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순천 ‘와온 해변’에서 인문학을 현상하다 게시기간 : 2024-12-1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4-12-09 10:1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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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 ‘여행’에 대한‘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다. 따라서 ‘여행’의 의미는‘풍광과 풍습’만을 만끽하기 위해 유람을 떠나는 ‘관광’보다 광의적이다. 물론 두 낱말에는 ‘유람’이라는 벤 다이어그램의 교집합 같은 영역도 있다. 미국의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은 명저 『공간과 장소』에서 단순히 지리적 터만을 의미하는‘공간(space)’과 개인의 특별한 가치가 묻어 있는 ‘장소(place)’를 구분했다. 특별히 그는 그‘장소에 대한 사랑’을 그리스어인‘Topophilia(토포필리아)’로 명명했다. 이를테면 다수 대중이 빼어난 풍광만을 찾아 유람하는 관광지는‘공간’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 ‘공간’이 유명세와는 별도로 한 개인의 두꺼운 체험과 인문학적 가치를 품는 여행지일 경우 ‘장소’라는 개념으로 승화했다. 따라서 같은 터라도 사람에 따라‘장소’나 ‘공간’이 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기생충’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영화감독‘봉준호’에게 LA 할리우드 ‘돌비극장’은 인생에서 지울 수 없는 영광스러운‘장소’일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단지 꽤 유명한‘공간’일 뿐이다. 세계 지리학의 거두 ‘리커맨’(F. Lukermann)도 “장소는 시간을 따라 형성되어가는 공간의 확장 개념”이라 정의했다. ‘장소’를 다중의 미학적 ‘공간’을 넘어 개인의 가치까지 동여맨 인문학적 터로 해석한 것이다. 최근 민선 자치단제장들은 ‘도시 브랜드’를 향상시키기 위해 온 행정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도시의 특정 지역에 전설 등을 엮은 스토리텔링을 구상한다. 그리고 그곳에 그 이야기를 상징하는 기념물을 세우는 등‘장소 마케팅’을 시도한다. 그 노력도 일종의 ‘토포필리아’의 효과를 응용한 것이다. 나는 42년 전 대학 졸업 후 서울로 떠났다. 돌아보면 고향 전남에는 ‘이-푸 투안(Yi-Fu Tuan)’이 정의한 내 영혼의 ‘장소’가 많다. 그러나 나는 상경 후 내 밥을 찾아 헤매느라 그 특별한‘장소’들을 거의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은퇴 후에는 시간을 내어 애틋한 그 곳들을 자주 찾아다녔다. 그곳에 가면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삭지 않는 내 오랜 기억이 기다리고 있어 좋았다. 나는 평소 아내와 함께 여행한다. 그러나 나만의 ‘장소’를 찾을 경우 혼자일 때도 있었다. 고독할 때 내 생각들이 훨씬 깊고 넓게 퇴적된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 정체성이 투영된 그 특별한 애착의 ‘장소’로 길 떠나는 자발적 고립 같은 것이다. 칠순이 다 된 지금 내 특별한‘장소’는‘괴테’가 산책한 독일 ‘하이델베르크’의‘철학자의 길’과 40여 년 전 홀로 여행 중 아내를 처음 만난 신안 비금도‘명사십리 해변’, 보성 ‘율포 해수욕장’ 옆에 위치한 어머니와의 모래찜 추억이 서린 아직도 이름 없는‘명교해변’, 그리고 나중에 아내에게 간절히 프러포즈했던 전남 ‘보성 다원’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숲길 등이다. 그런데 그‘장소’는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배인 곳만은 아니다. 더러는 내가 흠모하는 작가나 철학자들이 글로 형상화한 곳도 있다. 물론 그 작가 등이 기록한 모든 터가 다‘장소’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활자들 중에서도 내 사유의 필름에 공감이 선명히 현상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 ‘곽재구’는 나만의 특별한‘장소’를 선물한 작가다. 나는 그의 시‘사평역에서’를 처음 읽으며 고교시절 눈 내리던 날‘남광주역’에서 겪었던 비슷한 경험에 전율했다. 그 후 시인이 대학 3년 선배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뵙거나 연락을 취한 적도 없어 실상 생면부지다. 그것은 내가 지금도 시인의 시를 더욱 치열하게 뜯어보는 힘이 되었다. 괜스레 술래가 된 내가 숨지도 않은 그 시인을 찾아가는 작업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그의 시집『전장포 아리랑』은 내 일방적인 숨바꼭질을 더욱 들뜨게 했다. 나는 그 서늘한 활자들과 만나는 순간 가슴이 마구 요동쳤다. 