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성좌] 3대에 걸친 김창균가(金蒼均家)의 항일운동 게시기간 : 2025-03-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5-03-25 13:2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항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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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지역 독립운동계의 ‘오리온자리(Orion座)’ 2019년 6월 7일 KBS뉴스는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가족들이 3대에 걸쳐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독립 유공을 인정받아도 훈포장이 후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보훈처에 등록된 이름과 부르던 이름이 다르기 때문이라는데요. … 1919년 광주 3.1운동을 주도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는 등 평생을 민족운동과 통일운동에 투신한 김복현 선생. … ‘김철’이라는 예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철 선생의 장남과 며느리도 독립운동에 참여해 지난 1990년 애국장을 받았고, 부친인 김창곤 선생과 큰형 김석현 선생은 을미사변 때 의병장 등으로 활동하다 처형당해 역시 지난 1995년과 2003년 각각 애국장을 받았습니다.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문 3대 독립유공자 집안입니다. 하지만 김철선생과 달리 김창곤, 김석현 선생은 훈장을 받고도 수십 년째 자손들이 이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어 2019년 11월 15일 연합뉴스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전남대학교가 오는 17일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잇따라 훈·포장을 전수하지 못한 순국선열의 후손을 찾아냈다. 을미의병으로 참여했다가 아들과 함께 순국한 김창균 선생은 24년 전인 1995년에, 아들 김석현 선생은 16년 전인 2003년에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나, 후손을 찾지 못해 훈장이 전수되지 못했다. 전남대 연구팀은 광주전남지역 3·1운동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서울에 사는 후손 김달호 씨를 찾아내 훈장을 받도록 했다. 김달호씨가 훈장을 전수받으면서 김창균 선생의 후손들인 아들 김석현·김복현(김철), 손자 김재호(건국훈장 애국장), 며느리 신정완(건국훈장 애국장·신익희의 딸)에 이르기까지 총 5명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온전히 자리잡게 됐다.
요컨대 각각 1995년과 2003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나 후손을 찾지 못했던 김창균과 김석현의 후손 김달호(김복현의 아들)에게 전남대(의향정신세계화사업단)의 노력으로 훈장이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총 5명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 명문가로 온전히 자리잡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2019년 언론의 조명을 받은 이들 5명의 공훈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독립유공자공훈록』).
김복현(애족장)과 아들 김재호(애국장) 및 자부 신정완(애국장)이 1990년, 김창균(애국장)이 1995년, 김석현(애국장)이 200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다. 일가가 3대를 이어가며 의병항쟁-3·1운동-임시정부활동 등 다양한 분야의 국내·외 항일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독립운동의 명가가 여럿이지만 이같은 사례는 흔치 않다. 3대에 걸친 이 가문의 항일운동을 보며 필자는 문득 겨울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오리온자리(Orion座)’가 떠올랐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거인 사냥꾼’ 오리온의 허리띠(Orion's Belt)인 3개의 별 민타카(Mintaka)·알니람(Alnilam)·알니탁(Alnitak)처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맞서 싸운 ‘거인 싸움꾼’들의 이야기다. 김창균·김석현 부자의 의병항쟁과 순국
김창균은 이학상 의진의 좌익장으로 전라남도 나주·보성 일대에서 활약했다. 호남지역에서는 1895년 8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된 을미사변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한 기우만·기삼연·고광순 등 유학자들이 거의했다. 하지만 이때 김창균은 뜻을 같이하면서도 참여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해 11월 일제와 친일정권이 단발령을 강행하자 이에 반발하여 광주의 기우만과 장성의 기삼연이 1896년 3월에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김창균은 나주고을 아전과 군교 수백명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가서 참서관 안종수와 박총순·여순검 등을 처단한 뒤, 박시찰·복주사 등 6명을 체포하여 향교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그는 “참서관 및 총순 무리들은 역적의 도당으로서 이제 다 맞아 죽었으니 본 고을의 의병은 처음만 있고 끝이 없어서는 안된다”라며 이학상을 추대하여 의진을 구성했다. 그리고 다음날 연리청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부서를 배정했는데, 김창균은 좌익장을 맡고 참모진은 사인(士人) 나병두, 전현감 손응, 중군장은 이승수, 우익장은 박근욱 등이 맡았다. 이처럼 김창균 등 나주의병은 개화파인 참서관 안종수를 처단함으로써 친일정권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관찰사 한기동은 서울까지 도망쳤으며, 이후 관군을 데려와 의병을 탄압했다. 그리하여 김창균은 1896년 5월 전남 보성에서 활동하다 붙잡혀 아들 김석현과 함께 순국했다. 『독립신문』1896년 6월 2일자에 따르면 김창균은 총살되고 김석현은 장성에서 효수되었다고 한다. 신기선의 「봉사일기(奉使日記)」에는 이들 부자가 모두 총살되었다고 나온다(“金蒼均及其子晳鉉則 金秉旭回軍之路 捉得砲殺”).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고경명·고종후 부자를 연상케 한다.
