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신명나는 쇠가락, 깊이 울리는 양북 소리, 농악 게시기간 : 2022-09-06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9-05 11:00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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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여성농악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예고되었다. 여성농악단은 전통시대의 사당패․남사당패의 활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전문연희패다. 1960년대~1970년대에 특히 호남지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이들의 활동은 공연문화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구례 유순자 상쇠의 ‘상쇠놀음’(쇠가락과 부포놀이)은 전문 연희자 특유의 멋과 신명을 보여준다. 설장구의 유점례 명인도 보유자로 인정 예고 되었다. 2022년 7월 21일자.
문화재는 원형보존을 원칙으로 한다고 선언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 탓인지 근대기의 무형민속유산은 문화재 측면에서는 뒤쳐져 있다. 창극 같은 사례가 그렇다. 다행인지 무형문화재 관련해서 ‘전형’의 기준이 도입되면서 더 활발해 지고 있다. 호남여성농악도 몇 번인가 구례 현장을 가고 전문가(이경엽교수, 송기태교수)와 상의를 했지만 무형문화재 차원에서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다만, 1년에 한번씩 문화재청에서 신규종목이나 보유자 공모하는 절차에 따라 자료를 제출하곤 했었다. 이제라도 지정예고 되었으니 반가운 일이다. 유순자명인을 2011년인가 현장에서 뵜는데 오랜만에 전화드리니 반가움이 그득했다. 작년 6월에는 농악 관련하여 또 다른 반가운 소식이 있었다. 전남 무형문화재 제17호 우도농악 대통합 축하연이다. 통합을 넘어 대통합이다. 호남의 양대 가락인 우도농악의 본산이라 할 영광. 처음 지정 당시 보유자 전경환님과 김오채님이 이어 오던 신명나는 쇠가락. 언젠가부터 갈라져 활동하면서 서로 멀어져 가고 합체는 갈수록 어려웠는데 ‘대통합’의 대의를 따른 것이다. 한걸음에 내달아 공연장에서 인간문화재 설장고 김동언님, 상쇠 문한준님, 보존회장 최용님. 사진한장 찰칵.
2019년 11월에는 허전함을 다시 느낀 자리가 있었다. 화순 한천농악 무형문화재 지정 40주년 학술대회. 남도민속학회 주최. 토론자로 나서 지정 이후의 자료에 대해서 몇가지 이야기를 했다. 40주년 기념이니 분명 귀하고 좋은 자리이다. 허전함은 보유자의 전승 관련해서이다. 노판순(성엽)(1919~1992), 전전박(복일)(1932~1995), 노승대(1995~2015)보유자로 이어지다가 전수교육조교 박춘백 상쇠의 보유자 인정을 논의하던 중 2017년 유명을 달리 하였던 것.
전남의 농악은 구례 잔수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 화순 한천농악, 우도농악, 고흥 월포농악, 곡성 죽동농악, 진도 소포 걸군농악, 완도 장좌리 당굿이 전라남도 무형문화재이다. 광산농악은 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이다. 전북의 이리농악, 임실필봉농악, 남원농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정읍·김제·고창·익산성당포구·진안평중농악은 전북 무형문화재이다.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농악 관련 옛 자료를 하나 더 들춘다. ‘農樂’이란 용어에 관해서이다. 보통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일종의 조어 형식으로 만들어 쓴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래서 한때는 ‘농악(農樂)’을 ‘풍물(風物)’로 바꿔써야 한다는 논의까지 있었다. 말하자면 문화재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흥 선비 남파 안유신(南坡 安由愼, 1580~1657)의 문집에서 ‘農樂’ 용어가 들어간 시를 찾은 것이다. ‘流頭觀農樂’ 유두절에 농악을 관람하다(流頭觀農樂)
우뚝 선 한 깃발에 동풍이 휘몰아 불 때 匆旗一建颺東風 너른 들에 북 치며 색동옷 입고 너울너울 擊鼓郊原舞綵童 변방 일 이미 평안하고 농사철 빨라지니 邊事已平農事早 나랏님의 크나 큰 덕을 비로소 깨달았네 始覺吾君聖德鴻
격고(擊鼓)과 채동(綵童)이란 말에서 신나게 북을 치는 모습과 색옷을 입고 춤을 추는 농악의 모습이 연상된다. 들판에 세워진 깃발이 동풍이 휘날리고, 색옷 입은 무동이 북을 치면 흥겹게 뛰노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農樂’이란 용어의 나이를 훌적 350여년 앞당긴 것이다. 이어서 몇가지 더 찾았다. 구리나발은 처음에 장하게 뿜어내고
행군하는 깃발은 상대하여 벌려 펄럭이네 쌍징의 울림은 절도 있고 양북의 소리는 깊이 울리네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 명절에 동네 잔치를 열 때면 늘 함께 하는 것이 농악이다.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농악은 우리와 뗄 수 없는 생활민속유산이다. 음악인가 하면 놀이이고, 그런가 하면 연극 요소도 있다. 제의와 무용도 곁들어 있다. 말 그대로 종합예술이다. ‘농악’이란 한마디로 ‘농민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풍농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기 위해 행하는 제반 문화 현상’인 것이다. 저 시(詩)도, 여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농악 풍물패의 한 모습이다. 나발을 길고 씩씩하게 불어 대면서 농악대의 시작을 알린다. 행군하는 농악대의 깃발은 바람에 펄럭인다. 쌍징과 양북, 농악대의 필수 구성요소이다. 물론 신명나는 쇠가락, 상쇠가 이끌고 있을 것이다. 이 시는 김제가 낳은 근대기의 큰 학자로 거질의 문집을 남긴 석정 이정직선생(1841~1910)이 지은 ‘농악(農樂)’ 이란 제목의 한시 한 구절이다. 이석정이 1910년에 별세했으니, 최소한 이 글은 1910년 이전, 그러니까 조선시대의 마지막 시기에 ‘농악(農樂)’ 용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나발 불고 깃발 펄럭이고 - 농기, 용기, 덕석기 이 시를 보면 나발을 불고 깃발을 펄럭이는 장면이 처음에 묘사된다. 농악패의 깃발은 농기(農旗)와 영기가 기본인데, 이를 말함이다. 용(龍)을 그려 넣은 용기(龍旗)를 편성하는 곳도 있다는데 이와도 연관될 수도 있겠다. 지역에 따라서는 ‘덕석기’라고도 한다. 그리고 참여한 농정들의 통제는 군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흥이 나서 제멋대로 인듯 싶지만 상쇠의 지휘아래 ‘오방진’과 같은 진놀이를 척척 해 내는 모습.
