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한호(閒好) 임연(林堜)과 무안 식영정(息營亭) 이야기 게시기간 : 2022-08-3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8-29 17:1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
|||||||||||
한가로움을 좋아하고 일상에서 벗어나 쉬고 싶은 심정이야 누군들 없으랴? 그러나 막상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글을 통해서나마 잠시 그런 삶의 끝을 따라가 보자. 바로 한호 임연(林堜, 1589∼1648, 자는 東野, 호는 夢坡)의 식영정(息營亭)1)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안 식영정은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목포 영산강 하구언에서 영산강 자전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이 나온다. 이곳 일대는 이호(梨湖) 또는 이산진(梨山津) 등으로 불렸다. 이 몽탄의 아름다운 갈대밭이 바라보이는 강가의 높은 절벽 위에 고즈넉한 정자가 있다. 바로 무안의 식영정이다. 한호거사(閒好居士) 임연 식영정은 한호거사 임연이 세웠다. 가승(家乘)의 기록을 보면, “공은 백낙천(白樂天, 居易)과 소자첨(蘇子瞻, 軾, 東坡)의 사람됨을 좋아하여 몽파(夢坡)라 자호했으며 또 소자첨의 문집에서 한호(閒好) 두 글자[二字]를 취해서 스스로 한호옹(閒好翁)이라 했다.”2)
고 되어 있다.
임연은 나주가 본관이며 1589년(선조 22) 7월 26일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행병조정랑(行兵曹正郞), 황해도 관찰사를 거치고 의정부 우찬성에 증직된 임서(林㥠)이다. 청구공(淸臞公) 임담(林墰)이 동생이고,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가 당숙이다. 회진을 본향으로 하는 나주 임씨 가문은 문헌세가라고 불릴 만큼 정계·학계에 굵직한 자취를 남겼다. 그중 임연은 무안 배뫼마을의 입향조로서 식영정을 세워 이곳을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었다.3) 임연은 1610년(광해 2) 22세에 진사시에 합격, 3년 후인 1613년, 25세에 증광시에 합격하였다.4) 벼슬길에 나간 지는 일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다가 광해군 대의 혼탁(溷濁)한 정국을 피해 용퇴하여 한거(閑居)하였다. 고절(高節)이라 불렸다.5) 그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하자 여러 차례 관직에 나아갔다. 승정원[槐院], 봉상시[太常]를 거쳐 공조와 예조의 정랑, 정언, 직강, 지평 등 다양한 직임을 지냈다. 그는 “관직에 몸담고 있음은 마치 새장 속에 갇힌 새와 어찌 다르랴? 오직 아름다운 산수를 얻어 한가롭게 살지 못함이 한이로다”라 하며 한민(閒民)의 삶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나마 무안에 터를 마련하였다. 그후로도 관직 때문에 서울로의 왕래를 멈추지 못했다. 1636년(인조 14) 겨울 이곳에서 신병을 요양하고 있던 중 왕명을 받고 상경하였다. 상경한 지 열흘도 못 되어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성을 지켰다. 그후 형조참의를 거쳐,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에 올랐지만, 9일만에 병으로 그만 두고 돌아와 참다운 한인(閑人)이 되었다. 외직으로는 성현찰방(省峴察訪, 경상도 청도 소재), 영암군수, 진주목사, 원주판관, 남원부사 등을 거쳤다. 1643년(동 21) 경에 배뫼터를 잡아 정착한 기록인 「복거록(卜居錄)」6)을 썼다. 그리고 식영정에서 요양하며 지내다 1648년(동 26) 10월 11일 여생을 마쳤다. 회진에 묻혔다. 