![]() 『독립신문』 1896년 6월 2일자 광주지역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김복현
![]() 김복현 등 판결문 김창곤의 5남인 김복현은 광주지역 3·1운동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일명 김철(金哲, 金鐵)인 그는 3·1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이다. 나주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광주로 이거하여 광주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1919년 3월 2일 최흥종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광주에서의 거사를 계획했으나, 최흥종이 현지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자 혼자 광주로 돌아와 국기열·강석봉·한길상·김강·최한영 등 동지를 규합하고 평소에 교유하던 삼합양조장 그룹과 합세하여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고 광주 작은장날인 3월 10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 때문에 그는 주동자로 검거되어 3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으며, 특히 1920년대 광주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에 그가 있었다. 최흥종과 함께 광주노동공제회 간사(1921)와 총무부원(1926), 광주자유노동조합 준비위원(1926), 광주협회 종교부원(1926),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1927) 등을 맡아 활동했으며, 이 때문에 일제의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일경에 다시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단식투쟁 끝에 석방되었으며, 1933년 장남 김재호를 중국에 보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 학교를 졸업시키고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의 외동딸과 결혼시켰다. 50세 되던 해에 영암 신기리에서 광복을 맞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고, 건준이 해산된 뒤 인민위원회에서도 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46년에는 신민당 전라남도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미군정의 탄압과 내부의 분파 투쟁에 염증을 느껴 2선으로 물러났으며,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하고 고문을 맡아 마지막 투쟁을 펼쳤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고 1969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재호·신정완 부부의 국외항일운동 김복현의 아들인 김재호과 자부인 신정완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33년 2월경 상해에서 온 정의은(정율성의 셋째형)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의열단 간부학교에 입학하여 독립전쟁의 훈련을 받았다. 여기서 제2기생으로 졸업하고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하다 조선민족혁명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당시 동지들과 제2전 산서성 일대에서 대적선무공작을 전개했다. 1941년 5월에는 조선의용대에 입대하여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의 대원으로 활동하다 김구의 소명으로 중경임시정부 선전부의 선전위원이 되었다. 초대 선전부장은 김규식이었으며, 위원은 조소앙·신익희·엄항섭·김성숙유림·안우생·김문·김인철·박건웅· 이정호·한지성·신기언·손두환·김상덕 등 15명이었다. 1942년 10월에는 선전위원회 위원 겸 발행부 주임에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의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광복까지 의정활동에도 참여했다. 1943년 4월에는 해방동맹 소속으로 임시정부의 내무부 사회과장에 임명되었으며, 1944년 5월에 총무과장에 전출되어 계속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했다. 신정완은 1919년 3·1운동 직후 부친인 해공 신익희를 따라 중국 각지를 전전했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1939~1941년 산동성 제2전구 사령부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어 지하공작 첩보활동을 벌였다. 1943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8.15 광복 때까지 활동했으며 임시의정원 역사상 7번째 여성의원이자 마지막 여성의원이었다.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에서 한성화교학교, 숙명여고 등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 남편 김재호와 사이에 2남을 두었으며, 장남 김낙양은 1937년 중국 낙양에서 태어나 이름을 낙양이라 지었고, 1940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차남 김유생은 1942년 중경에서 태어났는데 중경의 옛 이름인 유주에서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유생으로 지었다. 1981년 『해공 그리고 아버지』를 출간했다.
또다른 독립운동의 명가 출신들 광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의 명가 출신도 있다.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감이었던 김필례의 경우 언니 김언순의 첫째딸 김함라는 광주 3·1운동을 주도했던 남궁혁의 부인이며, 셋째딸 김마리아는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고 상해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이다. 언니 김구례의 남편은 독립운동가 서병호이며,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부인인 언니 김순애 역시 상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의사인 오빠 김필순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시숙은 일제강점기 광주·전남 민족운동의 지도자이며 신간회 광주지회 초대회장을 지낸 최흥종이다. 이들 중 김마리아(독립장)·서병호(애국장)·김규식(대한민국장)·김순애(독립장)·김필순(애족장)·최흥종(애족장)이 독립유공자이며, 김필례 자신도 독립유공자(건국포장)이다. 이들 중 김필례·남궁혁·최흥종이 광주에서 활동했다. 독립운동계의 별자리 만들기
![]() 오리온의 허리띠 김창균가의 사례에서 보듯이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추서했지만 후손을 찾지 못해 증서가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했음에도 후손이 이를 알지 못해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못하는 인물도 여럿이다. 다행히도 최근 지자체에서는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의 발굴 및 포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전라남도의 경우 2021년부터 ‘독립운동 미서훈자 발굴 및 서훈 신청사업’을 벌이며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물론 쉽지 않은 사업이다. 무엇보다도 공적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가 필수인데, 이 때문에 선정되지 못하는 사례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추진을 멈춰서는 안된다. 이런 사업을 통해 한두명이라도 새롭게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면, 그렇게 해서 ‘의향’ 호남의 독립운동 밤하늘에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더없이 값진 일이기 때문이다. 독립유공자에 대한 선양은 우리 모두가 함께 펼쳐야 할 또다른 ‘독립운동’이다. 글쓴이 한규무 광주대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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