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의 재발견] 남도 설화 다시 읽기1 게시기간 : 2024-10-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10-11 10:3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민속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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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도 설화 다시 읽기’를 시작하며 진도 상장례 읽기를 12회 진행하고 단행본으로 묶어 출판하게 되었다. 책으로 출판한다는 주최 측의 정책을 따르니 소주제 하나가 일단락되었다. 주목하고자 했던 소재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후일을 기약한다. 참고로 이후 진행할 진도 상장례 읽기는 분석적인 측면이 좀 더 강화되고 종교적 관념 혹은 철학적 추적을 보탠 형식이 될 것이다. 삶의 철학과 태도를 어떤 선지자나 위인들의 언술에 의존하거나 의탁하는 게 아니라,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나아가 지금, 여기, 나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이른바 민중들의 삶의 태도와 방식에서 읽어온 내 학문의 방식을 심화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선구자들이 쌓아둔 지식창고를 뒤지기도 하고 눈 밝고 귀 밝은 사람들의 언술을 인용하기도 하지만, 예컨대 내 어머니의 흥그레타령에서 삶의 온전한 의미와 철학을 끄집어내온 학문하기 방식은 흔들림 없이 추진해간다. 이번 호부터 ‘남도의 설화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설화를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역사’라는 뜻이다.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는 또 한편 역사로 편입되지 못한 망실의 역사를 뜻하기도 한다. 역사의 서술이라는 것이 이른바 가진 자들의 시선으로,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왔음을 늘 상고한다. 더불어 내 전공이기도 한, 가지지 못한 자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설화가 가진 맥락은 이들 양자를 모두 포괄하거나 적어도 어떤 의지에 의해 포섭하는 이야기이자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가진 자들의 역사도 때때로 어떤 의도에 의해 재구성되어 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의 남도 설화 다시 읽기는 이런 의지에 토대해 있다. 흔히 말하기를 팩트에 근거한 것을 역사라 하고 픽션에 근거한 것을 ‘이야기’라 한다. 하지만 고대 이래 역사서를 표방한 기록들이 신화를 머리말 삼아 쓰였다는 점을 상기해볼 일이다. 온전한 역사 서술의 방법이나 태도가 무엇인지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총체사라는 맥락에서 보면, 팩트를 중심에 두고 서술한다는 역사학이 픽션에 근거한다는 문학에 비해 과잉대표되어 있다. 쓸데없이 부풀려지거나 집중된 역사적 측면을 덜어내고 의외로 평가절하된 문학적 측면을 보태는 것이 내 글쓰기의 지표다. 차차 밝히겠지만 조동일의 문학론은 그런 점에서 내게 중요한 사숙(私淑)의 방편이 되었다. 『삼국유사』의 첫머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머리에 말한다. 대체로 옛날의 성인들이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로 가르침을 베풀려 하면 괴이, 완력, 패란(悖亂), 귀신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때는 부명(符命)1)을 받고 도록(圖籙)2)을 받음에 반드시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고 그런 연후에야 큰 사변을 이용하여 천자의 지위(大器)를 장악하고 (제왕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3)
그러면서 팔괘와 낙수, 복희와 기이(紀異)를 얘기하며 고조선(왕검 조선) 이야기를 시작한다. 기독교의 경전 『성경』도 마찬가지고 여타 나라들의 역사서도 마찬가지다. 왜 역사 서술을 설화로 시작하는가? 설화가 곧 쓰여지지 아니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나경수는 건국신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건국신화는 건국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믿어진 이야기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신화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모든 이야기가 다 신화는 아니지만, 모든 신화는 다 이야기다. 이야기이기 때문에 서사문학이다. 특히 건국신화는 구체적으로 특정 국가와 건국 사실, 그리고 건국조 등과 관련된 것이어서 매우 역사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서사문학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신화의 정의는 건국신화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 유익할 것이다. 