내 유년의 고향 집 뒷동산 진달래가 환장하게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시야에는 처음 그의 작품들에서 느꼈던 서정적 몽환보다 이타적 통찰과 투사의 이미지가 차츰 더욱 뜨겁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시에 사는 매혹적인 풍광들은 힘 센 권력에 밀린 약자들의 아픔을 위로하는 시인의 속내를 감추기 위한 장치 같았다. 그의 시편들에는 수많은 ‘뭉크(Edvard Munch)’의‘절규’가 널려있었다. 나는 그 후 산문집 『곽재구의 포구기행』에서‘다알리아 꽃’ 으로 비유한‘와온 마을’과 시집 『와온 바다』를 읽으며 타자를 위한 시인의 까치밥 같은 따뜻한 정신을 확신했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시인 ‘곽재구’의 시 ‘와온 바다’ 일부) 세월은 다시 무심히 흘렀다. 나는 어느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다시 시집 『와온 바다』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 시편은 처음보다 더욱 강렬한 감명으로 다가왔다. 시인은 어느 해질녘‘와온 해변’에 홀로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 힘겨운 늙은 어부들이 쇠락해가는 해의 밑동을 붙잡고 따뜻하게 주물러주는 이타적 위무를 목도했을 것이다. 서정에 마음을 빼앗길만한 황홀한 풍광에서조차 타자의 아픔을 걱정하는 그 윤리의식이 내 이기적인 가슴을 마구 때리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그‘와온 해변’은 나만의 특별한‘장소’의 목록에 추가 되었다. 나는 무엇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로 시작하는 3연에서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시인에게는 우쭐거리는‘자기 존재’를 거부한 프랑스의 사상가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냄새가 난다. 그 사상가는 ‘하이데거(Heidegger)’의 ‘존재론’과‘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자신의 기준에서 타자를 정의’하려는 나치즘 적 발상으로 규정했다. 시인 ‘곽재구’의 행간에도 자기 존재보다 타자의 치유와 세상의 탐욕적 권력을 부수려는 면모가 돋보인다. 시인 ‘곽재구’의 시에는 대낮과 작열하는 태양보다 유독 파리한 밤과 별 등이 자주 등장한다. 시인은 70년대 산업화 시대와 80년대 벽두를 관통하면서 폐허와 통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식 앞에 이를 악물며 별처럼 빛나는 희망을 벼렸으리라. 나도 동시대 모교인 광주 용봉동 J 대학교와 총소리가 난무하는 금남로에서 분노하고 송정리 누나 집 다락방에 숨어 스물 몇 살 내 유폐의 언저리를 하릴없이 쟁이는 날들이 있었다. “이른 아침 순찰사를 만나러 해농 창평 (현재의 순천시 해룡면)에 이르니 길바닥에 물이 석 자나 되었다.”
(1592년 음력 3월 14일,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일부) ‘와온 해변’이 소재한 순천시 ‘해룡면’일대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고뇌하며 거닐었던 곳이다. 또한 후백제 ‘견훤’의 사위이자 후일 ‘태조 왕건’의 장인인 ‘박영규’가 웅거했던 순천의 명산인‘해룡산’도 우뚝 솟아 있다. 그리고 순천 어느 해변의 귀퉁이도‘하멜표류기’의 한 부록이다. 1653년 8월 16일 하멜 등 64명의 선원을 태운 선박이 제주 가파도에서 파선되었다. 그 후 살아남은 36명 중 5명은 유배지인 순천에 분산 배치되었다. 전남은 어차피 유배자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바다가 꿈인 그들은 순천 해변 등에서 노역을 하며 본래 목적지인 일본으로 탈출을 꿈꿨을 것이다. 또한 명심보감에도 “順天者는 存하고 逆天者는 亡이니라.”(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살고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라는 명구가 있다. 물론 맹자가 언급한‘순천(順天)’은 순천(順天)이라는 도시를 지칭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순천(順天)이라는 지명을 부드러운 이미지를 덧씌워주는 느낌이다. 순천 ‘와온 해변’이 나만의 ‘장소’가 된 이후 내 안에는 늘‘와온 해변’이 들끓었다. 놀랍게도‘와온 해변’이 있는 해룡면 ‘상내리’의 지도를 보면 귀여운‘병아리’가 날개를 펴고 달음질하는 형상이다. 나는 그 정겨운‘와온 해변’을 꼭 마주하고 싶었다. 마침내 몇 년 전 다알리아가 미치게 피던 날이었다. 나는 함께 가고 싶어 하는 아내와 함께 ‘와온 해변’으로 떠났다. 해가 뜰 때 희망은 시작되고 노을이 오면 빛을 빼앗긴다. 우리가 기왕 ‘와온 해변’의 일출과 일몰을 모두 부닥칠 요량이면 시간의 순서대로 만나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러나 시 ‘와온 바다’의 시간은 거꾸로 일몰부터 새벽 일출로 흘러갔다. 나도 시인의 그 색다른 시간의 부침에 맞춰 달그락거리는 내 마음의 도화지에 일몰부터 칠하고 싶었다. 우리는 노을의 시간을 가늠하느라 늦은 오후 ‘와온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차를 탈 때 통상 목적지를 바라보는 정방향의 의자에 앉는다. 