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교지 연호(年號)를 바꿔라 게시기간 : 2022-08-18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8-1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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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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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年〕에도 이름이 있다 현재 우리는 날짜를 표기할 때 이른바 ‘서기(西紀)’를 이용하는데 ‘서기’라는 말을 굳이 앞에 붙이지 않는다. 2000년, 2022년이라고 표기해도 숫자 앞에 ‘서기’라는 말이 으레 생략되었다고 여긴다. 지구상 많은 나라가 이런 표기방식을 쓴다. 역사 관련 글을 읽다보면 만력(萬曆), 강희(康熙), 광무(光武) 등의 단어가 나온다. 그리고 그 때 누가 임금이었는지에 따라 선조(宣祖) ○년, 정조(正祖) ○○년 등으로 쓰여져 있다. 아마 우리가 조선시대 살았더라면, 내가 태어난 해가 만력 몇 년인지, 그 때의 임금이 누구였고 그 임금 몇 년이었는지, 그 해의 간지(干支)는 무엇이었는지 등을 헤아려야 한다. 지금은 ‘2010년에 태어났다.’고 하면 ‘서기 2010년’이라고 이해한다. 이처럼 각 해의 숫자 앞에 붙는 단어를 연호(年號)라고 한다. 각각 그 해당 연(年)의 호칭이고 이름이다. 과거에 연호는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새로 정해졌다. 당 태종 때는 정관(貞觀), 양귀비와의 일로 안록산 난을 초래했던 당 현종은 개원(開元), 천보(天寶) 등으로 정해 불렀다. 명(明)을 세운 명 태조는 홍무(洪武)라는 연호를 썼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했던 명의 신종(神宗) 때의 연호는 만력(萬曆)이고, 명말의 의종(毅宗)은 숭정(崇禎)을 연호로 썼다. 우리도 과거에는 연호를 썼다. 삼국시대에는 각각 자체적으로 연호를 정해 쓰기도 했고 고려 초기에도 그랬다. 조선은 처음부터 명나라 연호를 그대로 수용하여 연도를 표기했고, 조선 후기 청나라가 세워지자 청의 연호를 쓰기도 했다. 조선이 자체적으로 연호를 만들어 쓴 때는 1897년(고종 31)에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고치면서 고종이 황제로 등극할 때 정한 ‘광무(光武)’이며 순종은 ‘융희(隆熙)’를 썼다. 연호는 통치자가 자신의 치세 시기를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통치자의 성향, 통치 철학 및 이상 등이 스며 있다. 연호는 세심하고 치밀하게 따져서 결정된다. 연호를 사용하는 이들도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수용한다. 어떤 연호를 수용하고 사용하는 일은 곧 연호 제정자를 존숭하거나 연호 제정의 의도, 정신을 적극 수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정치적 의미까지 덧붙여진다. 정치 상황에 따라 해를 표기하는 연호가 달라진다. 명이 거의 망하고 청-후금이 강성해져 청의 연호를 써야했던 1641년(인조 19)년에 탄일진하전문에 청 연호를 쓰지 않았던 송국택과 황집이 파직당한 일, 일제 강점기에 우리 땅에 사는 조선인들도 일본의 연호를 써야했던 일이 대표적이다. 이유길 추증 교지 날짜는? 조선시대 공식적 문서에는 ‘대국의 연호를 사용한다.’는 원칙 아래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조선 전기에는 명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했고, 후금이 청나라를 세운 이후에는 청의 연호를 써야 했다. 그러나 청 건국 후 조선의 모든 공식 문서에 청 연호를 일률적으로 썼던 것은 아니었다. 때에 따라 또는 사람에 따라 다른 연호를 쓰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다. 어떤 연호를 쓰느냐는 연호 사용자의 인식이나 태도를 보여주었다. 같은 때의 문서라도 다른 연호를 쓰기도 했고, 거의 같은 문서라도 연호가 다르기도 했다.
이유길과 관련한 교지는 이를 잘 보여준다. 교지란 임금이 하교한 뜻, 내용을 문서로 작성한 공식 문서다. 이유길은 조선후기 사람이다. 자(字)는 유지(有之), 사계 김장생 밑에서 공부했다. 할아버지는 이후백으로 종계변무의 공을 세웠다. 명의 『대명회전』에 고려 때 권신인 이인임(李仁任)이 태조 이성계의 선조로 잘못 기록되었는데, 이후백이 바로 잡는 일을 훌륭히 완수했다. 이 일로 이후백은 광국공신 곧 나라를 빛낸 공신이 되었고 연양군으로 추봉 받았다. 이유길은 공신의 손자였던 셈이다. 그의 나이 20대에 정유재란이 일어났고 그는 충무공 이순신 막하에 들어가 노량해전에서 공을 세웠다. 이 일이 선조에게 알려졌다. 선조는 이유길을 직접 만나 ‘충효(忠孝)’ 두 글자를 크게 써서 내려 주었다. 할아버지가 공신이 되었고, 이유길도 임금의 친필을 하사 받았으니 집안의 영광이었다.
