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 길을 열다] 사람의 길 그리고 하늘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선비, 길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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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운 작가의 역사명랑만화 『맹꽁이서당』은 30년 넘은 요즘도 인기가 상당하다. 여기 말썽꾸러기 학동들은 공자와 맹자를 ‘맹공’으로 거꾸로 읽고 ‘맹꽁이’로 바꿔치기하지만 불경함은 없었다. 여러 인물 군상을 맹꽁이로 풍자한 경기도 잡가 「맹꽁이타령」 또한 공자와 맹자는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낮에는 밭둑 논두렁 흙더미에 지내다가 밤 되면 슬금슬금 나와 먹이 찾고 물 많은 웅덩이에 들어가 새끼를 치는 맹꽁이 모습이 답답하고 게으르고 엉큼한 듯 여겨지니 개운치는 않다. 지금은 멸종위기종이란다. 그런데 서양식 개혁, 일본처럼 근대 하기의 흐름이 기세를 타던 시절, 수백 년 이상 국가의 체제 교학, 국시였던 유교와 공맹을 맹꽁이로 내리친 일이 벌어졌다. 1888년 부산항에 첫발을 내디뎠던 캐나다 출신 제임스 S. 게일(1863∼1937)이 선교 10년의 견문과 소감을 담았던 『Korean Sketches』에 있다.1) 해외를 많이 다녀보고 외국어도 많이 배운 조선의 전통인식보다 생각이 많이 앞선 양반이 있었다. 그는 특히 유교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을 상대로 서울에서 열린 공개강좌에서 맹꽁이라는 단어를 들고 나왔다. “대체 유교가 우리 조선에 무슨 이익을 가져다주었소이까? 유교 경전에 통달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쓸모없고 무력한 존재들이요. 그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 모든 일에 맹꽁, 맹꽁 하고 울어댈 따름이외다.” 게일은 우리말과 한문에도 능통하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알았다는 그 사람, 『한영사전』을 최초로 편찬하고, 존 버니언의 『The Pilgrim's Progress 천로역정』을 우리말로 옮겼으며 『춘향전』 『심청전』 『구운몽』 등을 서양에 소개하였다. 한국의 역사와 민속에 관한 저술도 적지 않았는데, 유생들과 『논어』 등을 즐겨 강독하였다. 예전 같으면 ‘사문난적’ ‘혹세무민’으로 규탄, 처벌받았을 발언이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것, 그만큼 세상이 변한 것이다. 오늘날 겨레 전통 학문과 사상, 생활과 의식을 구학(舊學) 구습(舊習)으로 낮춰보는 선두에 ‘해외 유학파 개명 신사’가 있다. 아마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고 독립협회가 결성된 시기였던 듯싶은데, 이날 강연회에 참석한 게일과도 잘 알고 지내던 한 유학자는 분기탱천하였다. “그래, 유교가 아무 이익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너 같은 자를 찔러 죽일 칼은 주셨다.” 그러나 강연장을 박차고 뛰쳐나오는 수밖에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편 국권 상실 망국 전야, 겨레의 전통 학술을 폐기할 수만은 없다는 유교혁신의 외침이 없을 수 없었다. 즉 ‘인민의 지식과 권리를 계발하고 세상을 구제할 수 있는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유교 정신의 회복’을 제창하고,2) “한국의 쇠약은 오직 유교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교 신앙이 도(道)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갈파한 우국지사가 있었다.3)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과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였다. 백암은 머잖아 『한국통사(韓國痛史)』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같은 걸작을 남겼으며, 단재는 의열단의 좌표를 제시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등 우리 역사 찾기에 골몰하였다. 이러한 애국, 나라사랑의 버팀목을 세운 두 분이 천하를 바꾸려는 사역천하(思易天下)의 꿈을 안고 천하를 주유하였던 공자를 호출하며 참 선비를 소망하고 유교의 도를 되새김한 것이다. 그러나 유교, 유학은 시대의 변화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더욱이 일본 식민주의자와 친일 어용학자의 황도유학(皇道儒學)은 우리를 진저리나고 손사래 치도록 만들었다. 그랬음일까? 한문 교과에서 ‘順天者는 興하고 逆天者는 亡이라’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吾난 十有五而志于學하고…’를 귀따갑도록 듣고, 국민윤리 시간에 유학을 배웠어도 흥미가 없었다. 대학에서 살핀 『논어』도 건성이었다. 낙후, 수구의 굴레 이미지에 짓눌렸음이다. 공자의 평생은 『논어』 첫 구절대로 배움[學]과 익힘[習], ‘벗’과의 교유 소통, 그리고 세속과의 긴장 즉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고,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는 자기 길들이기 수양의 연속이었다.4) 무엇을 배우고 익혔으며 어떤 벗이 반가웠고 왜 세속에 휩쓸리지 않았을까? 그것은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 ‘근본에 힘쓰면 생기는’ ‘요순과 같은 성인 임금이 펼쳤던’ 도(道)였다. 