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광주의 기억공간과 문화 게시기간 : 2024-10-02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9-30 15: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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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온통 역사적 상징으로 가득하다. 특히 광주 지역민의 정체성과 문화적 배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념비와 조형물들을 광주의 ‘기억공간’으로 묶어 살피다 보면 흥미 있는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대체로 억압에 저항하는 올곧은 정신을 표상하는 인물을 기억하고 기념하여 후세에 교훈으로 삼자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광주시 북구 중외 공원에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하서 김인후 선생의 동상이 마련되어 있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주자학 연구에 전념했으며 이후에는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하서는 중종에게 “자고로 정치를 잘한 임금은 모두 어진 인재를 가까이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습니다”라고 직언할 만큼 강직한 성품의 선비였다. 선생의 고향은 장성이지만 광주에 그의 동상을 세운 것은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賢) 중 호남 출신으로는 선생이 유일한 까닭이다. 같은 공간(중외 공원)에 ‘안중근 의사 기념비’가 있다. 광복 50주년이던 1995년 안중근 의사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해 광주시 북구 중외 공원에 권총을 든 안중근 동상을 건립하였다.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1879년 9월 2일 태어나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직후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독립지사 안중근 의사의 민족적 헌신과 결단은 역사의 본보기라 하겠으나 그와 직접적 관련은 없는 광주지역에 그를 기리는 동상을 건립한 것은 광주 지역민에게 특별한 의의가 있다. 북구 중외 공원에는 또 다른 기념비가 있다. ‘3·1 독립 만세운동기념비’가 그것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한 독립 만세 운동은 동년 3월 10일 광주시 동구 불로동 냇가 모래밭 장터에서도 그 함성이 울린다. 시민과 학생 수천 명이 모여 독립운동가를 부르며 독립 만세를 외치자 기마 헌병들이 칼을 휘둘렀다. 일본 경찰에 끌려간 이가 수백 명이었고 그중 35명은 여섯 달부터 세 해 동안 징역을 살아야 했다. 그 뜻을 영원히 기리고자 1986년 11월 28일 북구 중외 공원 안에 기념비를 세웠다. 남구 수피아여고 교정에도 같은 기념비가 있다. 1919년 3·1 독립운동과 조선의 마지막 국왕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을 기하여 일어난 1926년의 6·10 만세 운동을 폭력적으로 진압한 일제는 반일적 사상운동과 사회운동, 그리고 학생운동 등 한국민족의 대대적인 반격과 도전에 직면했다. 특히 젊은 지식인들-학생들을 중심으로 차별적이고 제한적인 식민지 교육 상황에서 한국인 학생들은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83건의 항일 학생운동이 전개된 사실은 한국 학생들이 식민지 교육 체제 및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내연하고 있던 학생들의 반일 저항의 불길에 화약고가 터지듯 집단적인 저항운동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이다.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고 그리고 광주고등학교 교정에는 학생운동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그날의 기억과 이후 기념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광주시 동구 학동 1013번지에 있는 전국에서 유일한, 백범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마을(백화마을) 옛터에는 김구 선생 기념관이 있다.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분이나 황해도 해주가 고향이어서 안중근 의사가 그렇듯이 광주와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데도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는 점은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동구 학동 1013번지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고국을 떠나 살다가 해방이 되자 귀국한 동포들이 어렵게 삶을 꾸려가던 곳이었다. 1946년 9월 광주를 방문했던 김구 선생은 해방 이후 귀국한 동포들의 어려운 삶에 대해 듣고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금으로 받은 선물과 해산물과 금품 등을 어려운 귀국 동포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모두 내주었다. 서민호 광주시장은 김구 선생이 쾌척한 금품을 종잣돈으로 860여 평의 대지에 4~4.5평 규모의 작은 건물 백여 가구를 세워 귀국 후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마을 이름을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의미로 ‘백화마을’이라 하였다. 지금은 백화마을의 예전 삶의 흔적을 찾을 길 없으나 그 뜻을 기리기 위해 김구 선생 기념관을 지은 것이다.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 민주혁명은 광주지역에서는 광주고등학교를 중심으로 시내 10개 학교에서 이루어졌다. 