이사(里社)’와 ‘김매기’를 말하는 대목에서는 농악의 전래적인 한 모습인 두레농악의 현장을 볼 수 있다. 농악은 여러 갈래로 나누지만, 보통 농민들의 공동체 노동과 관련되는 두레농악, 민간 고유의 축원농악, 재승(才僧)들이 참여하는 걸립농악, 전문 예인 집단의 연예농악으로 구분한다. 물론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한다. 농사판에서 노동의 수고를 덜면서 능률을 높이고 한편으로 함께 어울려 술과 음식을 나누는 것. 농악 본연의 모습이리라. 하여 이 시에서도 ‘질그릇 동이에는 탁주 넘치고’, ‘먹고 마시며 밭 두둑에서 쉬니’라 했다.
그리고 징과 북 등이 ‘처음에는 느리게 시작했다가 점점 번잡하고 어지럽게 펼쳐지고’, ‘흥이 오르면서 덩실 덩실 춤추고 머리와 발이 응하는’ 신명나는 놀이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양북은 우도농악 판굿 구정놀이의 북놀이를 연상시킨다. 우도 농악에서는 보통 치배(잽이)의 편성이 쇠 4, 징 2, 장구 5~6, 북 2인인데, ‘쌍징’과 ‘양북’이라 했으니 치배의 편성까지도 볼 수 있다. ‘빙빙 돌아 어지러이 서로 향하네’라는 구절에서는 소고잽이 가운데 채상소고를 쓰고 상모놀이를 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징, 북과 함께 구리나발과 대사라 풍물도 보인다. 나발은 구리로 만든 두 자 길이의 나발을 말한다. 우도농악 치배 구성에 나발과 새납이 있는데, 구리나발의 긴 울림으로 시작하는 농악패의 모습이다. 구리나발은 고구려 고분 안악 제3호분 벽화에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성을 갖고 있다. 먹고 마시며 밭 두둑에서 쉬니 이 시에는 또한 장장, 쟁쟁, 감감, 전전 등 쇠가락과 부가락 구음이 등장하고, 여러 악기 소리가 자연스레 어울리고 멀리 진동하는 쟁소리에 합해져 가락을 이룬다는 표현도 보인다. 몸짓과 소리를 구음으로 표현하여 대대손손 전승해 왔던 우리 무형민속유산의 한 모습이 한시로 표현된 것이다. 그러기에 ‘율려(律呂) 분변할 줄 모를뿐 아니라’, ‘궁각(弓角) 있는 줄 어찌 알리오’ 했다. 정형화된 음악이나 음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지만, 신명이 나고 그렇지만 잘 전승되어온 다는 말일게다. 이처럼 이석정의 한시 ‘농악’은 전래적인 두레 농악 현장의 연행 장면을 섬세하게 인지하여 문학작품으로 형상화 했다. 악기를 연주하는 치배(잽이)와 여러 종류의 분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흥을 돋우는 잡색(뒷치배), 그리고 각종 깃발을 드는 기수(旗手)의 모습, 그러면서도 ‘나누어진 행렬 섞이어 얽히는법 없는’ 신명의 현장을 그림 그리듯 읊고 있다. 또한 ‘먹고 마시며 밭 두둑에서 쉬니’, ‘질그릇 동이에 탁주가 넘치고’, ‘주고 양보하고 더욱 순박하네.’ 라 하여 격양(擊壤)의 정경도 읽을 수 있다.
참고문헌 김제문화원, 『석정 이정직 유저(石亭李定稷遺著)』(Ⅳ)-향토문화자료-제20호-, 2001.
김정헌, 「‘농악(農樂)’과 ‘풍물(風物)’의 타당성 검토와 ‘농악(農樂)’ 비판에 대한 반론」, 『문화재』42-4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김희태, 「고전 용어 “농악(農樂)”과 석정 이정직의 한시(漢詩) “농악(農樂)”」, 『성산문화』24, 김제문화원, 2012. 이경엽·김혜정·송기태, 『유순자 상쇠와 호남여성농악』, 심미안, 2012. 이경엽, 「농악이란 무엇인가」, 『농악, 인류의 신명이 되다』, 국립문형유산원·문화재청, 2014.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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