신화는 기원을 설명하며 믿어지는 이야기다. 기원에 대한 설명이란 신화의 우리말인 본풀이에 해당한다. 기원은 본이요, 설명은 풀이이다. 이를 가리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화는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믿어진다. 믿음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신화는 신화일 수 없다. 또한 그것이 역사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어지는 역사라야 한다. 신화는 믿어지면 진실이요, 믿어지지 않으면 허위에 불과하다.4)
그중 대표적인 것이 우리 민족의 기원 이야기로 알려진 단군신화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설화는 신화, 전설, 민담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다. 조동일은 이를 아울러 ‘이야기’로 통칭하면서, 이야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야기가 이해되는가 하는 차이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신화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신성하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사로 하고 들을 이야기가 아니고, 경험적인 것과 초 경험적인 것을 한 데 아우르는 진실성을 지녔으므로 사고의 지침이 되고 행위의 규범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전설은 어떤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어서 경험적인 진실성을 지니고 있는 한편 이야기를 꾸민 내용에 있어서는 그 진실성이 줄곧 의심되기도 하는 이야기다. 어떤 사실이라고 한 것은 흔히 증거물이라고 부르는데, 증거물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인물도 등장할 수 있다. 민담은 흥미 본위의 지어낸 이야기이다. 사실에 근거를 둔 진실성은 인정되지 않지만, 이야기하는 내용이 거짓말이면서 거짓말이기 아니기도 하다.5)
이런 점들을 종합해볼 때, 이제부터 내가 다루고자 하는 마을굿 즉 당(堂)이나 당산(堂山)과 관련된 이야기는 전설이나 민담보다는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는 당신화를 이렇게 말한다. “당신화는 마을신이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좌정 유래담과 마을신으로서 보이는 능력을 설명하는 영험담으로 이루어진다. 좌정 유래담이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이야기라면 영험담은 현재에도 계속 만들어지고 전승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그동안 영험담을 신화의 범주에 넣지 않았으나 이것 역시 제당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언술이고 현존하는 신격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이야기이므로 신화로 보아야 한다.” 당신화가 단순한 전설이나 민담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정한 서사를 갖춘(대부분 서사를 망실하긴 했지만) 신화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해야 할 말이 많으므로 연재 과정에서 차차 보충해 나기로 하고 관련 사례를 통해 싸목싸목 풀어가기로 한다. 2. 여서도의 당제 1) 여서도 당신화
완도군 청산면에 속하는 여서도의 당제에 대해서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펴내는 작은섬 시리즈에 내 글이 나누어 수록되어 있다. 여서도(麗瑞島)라는 이름은 1945년 이후 붙여졌다고 하며 ‘천혜의 아름다운 섬’이란 뜻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1077년(목종 10)에 탐라(제주) 근해에 일주일간 대지진이 일어나더니 바닷속에서 큰 산이 솟아올랐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여서도라고 한다. 이를 2019년 2월 21일자 전남일보 이윤선의 남도인문학(133회분)에 일부 발췌하여 소개하였다. 여서도를 시작으로 그간 현지답사하고 정리해두었던 사례들을 차례차례 소개해나가며 그 의미들을 좇아보고자 한다. 윗당, 아랫당, 갯당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 끝 간 데 없는 하늘만 청청하다. 누가 밀어냈나. 먼바다 칼바람이 내안(內岸)의 풍경들을 자꾸 밀어 올린 탓이리라. 곧 영등 바람이 딸 혹은 며느리를 데리고 왕림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전해왔다. 약 7,000년 전 신석기 패총이 발견되었으니 사람이 이곳에서 거주한 것이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어느 시기인지 특정되지는 않았지만, 정씨 할머니가 밭을 매다 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풍경(風磬)을 줍게 되었다. 