당일 오전 10시 30분경 교문을 박차고 나간 학생들은 광주 시내 10여 개 고등학교로 달려가 봉기 사실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한다. 오후 2시경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 등 시내 곳곳에서 수천 명의 학생이 운집한 시위대를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 곤봉과 최루탄, 물대포에 대항하여 일진일퇴를 반복하다 결국 일곱 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다. 2022년 10월 19일 숭고한 학생들의 혁명정신을 기념하고 후세에 영구히 그 뜻을 계승하도록 4·19혁명 발상지인 광주고등학교 교정 내에 기념관과 기념비를 세웠다. 광주공원에도 1962년 4월 그날에 희생된 일곱 명의 영령들을 추모하는 동판과 추모비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전남대학교 인문대 앞, 중앙도서관 입구에는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 등 전남대 교수 11인이 박정희 정권의 비민주적·비인간적 교육정책을 비판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교육의 민주화를 선언했던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선언문에 서명한 교수 전원이 체포 해직되었고, 송기숙 교수는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들은 민주교육과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여러 사회단체와 지식인들의 지지성명이 잇따랐다. 전남대는 유신체제의 반민주적 교육 실상을 폭로했던 교수들의 소신 있는 행동을 기리고자 2007년 기념조형물을 세우고, 성명서 전문을 새겨넣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남대학교 인문대 1호관 내부에는 ‘김남주 기념강의실’이 있다. 시인 김남주는 1946년 10월 16일 전라남도 해남군에서 태어나 전남대 인문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1973년 유신헌법 반대 운동 등으로 제적당하고 이후 남민전 사건 등으로 구속·수감 되는 등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다.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나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유해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전남대학교에서는 2019년 5월 3일 시인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뜻을 모아 인문대 1호관 내에 ‘김남주 기념홀’을 개관하였고 강의동 앞마당에는 기념조형물을 조성하였다. 1982년 7월부터 5·18 진상규명과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50일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을 이어갔고, 끝내 그는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 12일에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를 기리는 조형물이 2020년 12월 12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사회대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조성되었다. 동구 필문대로에 있는 조선대학교는 1946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시작하여 1948년 재단법인 조선대학 설립허가를 받은 광주지역 최대 사립종합대학이다. 조선대학교는 개교 이래 설립동지회 회장이었던 박철웅 총장의 사유화로 인한 학내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987년 9월 17일부터 1988년 1월 8일까지 일어난 1·8 항쟁(一·八抗爭)은 대학 개혁 운동이자 학원민주화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황남정보통신박물관과 미술대학 입구 민주공원 안에는 학원민주화운동(류재열) 및 1980년 5·18항쟁 관련으로 목숨을 잃은(김학수, 김동수) 세 사람을 기리는 추모비가 조성되어 있다. 1998년 1월 8일 1·8항쟁 10주년 기념사업 행사위원회 주관으로 기념비를 건립하여 민족자주교육과 인간중심의 교육사상을 내걸고 싸웠던 그 뜻을 기리고 있다. 광주지역 곳곳에는 1980년 5·18항쟁을 기념하고 추모하는 다양한 기념비와 추모공간들이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동구 문화전당로 38에 있는 구 전라남도청 본관(사적 5-1)으로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 16)으로 지정된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1980년 5·18항쟁 당시 시민들의 최후의 거점이었으며, 철거와 보존을 놓고 오랫동안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은 알고 있는 어떤 지역(혹은 공간이나 장소)을 도식화한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를 ‘장소의 감각’(sense of place)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과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어떤 성질을 그리 말할 수 있는데, 신체가 머무는 장소에 장소의 감각이 곁들어지면 그 장소는 ‘마음이 머무는 장소’로 바뀐다. 김광현은 “마음의 장소는 마음이 머물지 않으면 장소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1) 그렇게 볼 때 80년 5·18 사적지로서 매우 중요한 구 도청 건물의 복원과 보존은 그 건물을 통하여 어떤 마음들이 모이고 머무는 장소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남구 중앙로에 있는 광주공원을 오르는 계단 입구에는 ‘김군’동상이 세워져 있다. ‘김군’은 누구인가. 