만휴당(晩休堂)에서 식영당으로 무안에 옮겨와 살게 된 배경과 정자의 건립 과정 등에 관해서는 임연이 지은 「복거록」』과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식영당기(息營堂記)」7), 그리고 임연의 증손으로 『동사회강(東史會綱)』을 지은 문인 학자인 노촌(老村) 임상덕(林象德, 1683∼1710)의 「양이서산수기(兩梨墅山水記)」(1707)에 잘 나타나 있다.8) 이를 토대로 그 사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복거록」을 보면, 임연은 금강 서쪽 용금봉 아래 소려(小廬, 조그만 오두막)를 지어 만휴당이라 이름하고 수년간 왕래하며 지냈다. 그곳도 아름다웠지만, 지역이 그윽하고 깊지 못하여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 조용히 즐길 바가 못 되었다. 이렇듯 맘에 들지 않아 다시 애써 다른 곳을 찾아 나섰다. 그는 “금강 연안을 따라 위아래로 두루 살펴 찾다가 경오년(1630년, 인조 8) 가을에 드디어 사포와 몽탄 사이에 한 오묘한 곳을 얻었”다. 그곳은 “그윽하여 기운이 머물렀고 물맛이 좋으며 땅은 비옥하여 가히 선비가 살만한 곳”이었고 강과 산, 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하였다. 하지만 땅이 치우쳐 있고 또 멀어 오래도록 황폐해 있었다. 그러자 임연이 손수 개척하여 가시나무를 베고 터를 닦아 수 칸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유거(幽居, 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 곳에 묻혀 삶)의 일이 거칠지만 갖추어지니 또한 쉴만하였다. 이에 식영당이라 이름하였다. 임상덕의 「양이서산수기」에 따르면, 임연이 두 곳에 별서를 지었는데 두 곳의 토명(土名, 지방에서 쓰고 있는 이름)에 모두 ‘배’[梨]라는 이름이 있다고 하였다. 만휴당이 있는 곳은 배포[梨浦]이고 식영당이 있는 곳은 배뫼[梨山]였다. 전자는 백포(白浦)라 하기도 하고 후자는 주산(舟山)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방언의 추이라 하였다. 말하자면 백포도 ‘배포’라 읽고 주산 또한 주가 배의 뜻이니 역시 ‘배뫼’로 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양이서(兩梨墅)’ 즉 ‘배’라는 이름이 붙은 두 개의 별서라는 이름의 기를 지었다. 두 별서 간의 거리는 물길로 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가까운 곳이어서 산과 나무가 서로 바라다보였다고 한다. 한편 임상덕이 「양이서산수기」를 지은 까닭은 두 별서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과 초목을 모두 상세히 묘사하여 훗날 솜씨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글을 보고 그림으로 그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하고자 한 뜻에서였다. 그만큼 두 별서에 대한 애정이 컸고, 이곳을 자신의 뿌리로 여겼다. 다음 장유의 「식영당기」를 보자. 임연이 일찍이 만휴당을 마련하고 장유에게 시와 기를 지어달라 부탁했었다. 장유는 오래도록 미루다가 비로소 당영(堂詠) 16장을 써서 주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식영당을 새로 지었기 때문에 임연은 만휴당영에 감사하며 다시 식영당기를 부탁하였다. 「식영당기」에는 임연의 말을 빌어 만휴당에 이어 식영당을 지은 뜻을 다음과 같이 썼다. 좀 길지만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어 인용한다.
“내[임연]가 만휴당(晚休堂)을 마련했던 것은 대체로 늘그막에 한가히 즐기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그 지역이 그윽하고 깊지 못한 탓으로 시끄럽고 번거롭게 응접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이를 병통으로 여겨 왔다.