경이롭게 생각하고 그 종(鐘)을 고이 모시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내 이 풍경을 모실 당집을 짓고 마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정씨 할머니 사후에는 그이를 신격으로 추대하였다. 아랫당의 효시(嚆矢) 이야기다. 생각할 거리 하나, 풍경 곧 종(鐘)이 주는 함의가 깊고 많다. 종을 우리말로 ‘쇠북’이라고 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차차 연재해나가겠지만 가거도에서는 자물쇠 신을 당신격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다. 바닷가에 자물쇠가 밀려와 달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과 신격 좌정의 의미가 보태진 사례다. 종소리는 동서고금은 물론 종교의 같음과 다름을 막론하고 중요하게 다뤄졌다. 예컨대 성당이나 교회, 사찰의 종소리가 그러하다. 쉽게 말하자면 에밀레종 설화를 떠올릴 수 있다. 여서도의 경우는 사찰의 종소리와 친연성이 매우 높다. 마을 사람들의 제보 중 ‘아마도 절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언설이 늘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확대해서 말하면 마당밟이의 꽹과리와 징으로 확장 해석할 수 있다. 나중에 자세하게 다룬다. 실제로 불교 의식구 중에도 금속을 재료로 한 것들이 매우 많다. 영적인 것이 쇠소리에 반응한다고 관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교 의식구 중에는 금속을 재료로 한 것들이 꽤 있다. 대표적인 것이 종이다. 종은 법고, 운판, 목어와 함께 누각이나 종각에 위치하고, 이 넷을 통틀어 불전사물이라고 부른다. 사물은 법고-길짐승, 운판-날짐승, 목어-물고기라는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는데, 종은 지옥을 담당한다. 종을 울리는 이유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에게 평안을 주고 이들을 구제하겠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종을 치면서 하는 종송도 ‘이 종소리가 널리 퍼져서 철위산 사이 지옥의 어두움이 모두 맑아지고, 칼산으로 된 지옥이여 무너져라’로 시작된다. 이 밖에 손으로 잡고서 흔들어 치는 작은 종도 있다. 이를 흔히 요령이라고 한다.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이 역시 49재나 천도재 등을 지닐 때 돌아가신 영혼을 위무하기 위해 사용된다. 불교에서는 시다림(尸陀林)이라는 의식이 있다. 돌아가신 분의 3일장 전에 가서 염불을 해주고 영혼을 깨끗하게 씻겨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도록 하는 의식이다. 이때 하는 의식에는 대부분 요령이 사용된다.6)
민간에서 상여가 나갈 때 흔드는 종도 요령을 쓴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느 시기, 어장(漁場)이 잘 안 되는 때가 있었다. 밖에서 한 스님이 오셔서 말하기를 ‘당할머니가 배가 고파 당집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갯가로 나가 당할머니를 모셔오는 의례를 했다. 의례가 어떤 형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지금의 아랫당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 어느 게 먼저인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종과 정씨할머니가 당제의 효시라는 점이 초점일 뿐이다. 현재 그 종은 사라지고 없다.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을까? 사찰이 없던 마을, 혹은 어떤 시기 사찰이 있던 섬, 아랫당의 종교적 기능을 설명하는 방식일 수 있다. 흉어(凶漁)의 문제를 신격의 문제로 투사시키는 문화적 장치를 보면 그 행간이 보인다. 해마다 정초부터 대보름 어간에는 각 마을마다 마을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대개 내륙지역에서는 당산제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해안지역이나 섬 지역에서는 당제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지역마다 수십 가지의 다른 이름들이 있다. 먼바다의 섬, 가까운 바다의 섬, 해안을 접한 마을들의 의례가 작게는 다르고 크게는 같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시기나 특성을 들어 문화권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곳 여서도의 당제는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남해안 먼바다 섬의 대표적인 당제다. 규모나 시기는 변했지만 다른 지역의 당제들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감안한다면,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는 곳이다. 나는 2013년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 여서도 당제를 면밀히 관찰하고 기록하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보고했다. 지금 그 자료를 토대로 정월 대보름 이야기를 푸는 중이다. 