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소천재(紹泉齋), 그 빛과 그림자 게시기간 : 2024-10-0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09-30 15:5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
||||||||
순천시 가곡동 원가곡마을 숲속에 ‘소천재’라는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세계적인 권투 선수 서정권이 우승 상금을 들여 집안의 제각이자 별채로 지었던 건물이다. 그러나 당대에 비해 그 명성이 잊힌 서정권처럼, 소천재 건물은 허물어진 흉물로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처마 한쪽은 내려앉았고 솟을 대문은 옆 벽이 허물어졌으며 방마다 습기가 차 벽지가 썩은 상태이다. 사연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겐 그저 흉측하고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망가진 모습에 경악을 할 지경이 되어 있다. 본고는 당시 세계 챔피언이었던 서정권과, 그 우승 상금으로 지어진 소천재(紹泉齋)의 온당한 복원을 꿈꾸며, 소천재의 건축적 가치 및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울러 소천재의 복원과 재정립이 왜 필요한지, 어떤 방향으로 되어야 할지 역설하도록 하겠다. 1. 순천 도심에 남은 몇 안 되는 전통 가옥 역사 도시 순천이라 하지만, 막상 순천 원도심에는 전통 가옥으로 내세울 만한 곳이 별로 없다. 순천부읍성 안에 있던 수많은 관아 건축물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버렸고, 금곡동, 옥천동, 매곡동 등에 남은 기와집 몇 채 또한 전혀 관심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순천의 대지주 집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던 형제 우부자집 중 하나는 사라졌고, 김부자집(김선우 집)은 그나마 아드님이 근래까지 관리해오며 훼손의 정도가 크지 않다. 그러나 소천재(서원석 가옥)는 서두르지 않으면 망가질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은 흉물이 된 모습일 뿐이지만, 소천재는 당시에 굉장히 멋스럽고 고급진 건물이었다. 『순천시사 문화예술편』(1997)과 『순천시의 문화유적』(1992) 등에는 건축학적 측면에서 소천재가 얼마나 대단했던 건물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넓은 대지에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기단과 초석, 섬돌을 모두 숙석(熟石: 인공으로 다듬음)하여 사용하였고 잘 치목(治木: 나무를 다듬고 손질함)한 각형 부연, 원형 서까래 등 정성스런 손길이 많이 들어간 건물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소천재가 그 시대 기법을 따라 잘 복원만 된다면, 당시 얼마나 소천재가 정성껏 지어진 귀중한 건물이었는지 대번에 알릴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소천재 지붕의 양 끝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돌기둥은 순천 읍성 연자루를 해체할 때 나온 부재라고 한다. 소천재, 서원석의 집을 소개한 역사연구 서술을 아래에 옮겨본다. 80여 년 전에 지어진 제각 건물을 주거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솟을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넓은 대지에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좌우 1칸씩을 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퇴칸 기둥은 치목한 원주를, 나머지에는 방주를 세웠으며 처마 모서리에는 처짐을 막기 위해서 높은 8각 기단 위에 활주를 세웠다. 기단과 초석, 섬돌을 모두 숙석하여 사용했다. 창호는 중앙 3칸의 대청에 교살을 4분합으로, 양쪽 방 앞은 아자문을 안에, 교살문을 밖에 겹으로 달았다. 잘 치목한 각형 부연과 원형 서까래를 건 한식 기와의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앞퇴의 기둥에는 주련을 건 고급스런 건물이다. -『순천시사 문화예술편』(1997)
약 70년 전에 건립된 재각 건물이다. 솟을 대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넓은 대지에 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서 좌우 1칸씩을 방으로 만들고, 나머지 중앙칸은 대청으로 하였으며, 전후 퇴칸에도 마루를 깔아서 주거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퇴칸의 기둥은 잘 치목된 원형 기둥을 세우고, 나머지 부분에는 사각형 기둥을 세웠으며, 처마 네 모서리에는 처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높은 팔각 초석 위에 활주를 세웠다. 기단과 초석, 그리고 3단으로 오르는 높은 섬돌을 모두 숙석 가공하여 처마까지 높게 만들었다. 창호는 중앙 3칸의 대청 부분에는 교살문을 4분합으로, 그리고 양쪽의 방 앞에는 내부로 아자 창호와 외부로는 교살문을 겹으로 달았다. 지붕은 한식 기와를 올린 팔작지붕으로서 잘 치목된 사각형 부연과 원형 서까래로 하여금 받게 하였으며, 전면 퇴칸의 5개 기둥에는 주련을 걸고, 중앙 정면 벽면 위에는 ‘정신양기’라 현액하여 건물의 위엄을 한결 더하도록 하였다. -『순천시의 문화유적』(1992) 2. 서병규-서정권-서원석 계보도를 따라, 소천재는 한국 근현대사의 압축파일 이렇듯 고급스런 건축학적 기법을 활용한 멋진 곳이었던 소천재가 왜 지금은 흉물이 되었을까. 이를 추적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 집을 짓는 데 복싱 우승 상금을 댄 서정권부터 시작하여 서정권의 부친 서병규, 서정권의 아들 서원석의 계보도를 더듬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소천재는 개인의 사유재산을 넘어 한국 근현대사를 압축해놓은 훌륭한 압축파일이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일단 아버지인 서병규부터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서병규는 1930년대 순천의 세 번째 대지주였다. 