그래서 일찍이 금강(錦江)의 하류 현성(縣城)의 동쪽 일대를 물색하다가 마침내 웅숭깊은 곳 하나를 찾아냈는데,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가운데 집자리도 아늑하고 인적도 끊어진 곳이라서 평소의 생각과 얼추 들어맞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언덕을 깎아 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여 집 한 채를 마련한 뒤 그곳에 연못도 파 놓고 나무도 심는 등 한적하게 살 준비를 대충 꾸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 산허리에 있는 벼랑의 바위 사이에다 높직한 위치에서 멀리 굽어볼 수 있도록 몇 칸짜리 정사(精舍)를 일으켜 세우고는 한가롭게 유유자적할 장소로 삼으면서 편액(扁額)을 내걸기를 식영(息營)이라 하였다. 정사에 올라가 바라보노라면, 산으로는 월출(月出)ㆍ승달(僧達)ㆍ은적(銀積) 등이, 그리고 강물로는 몽탄(夢灘)ㆍ화포(花浦)ㆍ남천(南川)ㆍ사천(斜川) 등이 눈앞에 서로들 어우러져 펼쳐지는 가운데 어느 것은 멀찌감치에서 또 어느 것은 가까이 다가오면서 격자창(格子窓) 난간 밖으로 현신(現身)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너무도 즐겁기만 하기에 이런 생각까지도 하였다. 조물자(造物者)가 오래도록 감추어 두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드러내어 나에게 돌려주었으니 선물치고는 엄청난 선물이라고. 이제 진정코 그대[장유]의 글 한 편을 얻어서 문미(門楣)에 걸어 놓기만 한다면, 강산의 승경(勝景)이 이 글 덕분에 더욱 빛나게 될 뿐만이 아니라, 내가 나름대로 지어 붙인 식영(息營)이라는 편액의 의미도 발현(發現)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간곡한 소망이다.” 임연이 만휴당을 버리고 식영당을 새로 지은 배경과 건립과정, 그리고 주변의 뛰어난 경관은 이 글을 통해 충분히 알 수 있겠다. 위 인용문 끝에 보면, “내가 나름대로 지어 붙인 ‘식영(息營)’이라는 편액의 의미도 발현(發現)될 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간곡한 소망이다”라 하였다. 이처럼 식영이란 이름에 임연이 복거하고자 한 뜻을 담아냈다. 그의 호인 한호와도 서로 통한다. 그렇다면 ‘식영’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식영이란 무슨 뜻일까? 장유의 「식영당기」에 그 뜻이 풀이되어 있다. 장유와 임연, 두 사람의 사이는 장유가 “나[장유]와 임군(林君) 동야(東野)[임연]는 어렸을 때 같은 서당에서 글을 배우면서부터 교분을 맺기 시작하였는데,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감괴(甘壞)하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세한(歲寒)으로 서로 기약하는 그런 벗이라고 하겠다.”
라 하는 데서 서로 막역한 관계임을 알 수 있고 그만큼 임연의 뜻을 알고 당기를 지었다. 그 당기에서 “식영(息營)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또한 할 말이 없지 않다. 동야는 꼿꼿한 기질의 소유자로서 세상 사람들이 악착스럽게 쫓아다니는 영리(營利)에 대해서는 한 번도 급급하게 여겨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옛날부터 원래가 그런 일을 추구해 본 적이 없는 터에 지금 와서 또 그만두고 말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라 하였다. 여기서 ‘식영’이 “영리 추구를 그만두다”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동야의 심정이야 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어찌 동야를 놓아주기나 하겠는가. 동야는 조정에 매여 있는 몸이다. 그러나 동야의 마음은 언제이고 식영(息營)에 있기 때문에 내가 정사(精舍)의 기문을 쓰는 기회에 그의 심경까지도 아울러 드러내게 되었다.”
라 하는 데서 역시 쉬고 싶으나 쉬지 못하는 동야의 처지를 위로하였다. 식영당의 역할 식영당의 풍광에 대해 장유는 “대저 회진(會津)으로 말하면 금성(錦城)의 명승지로 일컬어져 오는 곳이다. 그런데 만휴당(晚休堂)이 실로 그 승경을 차지하고서 얼마나 아름다운 임원(林園)과 수죽(水竹)을 과시하고 있는지는 내가 이미 눈으로 확인한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야가 이곳조차 부족하게 여겨 그만 버려둔 채 식영(息營)으로 향했으니, 식영의 경치가 어떠할지는 또한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하겠다.”