여서도는 30여 년 전만 해도 400여 호 넘는 세대가 살았다. ‘헛가사리(작은방 살이라는 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만큼 인구가 많았다. 이때만 해도 당제를 지내는 것 자체가 마을의 큰 경사였다.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매굿(마당밟이)은 잡색들까지 포함한 구성진 굿판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의례가 행해졌다. 매년 당제를 지내는 날이면, 배를 소유하고 있는 선주들의 만선기 경주가 벌어진다. 당주(堂主)가 한지를 깃대에 묶어주면 뱃전까지 달리기 우열을 겨루는 경주다. 가장 먼저 자기 뱃전에 깃발을 꼽는 선주가 그해 풍어를 누린다는 속설이 있다. 당제나 풍어제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 경주 즉 달리기 시합의 형태도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가장 먼저 뱃전에 깃발을 꼽는 선주가 풍어를 누리는 것뿐이겠는가? 우리와 거리가 먼 외국의 사례에서도 왕녀와 혼인하여 왕위를 차지하는 권리를 경주로 결정하는 경우을 보면 달리기 시합이 가지는 인류 보편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 알리템니아의 리비아인은 가장 빨리 달리는 자에게 왕국을 넘겨주었다. 고대 프로이센에서는 귀족 후보자에게 말을 타고 왕에게 달려가게 해서 가장 먼저 도착하는 자에게 귀족 호칭을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올림피아에서 열린 최초의 경기는 엔디미온(Endymion)이 왕국을 놓고 자기 아들들에게 달리기 시합을 시킨 것이었다. 그의 무덤은 경주자들이 출발했던 경주로 한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펠롭스(Pelops)와 히포다메이아(Hippodameia)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는, 아마도 올림피아 최초의 경기가 왕국을 상으로 건 달리기 경주였다는 전설의 또 다른 판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7)
2) 윗당, 아랫당, 갯당은 하늘, 땅, 바다의 가이아(Gaea) 여서도의 당은 윗당, 아랫당, 갯당으로 나뉜다. 동, 서, 중앙에 있는 마을 샘도 의례 공간이다. 섬 지역 샘의 기능은 그 비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의례 공간의 신격들은 가족관계 혹은 서열 관계로 구성된다. 윗당산의 당할아버지, 아랫당의 당할머니, 갯당의 고석 바위가 그것이다. 공간을 가족관계로 등치하거나 서열 관계화하는 내력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기로 한다.
마을의 동, 서, 중앙에 있는 샘에는 반드시 고목이 우거져 있다. 숲의 기능이 지하수를 포함한 물의 보존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윗당과 아랫당에 당샘을 두어 제수준비와 목욕재계에 활용했다. 가장 아래쪽 바닷가에는 고석 바위라는 갯당이 있다. 당은 한 마을이 지닌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다. 일찍이 신안군을 대상으로 당제를 정리했던 최덕원은 당산나무와 당숲에 대해서 견해를 피력하며 흑산도 진리당의 당목으로 피리 부는 총각이 기어 올라가는 행위를 이렇게 해석하기도 했다. 물론 이 지점에 대해서도 흑산도 진리당에 대해 말할 때 더 자세하게 논하기로 한다. 이는 시베리아 알타이족의 샤아먼 입무 의례에서 볼 수 있었던 나무 기둥에 기어오르는 의례로 상고시대 성목을 통해 천계로 올라가는 신화적 원형의 변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부터 수목은 샤아먼의 신성한 제장에 위치하여 샤아먼들의 천계 상승과 타계 여행의 길목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샤아먼은 세 개의 우주권 즉 지하계, 지상계, 천상계를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샤아먼의 소명 또는 입무 의례는 직접으로 천계의 상승과 관련 되어지고 있다.8) 고대 시베리아의 미래의 무녀는 나무를 타고 천계에 올라가 직접 신을 만나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던 것이다. 또한 천공의 제신은 수목을 따라 제장에 하강하여 제의에 임하였다. 이와 같은 수목은 신수로 신체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9)
단군신화의 신단수 등을 포함하여 이를 우주목으로 통칭한다. 최덕원이 시도했던 시베리아 샤먼들의 공간 구성을 도입해 보면, 여서도의 윗당, 아랫당, 갯당을 천상계와 지상계, 해상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천상계는 윗당의 당나무와 당숲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지상계는 아랫당이라는 돌담 형식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지하계는 바다밑을 포괄하는 바다 전체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불당사물에 대입해도 이 구조는 변함이 없다. 