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국보 출토 현장을 다시 보다 게시기간 : 2025-01-22 13: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1-21 10:0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유산, 기록과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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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15일 저녁참. 전남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마을 서남쪽 한켠 언덕받이에 있는 집안에 자못 성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보자기에 쌓인 고리짝을 앞에 놓고 경건한 마음으로 제를 올린다. 주인 구씨(①)는 염원을 담는다. “고혼은 영면하시고 가내와 동네에 복을 내려 주소서” 어인 영문일까. 1971년 8월 농가 담장 밑 배수구에서 11점 발견 그날 낮 오후 세시. 한참 더위이다. 며칠간 장마가 들어 헛간에 물이 스며들어 담밑에 있는 도랑을 쳤다. 괭이와 삽으로 1미터 쯤 파니 점토로 쌓은 돌무더기가 나오고 길이 1미터, 가로 30센티미터 가량의 썩다 남은 향나무 널조각이 나왔다. 구씨(①)는 고분이라고 여기면서 손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못보던 형태의 쇠붙이가 여러 점 나왔다. 사람 크기만한 둘레에 양쪽으로 띄엄띄엄 놓여 있었는데 모두 11점이었다. 칼같이 생긴 것, 둥그런 형태, 양쪽에 방울 형태가 달린 것도 있고, 돌아가면서 여덟개인가 방울이 달린 것도 있다. 어떤 것은 도끼 같기도 하다. 칼 한 점은 삽이 빗나가 깨뜨렸다. 마을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광주 골동품상에 가지고 가면 많은 돈을 받을수 있다고 일러주는 이도 있었다. 어떻든 무덤에서 나온 것이니 무덤 주인의 명복을 빌어 주고, 보기에도 신령스러우니 복을 내려 달라고 했던 것이다. 이 한적한 농가의 담밑 도랑에서 부지런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이 쇠붙이는 일곱달이 채 못되어 대한민국 국보 제143호로 지정된다. 1971년 3월 2일이다. 지정 당시 ‘문화재(지금의 ‘국가유산’) 명칭은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지정 수량은 11점이다. 종류별 명칭은 세형동검 3점, 동부[도끼] 1점, 동타[손칼] 1점, 정문경[잔무늬거울] 2점, 팔주령 2점, 쌍두령 2점으로 모두 6종이고 청동제품이다. 조사된 유구는 적석목관묘이다.
출토지가 분명한 청동기 유물, 발견되자마자 국보 지정 무엇보다도 출토지가 분명한 청동기시대 유물이란 점이 중요하다. 그 이전에는 청동기 유물이 몇점 있었지만. 이미 현지를 떠난 상태에서 확인되어 출토지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잔무늬거울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제작기법이 정밀하고 문양구성의 균형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수작이다. 다양한 청동방울은 신과 교감하는 특별한 힘을 가진 정신적인 지도자, 즉 제사장의 권위와 신비함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대곡리 청동기 유물은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가 절정기에 달한 시점인 기원전 3세기 중반경이다. 2400년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청동은 자연상태의 구리와 주석 등을 합금하여 만든 것인데 인류가 발명해낸 첫 금속이자 시대를 구분하는 척도가 될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 신물질이다. 또한 청동기는 소유자의 강력한 힘을 상징함과 동시에 하늘과 소통하는 신비로운 기물로 인식되었다. 국보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이 제작되고 사용되던 시기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유적으로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문화유산)에 지정된 화순 고인돌유적의 시기와 일치한다. 