1597년 교지. 이유길은 명량해전에서 공을 세워 효력부위 익위사세마로 임명되었다. 선조 때였으므로 연호가 만력으로 되어 있다. 이후 그는 제주판관, 함흥판관, 영유(永柔) 현령 등을 지냈다. 함흥은 함경남도에 있고 영유는 평안도 서쪽에 있다. 당시 두만강 이북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누르하치는 주변 여진족들을 복속시켜 후금을 세우고 세력을 키워가면서 요동지역으로 서진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조선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외교적 노력을 해야했고, 북방 영토도 지켜야 했다. 이유길은 북방 지키는 적임자로 선택되어 함흥판관이 되어 북쪽으로 갔다. 1618년 누르하치는 명의 영토인 무순(撫順)을 점령했고, 급박해진 명은 지원군을 파견하라고 조선을 압박했다. 광해군은 강홍립을 원수로 삼아 1만여 명 규모의 군대를 편성하여 요동지역으로 출정하게 했다. 선천군수였던 김응하(金應河)도 요동군대에 편입되었는데 그는 이유길을 추천하여 영유(永柔) 현령으로 발령을 내고 중군에 편입시켰다. 이유길은 김응하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갔다. 그리고 1619년 3월 4일에 심하(사르후) 지역에서 후금 군대와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당시 강홍립이 후금과 화친할 뜻을 보이자 이유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의 은혜를 잊었느냐?”고 큰소리를 치며 화를 냈다고 한다. 강홍립과 의견 대립을 보이며 항전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3월 4일 전투 때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이상 대적할 수 없었다. 그러자 피로 물든 한삼을 찢어 ‘3월 4일에 죽다(三月四日死)’라는 다섯 글자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타던 말 갈기에 묶고는 조선 쪽으로 달려가도록 채찍질했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말은 3일 동안 쉬지 않고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한삼 조각을 보고 이유길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한삼 조각으로 초혼의례를 치르고 파주 광탄에 묘를 만들었다. 묘 아래 말을 묻어주니 사람들이 ‘의마총(義馬塚)’이라 불렀다. 파주에 있는 그의 묘는 한삼 조각만 있고 그의 시신은 없었다. 월사 이정구는 이를 애달파하면서 ‘허장(虛葬)’에 대한 애사를 썼다. 이후 1680년 그의 손자 이석구(李碩耉)가 조정에 글을 올려 할아버지의 공적을 널리 알렸고, 이언강(李彦綱)도 이에 부응해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했고 김수항, 민정중 등은 이정구의 시를 증거로 삼아 추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숙종은 정려를 내리고 추증하라고 하교했다. 추증이란 그 대상자가 죽은 후 어떤 공적이나 훌륭한 행적, 후손들의 뛰어난 행적으로 인해 벼슬을 더해주는 일이다. 관직을 새로 더 부여하고 품계도 올려주었다. 이유길은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이 논의가 1680년 12월에 있었고, 실제 교지가 작성된 것은 1681년 2월 14일이었다. 교지 날짜는 ‘강희(康熙) 20년 2월 14일’로 적혀 있다. 영혼까지 세심하게 배려한 정조 아래 교지는 이유길이 병조참판으로 추증될 때 작성된 것이다. 두 교지의 작성 날짜는 동일하다. ‘강희(康熙) 20년 2월 14일’이나 ‘숭정(崇禎) 기원 후 신유(辛酉) 2월 14일’은 서기로 말하자면 1681년 2월 14일(음력)이다. 내용을 보면 거의 동일한 편이다. 왼쪽 교지 내용을 보면 이유길은 통정대부 행 영유현령이었는데 가선대부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오른쪽 교지에는 ‘겸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라는 어휘가 첨가되었다. 날짜의 왼쪽 옆에 추가로 쓴 내용이 조금 다르게 표현되었다. 둘다 똑같은 날에 작성된 것일까. 연호가 달리 표기된 데에는 사정이 있다. 1799년. 정조는 여러 책들을 열람한 후 2월 19일에 하교한다. 알고 보니 김응하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들어간 날짜가 1619년 2월 19일이고 3월 4일에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이 2월 19일’인데 마침 김응하에 대한 정보를 ‘오늘’ 보게 되었다고 하며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했다. 이어 3월 4일에 김응하와 함께 죽었던 이들의 후손들을 찾아 보라고 했다. 비록 김응하와 전사자들에게 직접 은전을 베풀지 못해도 후손들에게 보답하고자 했다. 그런 중에 이유길이 숙종 때에 이미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그 때 교지에 ‘강희(康熙)’라는 연호를 썼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정조는 ‘비록 영혼이 되었어도 강희라는 연호를 썼다는 사실을 알면 절대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숭정’ 연호를 써서 교지를 다시 제작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숙종 때 제작된 교지 내용을 다시 쓰고, ‘동지의금부사사’를 넣었으며, 연호를 ‘숭정(崇禎)’으로 수정하여 기재한 교지가 작성되었다.