법고는 길짐승으로 천상계를, 운판은 날짐승으로 지상계를, 목어는 물고기로 심해와 바다 전체를 각각 상징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스런 공간은 시대와 경우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예컨대 정확하진 않지만 4~50년 전까지만 해도 아랫당에 돌담이 없었다. 마을 모씨가 제사를 지내면서 당집과 당 숲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당산에 무엇인가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돌담을 쌓게 되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바람막이할 의지가 필요하다는 게 생각의 골자였다. 하지만 돌담을 쌓은 후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혹시 돌담을 쌓아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여 마을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게 되었다. 문제가 되자 돌담을 헐어냈다. 당제를 다시 지내거나 당산 경관을 바꾸는 일을 마을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사례다. 몸이 아프면 아픈 곳을 치료하고 추우면 갖가지 옷을 만들어 입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특히 물때와 바람과 파도에 생명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섬지역에서는 경관과의 일체감이 높다. 그런 측면에서 윗당과 아랫당, 그리고 갯당이 각각 천계, 지상계, 해상계로 나뉘기는 하지만, 사실은 나누어져 있지 않은 가이아(Gaea)의 세계에 가깝다.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하나의 커다란 유기체로 보는 가설이다. 지구를 단순히 기체에 둘러싸인 암석 덩이가 아니라 생물과 무생물이 상호 작용을 하면서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해나가는 하나의 생명체이자 유기체라고 본다는 이론이다. 영국의 과학자 러브록(Lovelock)이 주장한 이론인데 지금은 일반적인 용어로 정착한 듯하다. 우리는 전래적으로 몸을 소우주라고 해서 큰 우주 작은 우주 등으로 관념했다. 주택이나 마을 혹은 나라와 세계를 관념하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3) 당제를 지내는 시간에 대하여 여서도의 당제는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중심이 되는 당제는 정월 대보름 당제다. 음력 7월 1일도 당제 날이다. 여서도의 주업과 관련되어 있다. 멸치잡이, 갈치잡이 어장을 위한 의례다. 본당제는 본래 섣달 그믐날 했다. 약 20여 년 전 마을 회의를 거쳐 정월 대보름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당제들이 전반적으로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아봐야 할 듯싶다. 정월에 초상이 나거나 출산하는 집이 생기면 달을 넘겨 날짜를 따로 받는다. 이런 일들이 겹쳐 당제를 못 지내게 되는 해에는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 당제 날짜를 변경한 것은 고기잡이 생업과 관련되어 있다. 바다 온도의 변화나 어류의 이동 등이 이를 추동했을 것이다. 본래 섣달그믐에 당제를 지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 모든 의례에는 악한 것을 막아내는 벽사(辟邪)와 길한 것을 받아들이는 진경(進慶)의 의례가 포괄되어 있다. 여기서 벽사는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미로 관념했다고 볼 수 있으며 진경은 한 해 시작의 의미로 관념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농악에 해당되는 민간의 나례(儺禮)는 섣달 금날 즉 제야(除夜)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제야의 의례가 축소되거나 소멸되고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 등 삭망의 의미만 존속되어 있어 이 맥락이 크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여서도 당제는 바로 정월 대보름으로 날짜를 바꾸지만, 섣달 그믐에서 정월 초하루로, 다시 정월 대보름으로 날짜가 변화되는 맥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래의 시가 이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제야(除夜)>(1387)
해시(亥時)가 이미 끝나니 정묘년의 그믐이고 자시(子時) 처음 열리자마자 무진년 봄일세 북소리는 끊이지 않으며 향나(鄕儺)는 성대한데 사악한 정령 몰아 쫓고 복과 경사 오게 하네 <그믐날 새벽에 일어나다>(1390) 삼성은 비끼고 북두성은 굴러 밤은 새벽이 되니 귀신 쫓는 사람들 소리가 사방의 이웃들에서 요란하네.10) 2013년 정월 대보름의 경우에는 14일 오후 8시경 당산에 올라가 15일 새벽 1시가 되어 제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아랫당으로 내려와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동틀 무렵이면 ‘고석 바우’라 호명하는 갯당에서 당제를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바닷가에 나가 헌식(음식을 바다에 던지는 의례)을 하여 당제를 마친다.