청동기 시대에 뒤이어 이어지는 철기시대에는 마한문화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같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몇가지 사실을 최근에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제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눈썰미 좋은 엿장수 신고 운운’의 내용일 것 같다. 국보 지정일자도 잘못 알려져 왔고, 잔무늬거울에 금이가고 깨진 사연도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발견자와 신고, 지정, 국가 귀속의 경위도 함께 살펴 본다. 2023년 8월 3일 14:00. 뙤약볕이 내려 쬐는 한낮. 화순 도곡면의 문화유산 몇군데를 돌아 보고 이양면 쌍봉리를 가는 길에 도곡면 대곡리 청동기 유물 출토 현장을 들렀다. 무더위 아랑곳 않는 심홍섭위원이 앞장 섰다. 1971년 8월 출토되었으니 반세기 넘어 52년이 지났다. 8월달이니 발견 당시도 이처럼 무더웠으리라. 화순군에서 구씨(①) 가옥을 매입하여 정비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52년만의 현장이야기, 발견·지정 과정의 문서 확인 심홍섭위원과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할 때는 동검 두점이 나왔는데 국보에 포함되어야 한다.” “발견한 어른이 살다가 집이 비어 있었는데, 아들이 내려와 살고 있다.” 아드님과 “문화재관리국장 표창장도 있고 30만원인가 보상금 영수증도 있다.” 이런 얘기를 나누었다. 비오듯한 땀을 훔치며 사진 찍다가 ‘표창장’, ‘보상금’ 소리에 귀가 번쩍이다. 처음 듣는 얘기이고, 보통 발견자가 보관하고 있다가 ‘엿장수’에게 전달되었고 그이가 도청에 가져다 주어 ‘국보’까지 되었다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는데 다음 네줄 정도이다. -1971. 배수로 공사중 매장문화재 청동기 유물 발견(발견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312. 발견자 – 구씨(①), 67세)
-1971.12.20. 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전라남도청 문화공보실 방문(보관유물 열람) -1971.12.24. 국립증앙박물관 긴급수습 현장 조사(무덤 발굴, 목관 흔적 등 발견) -1972.03.02. 국보 지정(제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11점) 그런데 ‘표창장’과 ‘보상금’이라니. 표창장이 있는 것은 문화재보호법상 표창할 근거가 있었다는 것이고, 보상금을 받았다는 것은 그 또한 절차를 거쳤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에 30만원이면 지금으로 환산하면 대략 1천만원쯤일 것 같다. 다음날 화순군에서 ‘영수증’ 사진을 보내왔다. 농협 화순군지소에서 수취하도록 발견자에게 보낸 ‘국고입금통지서’이다. 1972년 11월 14일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지금의 국가유산청) 지출관이 도곡면 대곡리 구씨①에게 보낸 것이다. 이 문서로는 발견 매장문화재(지금의 매장유산) 발견자에게 지급한 보상금인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래서 자료 찾기가 시작되었다. 국가기록원에 일련의 문서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에서도 일부 자료를 볼 수 있다. 보도자료도 확인하였다. 이들 자료를 꿰맞춰 연표식으로 정리해 보았다. 순서대로 풀어본다. 배수로 공사중 발견(화순)-문화재관리국 학예사 열람(전남도청)-긴급수습조사(국립중앙박물관)-국보 지정(문화재관리국), 네줄로만 간략히 설명되던 국보 「화순 대곡리 청동기 일괄」 유물의 발견-지정-보관의 과정이 그 스무배가 넘는 80줄 이상의 기록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국보 지정날짜로 ‘1971.03.04.’로 표기해 왔었는데 관보를 확인하고, 문화재청에 제안하여 ‘1971.03.02.’로 바로잡았다. 52년만에 표기 오류를 시정한 것이다. 