강희는 청나라 제4대 황제인 강희제 때 연호로 1662년부터 1722년까지 쓰였다. 숭정은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때 연호이다. 조선은 청을 오랑캐 나라로, 명은 중화문명을 계승한 나라로 여겼다. 중국 영토에서 명과 청이 다툴 때, 조선은 그 사이에서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다. 명과의 신뢰를 지속하기는 해도 청을 소홀히 대할 수 없었다. 문제는 조선의 공식 문서에 어떤 연호를 써야 하는 것이었다. 연호를 쓴다는 것은 연호 제정자를 인정하고 존숭하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숙종 때의 청나라는 이미 제국의 모습을 갖추고 발전해 나아갈 기반이 굳혀져 있었다. 공식 문서에 청 연호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유길을 추증하는 교지에도 강희라는 연호를 썼다. 정조는 다르게 생각했다. 이유길이 심하 전투에 참전했던 때는 명나라가 망하지 않았다. 이유길이 끝까지 싸운 것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서였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 준 명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이유길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조선이 섬겨야 하는 황제 나라, 은혜를 베푼 고마운 나라였다. 반면 청-후금은 적국이고 오랑캐일 따름이었다. 그는 오랑캐를 명의 영토에서 쫓아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웠다. 정조는 이유길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는 의도, 충정을 읽어냈다. 비록 이유길은 죽었지만 그의 영혼의 속내까지 헤아리는 세심한 배려를 베풀었다. 연호, 그 때 그 사람들의 속내 이유길은 순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철종 때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 교지들의 날짜도 ‘숭정’으로 쓰여져 있다. 청의 ‘도광(道光)’ ‘함풍(咸豐)이라는 연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의 연호를 썼다. 순조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잘 이어받은 것이 아닐까.
연호는 시간에 대한 표기이다. 그러나 제정자의 생각과 태도가 스며있다.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연호가 바뀌는 것은 그것이 정치, 사회와 긴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서기라는 연호는 서양 세계가 기독교 중심이었을 때 교황에 의해 시행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까지는 명과 청의 연호를,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연호를 썼다. 해방 직후에는 단기(檀紀)를 썼다. 1948년 ‘대한민국 공용 연호는 단군기원으로 한다.’고 법률로 정함으로써 사용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자 1961년 단기연호 폐지와 서기를 공용 연호로 사용한다는 법령이 정해졌다. 공식적으로 서기 연호를 쓰게 되었고, 지금까지 쓰고 있다.
1859년(철종 10)에 이유길(李有吉) 충의라는 시호를 받은 시호교지(諡號敎旨). 연호는 제정자와 사용자의 생각, 세상에 대한 태도까지 품고 있다. 연호는 그 때 그 사람들의 속내를 은근히 드러내는 표지이다. 무심히 지나쳤을 연호들을 이제라도 톺아보면 어떨까. <도움 받은 글들> 송병선, 『연재집』, <李忠毅公有吉遺墟碑>
이정구, 『월사집』, <李永柔有吉虛葬哀辭> 조두순, 『심암유고』, <永柔縣令贈領議政李公有吉諡狀> 서희경(2022), 「근현대 한국 연호의 변화 양상과 논쟁」, 『한국정치연구』 31(1),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양승태(2002), 「연호와 국가정체성-단기연호 문제의 해명을 위한 정치철학적 논구」, 『한국정치학회보』 35(4), 한국정치학회. 유지원(2007), ‘조선시대 임명관련 교지의 문서형식’, 『고문서연구』 30, 고문서학회.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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