그러나 때로 역방향의 좌석에 앉을 때도 있다. 기차의 역방향에서는 이미 기차가 지나온 사물과 시간이 먼저 우리를 마주한다. 그것은 마치 깨를 벗고 냇가에 뛰어들던 유년의 질박한 순수와 만나는 느낌이다. 해변에는 시인의 감탄대로 다알리아가 그립게 피어 있었다. 우리가 넋을 놓는 사이 ‘순천만’의 끝자락과 ‘와온 해변’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들의 기묘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우두우두 꿔어억...”. 나는 언젠가 중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읽었던 시인 ‘김바다’의 시 ‘우포늪’의 한 구절이 새삼 떠올랐다. 우리를 마중 나온 새들이 그렇게 들쑥날쑥한 노래로 서로를 뽐내고 있었다. 길 떠나는 것을 까먹은 순천시의 시조(市鳥)인 몇몇 어리숙한 철새 흑두루미와 텃새의 불규칙한 합주곡은 장관이었다. 흑두루미들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텃새를 바라보며 목청을 키우는 그 동행은 참 따스했다. 모르는 바람이 내 허리를 감았다. 그런데 순천시의 지도를 보면 신기하게도 시조(市鳥)인 흑두루미가 날개를 펴고 무등산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형상이다. 그날 나는 불협화음도 받아들임에 따라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이 조금씩 햇발들이 어둑발에 밀리고 있었다. 이윽고 갯벌에서 종일 작업을 하느라 지친 늙은 어부들이 허리를 폈다. 그리고 시인의 시에서처럼 갯벌을 비추는 마지막 햇발을 보듬고 리어카를 느릿느릿 밀며 귀가하고 있었다. 나는 그 놀라운 화합 앞에 잠시 서정적인 풍경만 훔쳐봤던 나를 나무랐다. 밀물이 시작되자 갯벌을 따라 S자를 그리던 곡선들이 큰 C자로 펴졌다. 늙은 어부들도 허리의 통증을 이겨내느라 가끔씩 허리를 뒤로 젖히며 휜 허리를 폈다. 마침내 갯벌 가운데 외롭게 떠있는 무인도 ‘솔섬’을 가로질러 장엄한 일몰이 시작되었다. 감격한 아내가 날숨을 길게 내뱉었다. 전문 사진작가로 보이는 사람들도 수동식 카메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나는 나만의 의식을 위해 천천히 해변의 작은 가게 옆 전등불 아래로 갔다. 그리고 수첩에 미리 써놓은 시 ‘와온 마을’을 나직하게 낭송하기 시작했다. ‘나는 진리 앞에서 얼마나 머뭇거렸는가?’‘무엇이 나를 이리로 이끌었는가?’ 이제 해가 쉬려는 시간, 나는 그 바닷가에서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복학생이던 나와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 평생 내 사유에 익숙한 아내가 피식 웃었다. 어느덧 새들과 환호하던 사람들이 약속처럼 일제히 사라졌다. 이제 ‘와온 해변’에는 우리와 어둠만 덩그렇게 남았다. 새벽부터 별 준비 없이 급히 출발한 우리는 해변의 작은 식당에서 간단한 요기를 마쳤다. 그리고 늦은 밤부터 차안에서 나만의 그‘장소’를 성찰하기로 했다. 곽 재구 시인도 그 ‘와온 해변’에서 가난한 삶의 현장을 보며 지난날의 좌절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 우리도 시인이 언젠가 서정을 누르고 고뇌했을 실제 그 ‘와온 해변’에서 시인의 생각에 걸린 그‘Topophilia(토포필리아)’의 족보를 베낄 차례였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와온 마을’ 뒷산 ‘소코봉’에서 솟는 일출을 맞이했다. 시인의 말대로 순금 빛 아홉 마리의 용이 하늘로 비상하고 있었다. 최근 ‘와온 해변’의 일몰은 꽤 알려진 것 같다. 그러나 순천시에서 특별히‘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를 개최할 때 안내 리플릿이나 기념주화 등에 그 매혹의 해변을 더욱 홍보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한다. 잠시 후 우리는 어둠의 잔해가 묻어 있는 그 산 밑동을 산책했다. 어제 해변의 바람은 다알리아 꽃잎 사이를 부드럽게 맴돌기만 했었다. 그러나 그 이른 아침 산바람은 쉭쉭 소리 내며 도망갔다. 그 바람은 방금 전 마을의 개 짖는 소리로도 크게 흔들지 못했던 고요를 깨웠다. 바람의 성격은 그렇게 주소지마다 달랐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어느 휴게소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더니 이내 개었다. 그리고 멀리 무지개가 떴다. 나는 일곱 빛깔 무지개가 각각 품고 있는 방들이 무척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모두 같은 넓이와 키, 그리고 누가 감독하지 않아도 서로 이웃 방의 경계를 탐하지 않는 정직한 배려가 놀라웠다. 그것은 멀리서 보면 언뜻 짙은 주황의 아름답고 거대한 꽃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악취가 나는 열대우림지대의‘라플레시아(Rafflesia)’꽃과는 달랐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그 무지개의 방식이면 참 좋겠다. 끝. 집필자 박성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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