처분하기 위해 골동상 들렀다가 도청으로, ‘엿장수’로 잘못 알려져 또 한가지 돌아 볼 것이 발견 경위에 대한 것이다. ‘엿장수’가 신고했다는 것이고, 지금도 “엿장수에게 '고물'로 팔려갔다 돌아온 국보” 같은 문구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심지어 국가유산청 누리집의 국보 해설과 연계된 동영상의 제목은 “엿장수, 고철을 국보로 바꾸다 - 화순 대곡리 청동기 유물”이고, 설명 중에도 그런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새로 확인한 문서나 자료 어디를 보아도 ‘엿장수’는 실체가 없다. 1971년 8월 발견되고, 12월 문화재관리국 전문가의 현지조사를 거쳤다. 그런데 1984년에 발굴보고서를 내면서 “마침 마을에 돌아다니던 엿장수의 손에 넘겼으나, 다행히 엿장수가 전남도 문화공보실에 신고하므로써”라 하여 ‘엿장수’ 얘기가 알려진 것 같다. 이 얘기는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현지 조사 전문가가 들었던 것을 뒤에 그대로 기록한 것 같다. 그런데 관련 문서를 통하여 전혀 새롭게 정리할 수 있었다. 1971년 8월 15일 발견 이후 10월부터 발견신고와 유실물법에 의한 습득물 공고가 화순군-화순경찰서 사이에서 공문서가 오가면서 진행되어 전남도청으로 이관되었다. 다시 매장문화재 실물을 제출하라는 문화재관리국의 지시에 따라 전라남도청에서 문화재관리국으로 이관되었고, 300만원의 감정평가, 국보 지정 등의 절차를 거쳐 국가에 귀속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조치 된다. 한편, 발견 이후 화순 대곡리 현지에서의 이야기도 신문기사 자료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발견자는 장마철 배수로를 정비하다가 발견하여 제(祭)를 지내고 보관은 하였는데, 어찌할 줄 모르다가 8월 20일 광주를 자주 다니는 젊은 친척(구씨②)에게 처분해 달라고 했다. 이 구씨②는 화순읍 거주 친척(구씨③)에게 팔아달라고 맡기고, 광주로 가서 박물관과 골동품상을 다니며 유사품이 있는가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8월 23일 구씨②는 다시 광주경찰서앞 골동품상 두곳에 발굴품을 보이며 쇠값보다 조금 더 내고 사라고 했으나 자기(瓷器)류는 사들이나 쇠붙이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거절당하였다. 돌아다니다가 지친 나머지 당시 광주에 있던 전남도청에 가서 여기 저기 경비가 들었으니 1만원만 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전남도청에서는 화순군에 신고하라고 한다. 그래서 다시 화순으로 내려와 화순군청에 두고 간다. 이날 도청에 들렀던 화순 대곡리의 발견자 친척(구씨②)이 ‘엿장수’로 알려진 것 같다. 도청에서는 인적사항을 적어 두지 않았던 것 같고, 돈을 달라했던 점 등을 연계시켜 추정해 보자면. 매장문화재 발견신고 절차 추진, 경찰서 공고 기간중 파손 10월 10일 화순군에서 매장문화재 발견 신고 절차에 따라 15일 화순경찰서에 공고 의뢰와 함께 현품을 경찰서에 인계한다. 60일간(10.18.~12.17) 화순경찰서장이 습득물 공고를 한다. 화순경찰서 공고 중 물품창고 보관중에 철제의자가 넘어지면서 잔무늬거울 일부가 파손된다. 뒷날 문화재관리국에서 사실 확인을 요청하여 관련 경찰관은 징계처분을 받는다. 12월 20일 문화유적 지표조사 협의차 문화재연구소 학예사가 전남도청 문화공보실 방문 때 청동일괄유물이 매장문화재 신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2월 24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과 함께 수습조사를 실시한다. 김포공항에서 프로펠라 비행기도 이동했다. 1972년 1월 8일 문화공보부(문화재관리국)에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감정한다고 유물 송부를 전남지사에게 요청한다. 1월 14일 전남지사가 송부하고 26일 문화재관리국에 접수된다. 2월 3일 문화재관리국 문화재평가심의위원회에서 발견매장문화재 감정 평가를 한다. 300만원의 감정평가액이 나왔고 국보급으로 평가되었고 2월 22일 문화재위원회에서 국보로 지정키로 심의하여 1972년 3월 2일 지정고시하였다. 10월 31일 국가 귀속 처리가 되었다. “지정사유 : 우리나라 청동 시대의 대표적 도구가 거의 망라된 일괄 유물로서 출토지와 발간된 사유가 확실하고 지금까지 볼 수 없던 신양식의 이러한 모양 세문경 등이 들어 있어 청동시대 연구에 가장 귀중한 자료임.” 300만원 평가, 지급은 안되고 곳곳마다 들쑤시고 1972년 2월 26일 문화재관리국에서 대곡리 구씨①에게 통보하고 3월 3일 전남도에 보상금을 청구하도록 통보한다. 