해가 떠오르면 마을의 샘과 회관에서부터 시작하여 가가호호 마당밟이를 한다. 정월 초하룻날 시행하던 시절에는 대개 대보름까지 마당밟이 굿이 진행되었다. 의례를 자시(子時)에 시작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근자에 모 정치인들이 사찰에서 인시(寅時)에 매화나무를 심었다 하여 시끄러웠던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인시를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시(子時)나 인시(寅時)의 시작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겠다. 어쨌든 하루를 사람의 평생이라 생각하면, 자시는 마치 출생과도 같은 시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전통적인 관념이자 시간의 체계이기도 하다. 하늘의 수와 땅의 수는 시간의 수이기도 하고 공간의 수이기도 하다. 달이 이지러지고 만개하는 시간들, 아침에 닭이 울어 해가 뜨고 노을빛의 손짓에 해가 지는 묘사들, 하늘의 수와 땅의 수를 교직시켜 60갑자를 만들어 내는 일련의 체계들이 모두 이런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여서도의 당제를 자시에 지내는 까닭은 일 년 혹은 여름 당제까지의 반년이라는 시간 분할의 기점의 의미다. 기제사를 포함한 민속신앙의 대부분을 자시에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시작이 마치 한 사람의 출생과도 같으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었겠는가. 4) 당숲을 인격체로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당숲 안쪽으로 고인돌 크기의 넙지락(너럭)바위가 있다. 주위에 큰 자연석들이 늘어서 있다. 사방으로 팽나무와 보리똥나무(보리수나무), 비자나무, 동백나무 군락이다. 큰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당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 마을로 흘러 내려온다. 그 수맥에 샘들이 있다.
아랫당산은 돌담으로 쌓여 있다. 주변으로 팽나무, 비나자무, 동백나무 군락들이 늘어서 있다. 동쪽으로 난 솟을대문은 스레트 지붕이다. 당집은 기와 모양 전통한옥 스타일의 슬라브다. 사방 돌담 밖으로도 후박나무, 팽나무와 동백나무 등 사철나무 군락이 이어진다.
아랫당집 안에는 항아리가 두 개 있다. 해마다 벼와 보리를 갈아 넣는다. 정월 대보름 당제에서는 벼를, 7월 초하루 당제에서는 보리를 넣는다. 항아리를 두 개 존치하는 것도 당신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지만, 마을을 하나의 주택이라고 보면 성주신에 해당된다. 이를 나라의 의미로 확대한 것이 안동의 제비원과 성주 신격이다. 이 또한 따로 다루겠다.
당산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신체(神體)라 한다. 나무와 숲과 돌과 바위들이 모두 신의 몸이라는 뜻이다. 대개 이를 애니미즘(animism)이라 풀이한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적, 생명적인 것이 있다는 원시 신앙 관념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이 신체들을 보호한다. 단순한 보호를 넘어 보전(保全)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당숲과 당나무에 대해 차차 설명해나가겠지만 우선 최덕원이 정리해둔 바를 인용해둔다. 수목은 신이 깃든 신성한 신체로 수목숭배의 신앙은 어느 민족에게서나 볼 수 있으니, 중부 오스트레일리아의 Bleri족은 그들의 조상이 나무에서 탄생하였다고 믿어 나무를 신성시하고 존경하며, 벌목을 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나무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고 믿고 있는 부족이 많다. 아프리카의 므벵가족은 아이를 낳자마자 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아이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그 나무가 죽으면 아이도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카메룬이나 파푸아의 부족과 보루네오의 다이아크족은 나무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은 완전히 결합되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나무는 하나의 생명이 깃든 영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수목은 대체로 그 생명의 유지력과 수태시키는 힘 때문에 남성으로 상징되며, 그 꼿꼿한 외형이 남근의 기립(발기된 모습)과 비슷한 탓으로 수목은 토속신앙에서 수정적인 생명체로 풍년과 번식을 주관하는 당신의 신체라 생각하고 있다.11)