장천동 글로벌 웹툰센터 자리에 90여 칸의 집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20-30년대 순천의 사회운동을 주도하고 후원했던 인사로 기억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순천의 청년운동을 주도함은 물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역에서 펼쳤다. 청년회관을 마련해 준다던지 지역사회의 큰 손이었던 서병규는, 6.25 전쟁 때 피난가지 않고 남아있던 대지주를 응징하려 할 때 많은 이들이 반대하여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 이례적인 스토리도 갖고 있다. 아울러 황전 학산사의 현판 학산강당을 힘 있는 필체로 쓴 서예가였으며 대표적인 기부가이기도 했다. 학업 포기 젊은이들에게, 수해로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그는 그 재산을 기꺼이 기부하였다. 1935년에는 연도관을 사재 1만원을 들여 지역 청소년의 심신 수련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이러한 서병규의 삶은 그자체로 지역 사회사의 축소판이었다. 서병규의 셋째 아들이었던 서정권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복싱의 창시자 와타나베에게 수련하였으며, 당시 한국에서 희귀했던 ‘프로 복싱선수’로 전향하여 ‘복싱의 신’으로 불렸고 미국원정경기 세계 6위에 오르는 등 기염을 토했던 걸출한 복서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 친구였으며 당대에 함께 유명하였던 남승룡 마라토너와 너무도 극명하게 차이가 나게 된 이 둘의 상반된 운명이다. 서정권의 회고 기사에 따르면 남승룡이 스파링 파트너이기도 했으며 마라톤 하지 말고 나와 같이 권투 하자며 꼬시기도 했다는 대목도 나오고, 순천에 왔을 때 전 순천시민이 환대해 준 운동선수에 같이 꼽히기도 했던 대목이 나오기도 하기에, 씁쓸함은 더하다. 남승룡은 지역을 대표하는 남승룡마라톤대회의 시행은 물론 지역에서 대대적으로 기억하는 인물이지만, 서정권은 그에 비해 철저히 잊힌 것이다. 이는 복싱이 인기를 잃은 데서 기인하기도 하지만,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진 시대상을 그대로 투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서정권 선수가 상금으로 받은 돈을 아버지 서병규에게 보내드려 소천재를 세웠던 사실이 기록된 신문 기사(1935. 8. 10 조선일보). 당시의 그 찬란한 영화는 그 신문기사에 여전히 박제되어 있는 듯하다. 소천재의 다른 이름, ‘서원석 가옥’의 주인공이기도 한 서원석은 영화로웠던 소천재를 잘 보전하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이웃집에 선의를 베풀었던 것이 이용당하고, 별다른 경제력을 갖지 못한 채 저당을 잡혀 소천재는 여러 사람 명의로 경매가 되어 소유권이 복잡해져 버렸다. 지금은 고인이 된 서원석은, 생전에 소천재에 종종 머물며 폐허가 된 소천재를 안타까이 지키는 지킴이로 사셨다. 어렵게 발걸음을 한 역사학자 등에게 서정권 스크랩 기사를 보여주거나, 두루마리로 보존하다가 방문객에 조심스레 교지(敎旨)를 꺼내며 자랑스러워 하시곤 했다고. 이러한 서원석 또한 지역에서 정당활동을 해왔으며 가곡동 새마을운동을 주도하는 등 지역사회와 접점 속에서 고군분투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서병규-서정권-서원석의 개인사는 순천의 지역사, 나아가 한국 근현대사와 직조하며 훌륭한 역사의 압축파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토록 건축사적으로도, 인물 스토리텔링으로도 훌륭한 자원을 가진 소천재가 여전히 흉물로 자리하며 수리의 손길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이기도 하다. 3. 소천재의 복원 방향에 대하여: 외려 흉물이 된 소천재 그대로의 알림도 필요하다 소천재의 흉물로 방치되어 있는 문제는 전통가옥의 보존과 활용의 측면에서 시사점이 크다. 사유재산인 경우가 많은 전통가옥은, 그 가옥을 잘 가꾸고 보존할 만한 여력이 없는 문중 및 개인이 어렵사리 겨우 ‘버텨오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다. 진작 신탁제도 등을 통해 지자체 및 국가의 관리감독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낙안읍성의 전통 가옥 보전에는 많은 돈을 들이면서도 정작 사각지대에 놓인 소천재의 보수에는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문제도 되짚어보아야 한다. 게다가 가곡지구 택지 개발이 2004년 무렵부터 진행되면서, 소천재는 더 엉망이 되어 버렸다. 발파의 충격으로 솟을대문은 흉물스레 허물어져 버렸고, 소천재 대문 앞에서 보였던 삼산은 아파트 단지로 시야가 가려져 조망을 잃어버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소천재의 복원은, 우리 역사의 복원이라는 방향성의 측면에서라도 굉장히 소중하다. 당장 제초와 숲 정비, 지붕의 가림막 설치 등의 보호 조치가 긴급히 필요하며, 단아한 필체의 소천재 현판, 활주의 유려함 등 겨우 남은 문화재 요소요소들도 귀히 보존함이 시급하다. 그러나, 소천재의 복원은 단순히 건물을 깔끔히 정비하고 복서 서정권의 화려한 전세계적 이력을 드러내는 게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부친 서병규의 역사부터, 후에 왜 소천재가 무너졌는지 누구의 소유관계로 복잡하게 흘러갔는지 면밀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의 아픈 역사들이 돌출될 수도 있고 가리고 싶던 창피한 과거사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까지 다 합하여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감히 주장한다. 고친 소천재 뿐 아니라 고치기 전 폐허인 소천재도 함께 알려져야 한다고. 그 폐허의 골이 깊은 만큼 그 자체로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을 그대로 안은 진정한 랜드마크가 될 수 있다고. 다만 가감없는 오픈은 유적의 유실을 마음아파하고 훼손하지 않을 이들로 제한함은 필요하겠다. 한때 전세계적 명성과 영화를 누렸으나, 지금은 폐허가 된 소천재와 함께 철저히 잊힌 채 소천재 뒤 무덤에 누워 계신 복서 서정권을 추모하며, 글을 마친다. 집필자 박희연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