즉 사람이 마땅히 가야 할 길, 인도(人道)였다. 그러한 인도는 인(仁), 의(義), 예(禮) 그리고 진심과 관용의 충서(忠恕)였다. 일흔셋을 살았던 공자는 인도 위에 하늘의 명령, 천명(天命)이 있음을 쉰에 알았고, 예순에야 하늘을 순순히 따를 수 있었고, 일흔이 되니 마음 가는 대로 하였어도 어긋남이 없다고 술회하였다.5) 공자는 군자가 도를 배우고 알고 실천하는 목표를 사람 사랑 애인(愛人)에 두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백성에게 널리 혜택을 베풀어 뭇사람을 구제하는 박시제중(博施濟衆) 즉 인을 넘어선 요순도 어렵게 여긴 성(聖)을 지향하였다.6) 그러자면 천하를 바라보는 자세, 세상과 함께 하는 생각이 올곧아야 하였다.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하여 전적으로 고집함도 없고 끝까지 거부함도 없이 오로지 의로움을 따라야 한다.7) 공자에게 벼슬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올바로 다스리기 위한 도구이며 과정이었다.8) 그래서 문도들에게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솔선수범할 것을 교시하였다. 즉 다스림이란 바르게 함이니, 명분을 바로 잡고 자신을 바로 세워야 남을 다스릴 수 있다고 한 것이다.9) 또한, 벼슬을 받으면 싫증 내지 말고 부지런히 역할을 다하고, 임금에게 예를 다함은 결코 아첨이 아니니 진심으로 섬겨야 함을 거듭 역설하였다.10)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따르라고 하진 않았다. 자로(子路)가 임금 섬김 사군(事君)을 물었을 때 각별하게 일렀다. “임금이 잘못하면 속이지 말고 임금이 싫은 기색을 보여도 바른말로 그 뜻을 거스를 수 있어야 한다.”11) 특히 대신에게는 ‘임금을 도(道)로써 섬기다가 옳지 않으면 그만둘 것’을 요구하였다.12) 세상에 나서고 물러남, 벼슬을 하고 하지 않음의 기준 또한 도였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지만 나라에 도가 없으면 뜻을 거두고 감춰야 한다.”13) “천하에 도가 있으면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어야 한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 가난하고 천하면 부끄러운 일이고,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귀하면 부끄러운 일이다.”14) 한편 가족과 향당(鄕黨) 즉 고을에서의 의무, 생활윤리에도 각별하였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함도 정치를 하는 것이니, 굳이 벼슬을 해야 정치를 한다고 하겠는가?”15)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뵌 듯,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 듯, 자신이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아야, 나라에 원망이 없고 집안에 원망이 없을 것이다.16) 1) 최재형 옮김,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1888∼1897)』 책비, 2018.
2) 朴殷植, 「儒敎求新論」 『서북학회월보』 10호, 1909년 2월 9일 3) 申采浩, 「儒敎界에 대한 一論」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28일 4) 『論語』學而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子路 “子曰 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 5) 『論語』爲政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6) 『論語』陽貨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雍也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7) 『論語』里仁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8) 『論語』公冶長 “子謂子産 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己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9) 『論語』顏淵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 正也”; 子路 “子曰 必也正名乎!” 및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10) 『論語』顔淵 “子張問政 子曰居之無倦 行之以忠”; 八佾 “子曰事君盡禮 人以爲諂也” 및 “定公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 11) 『論語』 憲問 “子路問事君 子曰 勿欺也而犯之” 12) 『論語』 先進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13) 『論語』 衛靈公 “君子哉! 蘧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14) 『論語』 泰伯 “子曰…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 邦有道, 貧且賤焉, 恥也, 邦無道, 富且貴焉, 恥也” 15) 『論語』 爲政, “或謂孔子曰 子奚不爲政? 子曰 書云 孝乎 惟孝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16) 『論語』 顔淵 “仲弓問仁 子曰 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글쓴이 이종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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