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임진왜란 화순 의병장, 의병을 일으킬 때의 생각은?_구희의 소회시 게시기간 : 2022-09-1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9-14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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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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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희가 지은 소회시 이 시는 구희(1552~1593)가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여하며 생각을 적은 작품이다.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구희의 입장이 되어 다시 서술해본다. 우리 임금님이 생각하신 큰 도를 알기 어렵지 않으니, 백성들은 지금 나라에 충성해 난리를 구제해야 한다. 부채에 남겨진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품으니 신령스러운 바람이 한바탕 나를 향해 부는구나.
시 1구에서 말한 ‘우리 왕’은 물론 선조(宣祖)를 말하는 것이니, 그 왕이 분명 ‘큰 도’를 지니고 있다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잠깐 ‘큰 도’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보았다. 곧, ‘큰 도’란 임진년에 왜군이 우리 강토를 침략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나라를 위란(危亂)에서 구제할 방법을 뜻한다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왕은 큰 도를 지니고 있으니, 백성들은 이러한 위급한 때에 나라에 충성해 난리를 구제해야 한다. 시 2구의 언급은 바로 구희가 의병에 참여한 명분이 되기도 한다. 구희는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난리를 구제하기 위해 직접 의병에 참여한 것이다. 의병에 참여하게 된 구희는 3구에서 “부채에 새겨진 유훈 가슴 속에 품었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무슨 부채인가? 그리고 유훈이라니……. 부채는 여름철 날씨가 더울 때 시원하게 할 목적으로 쓰는 도구 중 하나이다. 그러나 구희가 시에서 말한 부채는 그런 보통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특별한 무엇이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 경상도 진주군 성 밖에 김춘룡(金春龍)이라는 한량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김춘룡이 진주 남강 가에 있는 선산에 성묘를 하러 갔다가 노란색 자라 한 쌍이 머리에 부채를 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 부채를 얻었는데, 거기에 ‘구희 청풍의 부채〔具喜淸風之柄扇〕’라는 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당시 거기에 김춘룡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농부와 빨래하는 아낙 등 수십 명이 있었는데, 그 부채가 무슨 부채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들 중에 한 노인이 그 부채를 임진왜란 때 남강에 투신한 사람과 연관 지어 말했고, ‘구희 청풍의 부채’라 새겨진 것을 통해 부채의 원래 주인이 구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자손이 능성(綾城, 전남 화순의 옛 이름)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김춘룡이 직접 그 부채를 행장에 넣어 구희의 외생(外甥) 최호(崔鎬)를 찾아간다. 김춘룡은 최호에게 “능성에 구공(具公)이 있는가?”를 묻고, 이어 부채의 유래도 묻는다. 아마도 갑자기 부채 이야기를 꺼내니 최호 입장에선 어안이 벙벙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호는 부채의 유래에 대해 “어느 해 3월 16일에 공(公, 구희 지칭)이 『대학』 한 부를 청계정사(淸溪精舍)에서 읽다가 그만 피곤하여 한참동안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공의 할아버지 오봉(鰲峰) 구두남(具斗南)이 꿈에 나타나 부채 하나를 주었습니다.”라고 담담히 말을 하였다. 이렇듯 부채 유래 이야기를 들은 김춘룡은 그때서야 행장에서 ‘구희 청풍의 부채’라 새겨진 부채를 꺼내 최호에게 보여주었다. 이상 김춘룡이 ‘구희 청풍의 부채’를 얻은 이야기는 『청계집』 권2에 실린 「득유병선문답(得遺柄扇問答)」에 자세히 나온다. 최호가 말한 부채의 유래를 듣고 나니, 구희가 왜 그토록 의병에 참여하며 부채를 중시해 가슴 속에 품었는지 알 수 있다. 구희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주신 부채를 얻고 나서 상당한 감명을 받았음에 분명하다. 때문에 그 부채에 ‘구희 청풍의 부채’라 새기고 마치 할아버지의 가르침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늘 간직하고 다녔으며, 의병에 참여할 때도 당연히 가슴에 품었던 것이다.