강렬한 눈매의 사진 속 한 남자를 기억하는 광주 사람들에게 그는 넝마주이 청년 ‘김군’이라 불린다. ‘김군’은 그날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수많은 평범한 이들, 그리고 우리가 망각한 부재의 기억을 되살리는 한 상징적 기호다. ‘김군’은 80년 당시 25세 정도의 넝마주이 청년이었다는 것,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도 이름을 묻지 않은 탓에 다만 ‘김군’으로만 불렸다. 1980년 당시 그와 함께 총을 들고 저항했다가 살아남은 이들이 뒤늦게 그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광산구 천동길 46(신룡동) 천동마을에는 5·18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하다가 항쟁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산화한 윤상원의 생가가 있다. 생가 내부 작은 뜰에는 ‘들블야학’의 교사로 그와 함께 활동하다가 운명한 박기순의 작은 묘가 조성되어 있다. 두 사람은 사후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졌다. 이때 5월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이 두 사람에게 헌정되었다.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는 내용의 노래는 백기완이 가사를 쓰고 김종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상원은 항쟁 마지막 날 새벽 2시경, 계엄군이 진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역사의 증언자가 되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가 운명하였다. 2024년 4월 마을주민들의 정성을 모아 마을 입구에 ‘윤상원 기념관’(천동마을 민주 커뮤니티센터)을 건립하고 윤상원의 일대기를 하성흡 화가의 수묵으로 그려 전시회를 열고 있다.(2024.4.17.-7.31) 기념관에 들어서면 총을 든 윤상원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2023년 현재 약 7천여 명이 머무르고 있는 전국 최대의 고려인 마을인 광산구 월곡동에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며 독립군에게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안겨준 홍범도 장군(1868∼1943)의 흉상이 있다.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을 이끌며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한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2021년 광복절인 8월 15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를 출발한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서거한 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홍범도 장군은 북방지역의 한국인들에게 영웅이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조선인들의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옮겨갔고, 카자흐스탄의 한 극장과 정미소 등에서 잡역부 일을 하다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었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는 장군의 유해 봉환 1주년을 맞은 2022년 8월 15일, 마을 중앙에 장군의 흉상을 세우고 제막식과 함께 헌정 연극을 공연하는 등 자신들의 긍정적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데 노력하고 있다. 그들에게 홍범도 장군은 여전히 정신적 지주로서의 의미가 각별하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김인후로부터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영웅적인 거사와 홍범도 장군, 1919년 3·1운동에서부터 1980년 5·18항쟁까지를 특징 짓는 기념공간(기념비) 일부를 살펴보았다. 전은희는, “도시의 인상은 흔적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표현하며, 도시가 남긴 흔적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간의 궤적, 흔적들이 드러내는 모습은 미래의 삶을 예견할 수도 있게 한다.”2)고 말한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 글에서 살펴본 기념비들은 광주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매우 좋은 매개이다. 과거의 사건이나 인물을 사회적으로 기념하는 행위는 집합적으로 과거의 경험을 현재 속에서 적극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기념공간을 조성하고 기념물을 건립하는 것은 기념의 중요한 방식 중 하나다. 박명규는, “기념물은 과거의 사건이나 그에 부수되는 의미 체계가 가시적인 물체로 형상화된 것으로 그 속에는 역사적 경험에 대한 집합적 해석이 형상화된 문화적인 상징물로서 특수한 시공간 내에서의 역사 인식을 반영한다”고 말한다.3) 이 글에서 함께 살펴본 기념비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광주라는 기억공간에서 살아온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과 집합적 해석의 산물이면서 지역의 발전과 사회적 통합의 지속가능성을 매개하는 주요한 문화유산이다. 1) 김광현,『거주하는 장소』, 안그라픽스, 2018, 82-83쪽.
2) 전은희,「장소로서의 도시와 공간의 장소감 표현 연구」,『미술문화연구』제12집, 동서미술문화학회, 2018, 34쪽. 3) 박명규,「역사적 경험의 재해석 상징화」,『사회와 역사』제51권, 한국사회사학회, 1997, 41-42쪽. 집필자 심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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