌍계루와 주변 풍광은 우리나라 가을 비경을 대표하는 곳의 하나로 유명하다. 백제 시대에 창건되고 여러 차례 중창(重創)된 백양사의 부속 건물로, 지금도 쌍계루에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기제쌍계루(寄題雙溪樓)」(『圃隱集』 권2에는 「長城白嵒寺雙溪寄題」로 되어 있음)라는 시가 큰 글씨의 목판으로 걸려있다. 이 시는 후대의 김인후(金麟厚)ㆍ노수신(盧守愼)ㆍ박순(朴淳)ㆍ김윤식(金允植) 등 명가들이 모두 차운 작품을 남길 정도였다. 제목 중의 ‘차포은운(次圃隱韻)’도 정몽주가 지은 시의 운자(韻字)에 따라 지었다는 의미이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외직으로 떠돌며 비애감에 젖어 있던 차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온다. 스님은 둘둘 만 시축(詩軸)을 꺼내 펼치더니 시 한 수를 써달라는 부탁을 한다. 스님은 백양사로 갈 예정이었다. 시인은 붓을 들고는, 오래전 백양사의 석교 스님과 함께 지냈던 일을 떠올린다. 기억 속의 백양사는 그림과도 같은 모습이다. 불전(佛殿) 앞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는데, 저물녘에 그곳에 서 있노라면 종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떨어져 있는 쌍계루에 오르면, 서산(西山)을 향하던 햇살이 성근 주렴 사이로 맑게 부서지곤 했다. 그곳이 특별한 것은 이처럼 아름답고 고즈넉한 풍경을 품어서만은 아니다. 세상사의 어려움을 겪을 때면 떠올리며 위안을 얻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것은, 마지막 부분에 드러나는 시인의 향념(向念)이다. 시인은 백양사로 갈 스님 손에 쥐여줄 시에, 현재의 불편한 마음 대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 당장 갈 수 없음이 유감이지만, 언젠가는 돌아가 그 옛날처럼 석교 스님과 함께 쌍계루에 오르리라는 것이다. 희망이 마음에 샘솟는 순간, 시인은 돌연 행복감이 충만한 존재가 되었다. ‘행복감’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행복이라는 합의하기 힘든 개념에 주관적인 감수의 문제까지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마다 생각하는 실체도 다르며, 원천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행복감이란 만족(滿足)과 관련된다는 점, 타인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개인 내면의 상대적 감정의 하나라는 점,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인생관에 수반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라는 점이다. 어느 누구의 삶이든 전적으로 행복하거나 전적으로 불행하지는 않다. 어느 면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인가에 따라 삶은 행복하게 느껴질 수도 불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삶을 전진적이고 희망적으로 바라보는 한, 일상 속의 우리는 행복감을 느낄 기회가 더 많을 것이다. 시인이 미래의 한 장면을 디딤돌 삼아 행복감으로 전환하듯, 우리를 행복감으로 이끌 어떤 장면을 떠올려보자. 가끔은 발을 딛고 있는 지점에서 시선을 떼는 연습도 필요하다. 글쓴이 김창호 원광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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