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빛과 길과 땅 ①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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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수 년 전 오월 하순, ‘검푸른 바닷물이 늦봄 햇살을 받으면 무슨 빛깔로 바뀔까?’ 나섰다가, ‘이렇게 바다가 메꿔지는구나!’ 아슬하였던 부안. 우리는 임진 병자 양난 이후 국가개조 변법개혁의 이상을 『반계수록』에 담았던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서실을 찾고, 교산(蛟山) 허균(許筠)이 한동안 머물며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깊은 암자 터를 오르고, 거대한 제국의 지배 간섭을 받던 고려의 체면을 문장으로나마 지켜냈던 지포(止浦) 김구(金坵)가 묻힌 내변산을 스쳐, 빼어난 시문으로 당대 문사의 심금을 울린 매창(梅窓)의 시비를 맴돌았다. “반계가 어디 사람이요?” “서울 외가에서 태어나서 조부 슬하에서 자랐고, 인목대비 폐모를 반대하다가 유배 갔던, 지조와 경륜이 빼어난 외숙에게 배웠습니다. 외숙이 제주 목사 때 하멜 일행을 거두었던 이원진(李元鎭, 1594∼1665)입니다. 그런데 2살 때 부친이 인조반정 뒤끝의 옥사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여 무슨 벼슬 생각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조부상을 마치고 부안으로 내려왔습니다.” “허허, 우리는 유배객인 줄 알았소.” “부안에 선조부터 내려온 별장이 있었습니다. 세종 때 우의정 지낸 유관(柳寬), 호를 하정(夏亭) 쓰신 분이 장만하였다고 합니다. 반계는 생활이 어려워 일부 땅을 우반동 사는 김씨한테 일부를 팔았다고 합니다. 매매문서가 전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하정 대감한테 아들 셋이 있었는데, 반계 댁은 셋째 후손이고, 첫째 아들한테는 지금 영암 신북면 모산리 영팔정 땅을 물려주었답니다.” 유형원(1622∼1673)은 당파가 다르면 혼인도 하지 않고 서로 생각을 인정하지 않던 시절, 노론조차도 ‘반계선생’으로 높였던 ‘동국 제일의 경륜’이었다. 그런데 요즈음 ‘직분에 따라 농토를 나누어주자는 균전제’ 사상이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 못하는 복고가 아닌가? 하는데, 개혁이라는 이름의 칼자루가 아무리 무뎌서 쓰일 데 없었다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의 불쏘시개, 숯덩이마저 쪼개지 못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강릉 경포대 가는 길,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과 멀지 않는 곳에 허균과 난설헌의 생가가 있더이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로 동서분당 당시 동인을 이끌었던 허엽(許曄)이란 분이 있었는데, 1남 2녀를 둔 부인과 사별하고 강릉 김씨를 재취하여 2남 1녀를 보았습니다. 허균은 재취 부인 소생으로 난설헌은 누나가 됩니다. 외가가 강릉이었습니다. 세 형제가 모두 문과 했습니다.” 허균(1569∼1618)은 서얼, 천민과 어울리고 불상에 절하고 참선한다는 등의 불온한 풍문을 몰고 다녔다. 실제 「호민론」이란 논문은 세상과의 불화를 부추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인목대비 유폐, 폐모사건에 가담하며 실권자 이이첨과 밀착하였지만, 기실 사이가 좋지 않아 결국 역모에 걸려 죽임을 당하였다. “허균은 부안에 어떻게 왔소?” “1601년 장마철 세금 실어내는 조운을 감독하러 왔다가 변산에 푹 빠졌는데, 1608년 공주목사에서 파직당하고 다시 왔습니다. 부안 사람 김청(金淸)이 지었던 정사암(靜思庵)을 수리해서 살았습니다. 「정사암 중수기(重修記)」에 나옵니다,” “정사암 터와 반계서실이 같은 우반동으로 그리 멀지 않는데, 정사암 주인도 반계 땅을 샀던 우반동 김씨와 같소?” “정사암 주인은 본관이 경주로 여러 고을 수령을 거쳐 은퇴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까지 달려가 선조를 호위하였답니다. 반계의 땅 샀던 김씨는 부안 김씨로 원간섭기 사대외교에 큰 자취를 남겼던 지포 김구가 중시조가 됩니다.” 허균은 1601년 매창을 만났다. 계유년에 태어났대서 기적에 계생(癸生)ㆍ계년(桂年)으로 이름을 올린 관기였다. 계랑(桂娘)ㆍ계랑(癸娘)은 애칭, 거문고를 잘 켜고 노래를 잘 불렀으며, 시문도 좋았다. 그런데 잠자리에는 조카딸을 들여보냈다. ‘혐의를 피하고자 함’이었는데, 허균은 그때까지 이귀(李貴)의 정인으로 알았다. 훗날 인조반정을 주도하였는데 왜란 때 장성 현감을 지내며 비운의 의병장 김덕령을 발탁 후원하였다. 그런데 매창이 연모한 당사자는 유희경(劉希慶)이었다. 『가곡원류』에 전하는 유명한 시조는 유희경을 향한 애틋함이었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는구나. 절창이다. 1591년 처음 만났을 때, 유희경은 진솔하였다. ‘계랑에게[贈癸娘]’다.
매창은 시원하였다. ‘용안대에 올라서[登龍安臺]’이다.
그러나 너무 짧았다. 매창의 ‘벗님네[故友]’는 사무치는 그리움이다.
유희경(1545∼1636)은 신분은 낮았으나 문장 좋고 예학에 밝은 거리의 문사였다. 임진의병에도 가담하였다. 북촌 너머 궁벽한 골짜기 침류대(枕流臺)에 살면서 신흠(申欽)ㆍ이수광(李睟光)ㆍ차천로(車天輅)ㆍ임숙영(任叔英) 등 당대 문사가 참여하는 시회를 주선하였다. 허균도 출입하였는데, 굳이 말하면 침류대시단의 간사였다. 16년 후, 1607년 두 사람은 다시 만났다. 유희경이 전라도를 돌다가 전주에서 기별을 넣던 것이다. 매창 34살, 유희경은 62살이었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이듬해 정사암에 내려와서 매창을 만난 허균은 그녀를 참선의 세계로 인도하고 싶었다. 그것은 우정이었다. 슬픔은 깊고 아픔은 가없었다. 다음은 ‘병중의 서글픈 그리움[病中愁思]’이다.
매창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1610년, 향년 38살이었다. 허균이 조시 앞에 적었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인데 시에 능하고 글도 이해하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그러나 천성이 고고하고 깔끔해서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재주를 아껴서 교분이 막역하고 비록 담소하고 어여뻐하였지만 어지러운 지경에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변치 않았다.”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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