라 하였다. 이를 통해 식영당에서 바라본 풍광이 얼마나 승경일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식영당은 이후 강학소요처로 영산강[梨湖]과 그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았다. 그리고 임연의 증손인 노촌 임상덕도 이곳에서 여러 학인들과 교류하였다. 이처럼 대를 이어가면서 나주 임씨 강학교류의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시인묵객이 찾아와 임연과 교류한 문인은 제영[제목을 붙여 읊은 시]이 확인된 경우만도 28인 92편에 이른다. 임상덕의 문집에 식영당을 직접 거론한 것만도 4편이 있다. 이러한 인문적 측면에서 식영정은 영산강 유역의 대표 정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9) 담양의 식영정 한편, 식영정이란 이름으로는 더 유명한 것이 담양에 있다. 무안의 식영정과는 무엇이 같고 다를까? 우리 말로는 같은데 한자는 다르다. 무안은 ‘식영정(息營亭)’이고 담양은 ‘식영정(息影亭)’이다. 다만 그 뜻은 다른 듯 같기도 하다.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이 「식영정기(息影亭記)」를 지었다. 68세 되던 해 7월에 지은 것으로, 그의 사위 김성원(金成遠)이 쉴 곳으로 정자를 지어주자 그에 관해 쓴 기(記)다. 그 글에 따르면 “‘옛날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햇빛 아래에서 도망쳤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더니만, 나무 그늘에 가자 그림자가 돌연 보이지 않았다’라는 장자의 말을 인용하며 ‘흐름을 타면 가고 구덩이를 만나면 그치는데, 가고 그치는 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산림에 들어온 것은 하늘의 뜻이니, 비단 그림자를 쉴 뿐만이 아니라 나는 서늘한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벗이 되어 까마득히 먼 들판에 노닐고 거꾸로 비치는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면 사람들이 보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을 터이니, ‘식영(息影)’으로 이름 지으면 안 되겠는가.’”
라 하여 식영정으로 이름 지었다. 이는 『장자외편(莊子外篇)』 「어부(漁父)」의 ‘외영오적(畏影惡迹)’에 관한 고사에서 비롯된다. 즉 옛날에 자기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여기서 벗어나려고 도망쳤는데, 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가 떨어지지 않자,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다가 마침내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바보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그늘에 가면 그림자가 쉬고, 움직이지 않으면 발자국도 멈춘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일이라 하였다. 여기서 그림자와 발자국은 인간의 욕망을 의미하며, 누구나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그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息影)세계”라 했다. 그러니 그림자를 쉬게 하는 식영이란 “은퇴하여 한가로이 거한다”는 뜻이다. 앞서 식영(息營)이 “영리 추구를 그만두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식영과 서로 통하지 아니한가? 그밖의 정자들
그밖에 무안에는 몇 개의 의미 있는 정자들이 남아 있다. 먼저 화설당(花雪堂)이 유명하다. 화설당은 읍 남쪽 8리 떨어진 곳에 면성(綿城) 유운(柳運, 1580~1643)이 161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다. 