나는 이를 영구적인 보전공간과 일시적인 보호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해왔다. 보전에는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신격화하는 방식과 기피하는 방식이다. 신격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당숲과 당산, 우실 등이다. 기피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초분골, 풍장터, 도깨비 출몰지 등이다. 영험담에 이런 원리들이 들어있다. 당숲의 나뭇가지를 꺾었더니 급사(急死)했다던가 사고를 당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전국 각처에 전해져 온다. 문화권별로 다르긴 하지만 이런 스토리텔링을 통해 숲과 샘과 정주 공간들을 보호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를 전이지대(轉移地帶) 즉 신들이 거주하는 신성권역과 사람들이 거주하는 일반권역의 교집합이라는 맥락으로 정리해온 바 있다. 다양한 사례들이 있으니 차차 풀어 소개한다. 특히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식수와 지하수를 보존하는 일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일과 같다. 샘은 숲의 보전과 연관되며 숲은 신성과 관련된다. 당숲을 인격체로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정초 대보름에서 2월 초하루에 집중되어 있는 전국 마을의 당제를 톺아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5) 여서도 당제의 상차림 당제 진행에 특별한 도구는 일명 ‘노구지(놋쇠) 밥솥’이다. 나무로 만든 절구통을 지고 올라가 손수 쌀을 찌어 밥을 하고 떡을 한다. 쌀이 있는 독에서 딱 한 번에 걸쳐 쌀을 떠낸다. 그래도 항상 노구지 밥솥이 그득하게 밥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떡은 백설기 시루떡이다. 제수 음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멧밥(제사밥)이다. 노구지 밥솥에 멧밥이 소복히 올라오면 그해 풍요와 풍어가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제수에 육고기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예부터 전해오는 전통이다. 본래 물고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30여 년 전부터 물고기를 놓게 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선착장에서 헌식을 할 때 돼지머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육고기나 물고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수음식 자체가 매우 간단했다.
노구지 밥솥에서 지은 멧밥과, 시루에 찐 밥, 돌갓(여서도의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세 가지를 사용한다. 물고기를 사용하면서부터는 멧밥, 반찬 3종류, 어류 3종류, 과일 3종류를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육고기는 금지하고 있다. 윗당에는 본상에 5그릇를 차린다. 본 신체인 넙지락(너럭) 바위에서 좌편으로 떨어져 있는 곳에 차리는 1상은 산신 대상이다. 문지기 신격에게 좌, 우 각각 1상을 합하여 7상을 차린다. 윗당이나 아랫당 모두 멧밥의 개수는 같다. 하지만 근래에 변화되어 아랫당의 본상을 진설할 때 멧밥을 한 그릇만 놓기도 한다. 문지기 멧밥을 차리는 진설도 동일하다. 2013년의 경우, 아랫당은 네 상을 차렸다. 당집 안으로 1상, 당집 바로 문밖에 1상, 솟을대문 양쪽으로 문지기상 각각 1상을 차렸다. 사당 내의 할머니 신격은 독상을 받고 사당 밖 문지기는 두 상을 받게 되는 셈이다(끝).
1)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주는 명
2) 앞으로의 길흉화복을 예언한 예언서 3) 일연 지음, 김원중 옮김,『삼국유사』, 을유문화사, 2002, 33~35쪽. 4) 나경수, 『한국의 신화』, 한얼미디어, 2005, 132~133쪽. 5) 조동일, 『구비문학의 세계』, 퍼플, 2011, 31쪽. 6) 자현, 『사찰의 비밀』, 담앤북스, 2014, 297쪽. 7)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황금가지』durwjs?, 2003, 한겨레출판, 192쪽. 8) 엘리아데, 문상희 역, 『샤아머니즘』, 삼성출판사, 1981, 198쪽 재인용 9) 최덕원, 『다도해의 당제』, 학문사, 1983, 177~178쪽. 10) 손태도, 「정초 집돌이 농악과 지방 관아 나례희의 관련 양상」, 『한국음악사학보』(제49집), 2012, 243쪽. 11) 최덕원, 『다도해의 당제』, 학문사, 1983, 178쪽. 글쓴이 이윤선 진도학회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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