2. 구희, 금산전투에 참전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죽다 구희의 자는 신숙(愼叔)이요, 본관은 능성(綾城)이며, 호는 청계(淸溪)이다. 부친의 이름은 구현경(具玄慶)이며, 능성 교동(校洞) 집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주정씨(羅州鄭氏) 희영(希英)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구희는 어려서부터 착한 행실을 지니고 부모를 섬기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칭찬을 하였다. 20세 즈음에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 들어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을 쏟았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전통 시대 학문은 위기지학과 위인지학(爲人之學) 두 가지 방법으로 나뉜다. 그중에 전자는 자기 자신의 인격 수양을 위한 학문을 말하고, 후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학문, 즉 과거시험이 그 대표적 사례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구희가 위기지학에 힘을 쏟았다는 것은 과거시험에 그리 크게 연연해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구희는 지용(智勇)을 겸비하여 틈틈이 무경(武經)을 익혔다. ‘무경’이란 병법(兵法)에 대한 글이나 책을 말한다. 다시 말해 구희는 학문을 하는 중에도 병법과 관련한 글과 책을 읽어 지기(志氣)의 뛰어남을 드러내었다. 사람 됨됨이 또한 출중하여 형과 우애가 좋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특별하여 부친상을 당했을 때 3년 동안 늘 변하지 않은 마음을 간직하였다. 그러던 중에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이때 구희의 나이 41세였다. 당시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구희는 직접 의병에 참여할 뿐 아니라 쌀 1백여 석을 군량미로 내놓는다. 그리고 고경명을 따라 금산전투에 참여하는데, 이때 앞에서 이미 언급한 부채를 가슴에 품고 전쟁터로 들어간다. 그러나 왜군을 맞서 싸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의병장 고경명이 죽고, 월파(月波) 유팽로(柳彭老)ㆍ청계(淸溪) 안영(安瑛) 등이 그 뒤를 죽음에 이르렀다. 이때 구희는 함께 죽음에 이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전세(戰勢)는 불리했으나 낙담할 틈도 없이 다시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를 보좌해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황간ㆍ영동ㆍ금산ㆍ무주 등지에서 왜군에 맞서 싸웠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가슴 속에 부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어 이듬해 1593년에 이르러 구희는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 싸움에 참여한다. 이때 함께 참전했던 주요 사람들로는 김천일(金千鎰)ㆍ복수장(復讐將) 고종후(高從厚)ㆍ충청 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ㆍ사천 현감 장윤(張潤)ㆍ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ㆍ해미 현감 정명세(鄭名世) 등이었다. 그런데 6월 29일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ㆍ문홍헌(文弘獻)과 함께 강물에 그만 투신자살하였다. 구희는 강물에 빠질 때 왼손에 부채,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또한 구희는 죽기 직전에 고향에 계신 노모(老母)와 형, 자식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시를 지어 최홍우(崔弘宇) 편에 보낸다. 그리고 남강에 투신하여 죽음에 이르렀다. 최경회를 작은아버지로 둔 최홍우는 진주성 싸움에서 빠져나온 사람 중 한 사람이다. 최홍우는 구희가 써준 편지와 시 등을 고향에 계신 노모와 형, 자식들에게 무사히 전달했을 것인데, 이로써 구희가 순절하기 직전에 쓴 시가 현재 문집에 2제 3수가 전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 「순절할 때 손가락에 피를 내어 써서 노모께 시를 지어 부치다〔殉節時 血指書 寄呈老母〕」 시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죽음 직전에 쓴 시이기 때문에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죽음에 이른 상황에서 고향에 계신 노모께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 중인데, 어떻게 할 방법은 없고……. 그래서 구희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그것으로 시를 쓴 것이다. 작품에 그대로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마도 가슴으로 울면서 시를 적었을 것이다. 3구와 4구에서 말한 ‘서리’와 ‘바람 안개’는 당시 구희의 심정을 대변한 시어(詩語)들이라 말할 수 있다. 6월 29일인데, 어떻게 서리가 내릴 수 있었겠는가? 마음이 그 정도로 스산하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일편단심의 마음가짐으로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 빠지자 전쟁터에 직접 참여했는데, 이제 죽음에 이른 상황이 되었으니 만감이 교차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7구에서 “일 닥치니 어찌해야 할는지요”라고 노모께 묻는다. 또한 자식의 입장에서 노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다는 것은 어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지막 8구에서 “이 저승에서 품행 닦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여 노모를 안심시켰다.
3. 구희가 남긴 임진왜란 관련 시의 의의는? 구희는 나라에 대한 충심(忠心)과 부모에 대한 효심(孝心)이 남달랐다. 이는 시 작품 「충효음〔忠孝吟〕」 “어버이 사랑은 양지를 해야만 하고, 나라 위한 마음은 충성이 제일이라. 충심ㆍ효심은 본래 성에서 나왔으니, 사람은 본래 성을 향해 가야 한다.〔愛親宜養志 爲國莫如忠 忠孝本於性 秉彝人所向〕”라는 내용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즉, 구희는 집안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과 우애가 좋았으며, 나라에 대한 충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학문을 연마하는 틈틈이 병법을 익혀 싸움의 기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경명이 의병을 모집할 때 선뜻 거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또한 구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시 짓는 것을 즐겨했다. 그렇게 보는 까닭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쟁터에서조차 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지은 시를 흔히 ‘진중시(陣中詩)’라 하는데, 구희는 이러한 시를 여러 편 남겼다. 그 시 제목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금산 진중에서 꿈을 적다〔錦山陣中 記夢〕」, 「순절할 때 손가락에 피를 내어 써서 노모께 시를 지어 부치다〔殉節時 血指書 寄呈老母〕」, 「남강에서 순절할 때 시를 읊다 두 수〔南江殉節時吟 二首〕」, 「임진년 봄날에 뜰의 해바라기를 보고 느낌이 일어〔壬辰春日 看庭葵 感懷〕」, 「창의할 때 시를 읊다〔倡義時吟〕」, 「의병을 일으켜 떠도는 날에 친구와 이별하며〔起義旅日 別故人〕」, 「의병을 일으킬 때 생각을 적다〔擧義時 述懷〕」, 「고제봉이 의를 지키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탄식하며〔聞高霽峰殉義 不勝歎嗟〕」, 「금산 전장 달밤에 고향을 생각하며〔錦山戰場月夜 憶故鄕〕」, 「진중 달밤에 시를 읊다〔陣中月夜吟〕」, 「진주 진중에서 시첩ㆍ아기살을 만들어 사례하다〔晉州陣中 作詩貼片箭 答謝〕」, 「의병을 일으킬 때 시를 읊다〔擧義時吟〕」, 「금산 진중 밤에 소쩍새 소리를 듣고〔錦山陣中夜 聞杜鵑〕」
구희는 이상과 같이 총 13제 14수의 진중시를 남겼다. 작품의 수준은 둘째 치고 우선 작품 수는 다른 어떤 사람도 능가한다. 이러한 작품 수만 두고 보더라도 그 의의는 크다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시는 앞으로 호남의 정체성을 밝히는 중요 핵심어로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참고 자료> 구 희, 『청계집』
김동수 교감ㆍ역주,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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