감정평가 이후 동네에서는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매장문화재는 발견자와 토지소유자가 반반씩 보상금을 받는다. 발견자는 배수로 집 주인 구씨①이고 토지소유자는 문중땅으로 대표자는 조씨였다. 동네 사람들은 자기 성씨의 선조들이 활동한 행적을 서로 내세우면서 연고권을 주장하였고, 마한의 보물이라는 말도 나왔다. 중요지역을 지켜야 한다고 보초를 서기도 했고, 조그만 둔덕이라도 있으면 고분이라 여기고 파헤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감정평가 보상금을 누구에게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발견신고를 1주일 이내에 해야 하는데, 두달 가까이 돼서야 신고가 되어서 ‘기간도과’로 국가귀속 처리만 되고 보상금 지급은 없다는 것이다. 1972년 300만원이면 지금으로 보면 1억원쯤 될 것이다. 발견자는 몸져 누웠다. 동네 사람들은 연명으로, 발견해서 국보가 지정되었으니 발견자와 신고를 권장한 자에게는 보상금을 주어야 한다고 대통령비서실 등에 탄원서를 올렸다. 문화재관리국에서도 보상금을 지급하려고 법무부에 유권해석까지 의뢰하였다. 그럼에도 결국, 발견 매장문화재 감정평가액에 대한 보상금 지급은 안되었다. 그러다가 국보 지정 뒤, 중요유물 발견자에게 문화재 지정이 되면 보상한다는 조항에 따라 감사장과 함께 보상금 30만원이 부상으로 지급되었다. 감사장은 1972년 11월 18일 문화재관리국장실에서 수여되었다. 그 감사장과 보상금 입금증에 대하여 2023년 8월 3일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국보 청동기유물 출토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엿장수’의 실체는 없고, 발견자(구씨①))와 발견자 친척(구씨②)이야기를 문서자료와 언론기사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발견자와 발견경위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리하는 것, 금이 간 저 국보 잔무늬거울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것, 실체 없는 ‘엿장수 운운’의 기억을 이제라도 고쳐 쓰는 것, 이러한 것들도 문화유산 원형 찾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우선 ‘기록물’의 발견 보고를 하면서 이를 계기로 더 자세한 기록이 정리되고, 2008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동검 2점도 국보로 추가 지정되기를 기대해 본다.
도움받은 자료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 제1차회의 회의록』(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1972.02.22.)
『관보』 제6093호(1972.03.04.) 『화순 대곡리 청동기 발견신고철 관련문서』(생산기관 문화재관리국, 보관 국가기록원) <조선일보> 1972.02.04. ; 1972.02.05. ; 1972.02.10. ; 1979.02.23. <경향신문> 1972.02.04. ; 1972.10.18. ; 1973.10.30. ; 2008.06.20. 「국고금입급통지서」(1972.11.14.,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 특별회계, 수신 구〇〇) 「감사장」(1972.11.18., 문화재관리국장, 수신 구○○) 김원룡, 「화순 출토 細文鏡」, 『문화재』6, 문화재관리국, 1972. 조유전, 「전남 화순 청동유물일괄 출토유적」, 『윤무병박사회갑기념논총』, 윤무병박사회갑논총간행위원회, 1984 전남대학교박물관·화순군, 『화순 대곡리 유적』, 2005. 국립광주박물관·화순군, 『화순 대곡리 유적』-국보 제43호 청동기 출토-, 2013. 김희태, 「화순 대곡리 청동기 발견과 국보지정, 국가귀속 관련 연표」, 2024(유인물) 국가기록원[https://www.archives.go.kr] 국가유산청[https://www.khs.go.kr] 국립광주박물관 [http://gwangju.museum.go.kr]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글쓴이 김희태 전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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