수은(睡隱) 강항(姜沆)이 쓴 기문이 남아 있다.10) 기문에 따르면, 무릇 꽃은 항상 화창하고 따스한 봄날에 피고 눈은 항상 찬 겨울에 내리는데, 고운 꽃이 찬 겨울의 눈을 짝하였다는 데서 당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강항이 1612년(광해군 4) 2~3월경의 겨울에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나주목사 박동열(朴東說, 1564~1622)과 함께 당에 올라 보아하니, 매화나무들은 (눈을 맞아) 흰 산을 이루었고 차 나무 한 그루는 붉은 산을 이루었는데, 차는 아우가 되고 매화는 형이 되어 다른 색이 같은 향을 내며 서로 어울려 광채를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에 목사가 당의 이름을 ‘화설’이라 짓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화설당’ 당호의 편액은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썼다. 역시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교류공간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또 무안읍내에 유산정(遊山亭)이 있다. 읍 서쪽 2리쯤 되는 곳에 병산(柄山)이 있고 그 아래에 생선지(生鮮池)라는 연못이 있는데, 면성부원군(綿城府院君) 박문오(朴文晤)가 일찍이 여기서 놀았던 데서 유산(游山)이란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11) 유산정 아래쪽에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2∼1907)이 짓고 박기준(朴淇駿)이 글씨를 쓴 무안 유산정 유적비가 있어 관련 사연을 전해 준다. 비문의 제명은 ‘여조정승 면성부원군 박공휘문오 유산정유적비(麗朝政丞 綿城府院君 朴公諱文晤 遊山亭遺蹟碑)’이다. 1896년(건양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 따르면, 고려 충렬왕 때 박문오가 홍건적을 토평한 공으로 면성부원군의 작위를 받았고 대대로 이곳을 작토(爵土)로 삼았다. 면남으로 호를 지었다. 유산은 그 형승이 좋아 박문오가 만년에 여기에 유산정이란 정자를 지어 휴식처로 삼았다. 그후 병화로 폐허가 되어 버렸는데, 1879년(고종 16)에 군수 홍재정(洪在鼎)의 도움으로 새롭게 고쳐 지었다. 비문에는 이어서 무안 박씨의 분파 양상과 주요 후손들의 발자취를 간추려 적고 있어 유산정이 유서 깊은 장소임을 알게 한다. 『무안현읍지』에는 읍 남쪽 가장자리 20리 떨어진 곳에 비래각(飛來閣)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임상덕의 앞 글에 따르면 “식영당 조금 동쪽은 비래각인데 그 사이에 자죽(紫竹) 수백 포기가 있다”고 되어 있다. 김이만(金履萬, 1683~1758)은 이를 비래정이라 불렀고 임씨의 별서인데 이미 그때 황폐해졌음을 안타까워했다.12) 『광여도』13)에도 비래정으로 나타난다. 임연이 쓴 시가 남아있다. 그밖에 읍 남쪽 가장자리 30리에 취연당(醉蓮堂)도 있었다.14) 선조들의 발자취가 담긴 이런 곳들이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하나의 위안이 되는 곳으로 다시 살아나길 바란다.
1)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식영정보다 식영당(息營堂)으로 더 많이 불렀다. 다만 지금 문화재명이 식영정이기에 이를 대표 명칭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기록에 나타난 대로 그때그때 당 또는 정으로 적었다.
2) 『會津世稿』 중 『閒好遺稿』의 해제(林熒澤 謹識, 1988) 참조. 임연과 임담 두 형제의 문집인 『閒好遺稿』와 『淸臞遺稿』를 『會津世稿』의 일환으로 한 책으로 묶어 여강출판사에서 1989년에 간행하였다. 3) 김희태, 「무안 배뫼의 나주임씨와 식영정(息營亭)」(『남도문화연구』 8, 2002) 참조. 4) 『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 奎106) 참조. 5) 『老村集』 부록, 「老村先生年譜」 6) 「卜居錄」은 『閒好遺稿』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7) 『谿谷先生集』 제8권, 記, 息營堂記 8) 『老村集』 권3, 「兩梨墅山水記」. 이 글에 대하여는 이종묵, 「영산강의 누정 기행 – 나주와 무안 일대를 중심으로」(『문헌과 해석』 통권 제76호, 태학사, 2016.09)를 참고하여 정리하였다. 9) 이에 대한 상세한 사정은 김희태, 앞 글 124~125쪽 참조. 10) 『務安縣邑誌』(규17426) 11) 『務安縣邑誌』(규17426) 12) 이종묵의 앞 글, 27쪽 참조. 13) 『廣輿圖』(古4790-58, 1737년) 14) 『務安縣邑誌』(규17426)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