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1914년과 1938년 사진으로 읽는 민속무형유산, 강강술래 게시기간 : 2022-09-21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9-20 09: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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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진도 강강술래, 가장 오래된 사진 기와집이 뒤로 보이는 마당에서 하는 강강술래. 자세히 보니 왼쪽에 글씨가 보이는데 촬영일자와 장소, 명칭이다. 180도 회전(반전)을 하니 뚜렷하게 읽을 수 있었다. 1914년 6월 18일. 음력으로 보면 5월 25일이다. 목요일. 음력 5월에는 5일이 단오이며 중기인 하지와 절기인 망종 또는 소서가 들어있다. 악월(惡月) 또는 고월(皐月)이라고도 한다. 1914년은 5월 윤달이 든 해이다. 저 사진을 찍고 일주일 지나서 6월 24일에 윤 5월 1일이 시작된다. 大正三,六.十八. 珍島邑 カニガニスレ 1914년 6월 18일 진도읍 강강수레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강강술래 사진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시절의 유리건판 사진.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 1870~1953)가 조사한 자료이다. 촬영장소로 “진도읍(珍島邑)”이 표기되었다. 현재의 “진도읍”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 “읍(邑)”은 읍성(邑城)이나 읍치(邑治) 같이 읍=고을을 뜻한다. 사진찍을 무렵 지금위 진도읍은 부내면이라 하였다. 1917년 진도면으로 개칭하고 1979년에 진도읍으로 승격한다. 1979년 처음 들어선 행정지명인 “진도읍”과 1914년 사진 상의 “진도읍”은 구분해 살필 필요가 있다. 도리이 류조는 인류학·선사학 조사를 목적으로 1914년 6월 15일에서 19일 사이 진도를 방문하였다. 조선반도 유사이전(有史以前)의 인종과 문화 조사 일환이었다. 사진 촬영기사 사와 슌이치(澤俊一)가 함께 하였다.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업 사료조사 제4차였다. 당시 조사는 조선총독부 학무국 고적조사과에서 주관하였다. 진도에서 찍은 사진 17장이 전한다. 여자 체격측정(2장), 남자 체격측정(2장), 강강술래, 제공소(祭供所), 십일장 모내기, 금골산 오층석탑 원경(이상 각 1장), 십일장 지석묘(2장), 진도읍부근 지석묘(7장) 등이다. 진도를 조사한 4차 조사는 4월 14일 경성을 출발하여 대구, 경주, 포항, 광주(5.12), 진도(5.16), 제주(5.18), 해남(6.12), 진도(6.15), 완도(6.20), 여수(7.2), 순천(7.4), 구례(7.4), 보성(7.9), 장흥(7.12), 강진(7.13), 해남(7.16), 나주(7.20), 화순(7.10)의 일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지방국 제1과의 사업으로 실시된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1910~1913년 고건축·고적 조사와 학무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1911~1916년 인류학·선사학 조사를 통합하여 1916년 4월 총무국으로 이관하고,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주관하도록 조치하였다. 도리이 류조는 1911년부터 1923년까지 9회에 걸친 조사에서 모두 3,777매의 유리건판을 촬영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38,000여장의 유리건판 가운데 10%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カニガニスレ”는 “강강수레”로 읽으면 어쩔까 싶다. 앞 부분 “カニ”의 경우 “캉” 음이 나는데, 첫 글자로 오면 “강”으로 발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사진을 소개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공개 누리집 설명문에는 “강강수월래” 적고 있지만, 1914년 당시 조사팀은 “강강술레”로 들었던 것이 아닐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강강수월래”와 “강강술래” 표기는 중첩적이다. 국립중앙도서관 누리집에서 “강강술래”로 검색되는 자료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 저작물은 1967년이다. “강강수월래”는 1930년이다. 1949년 호남신문 기사에는 "강강수월래" 가사(歌詞) 통일안을 전남 공보과(全南公報課)에서 제정 발표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1966년 국가무형문화재 종목 지정 명칭은 “강강술래”이다.
건물을 보자. 맞배지붕이 잇대어 있다. 우선 용마루에 적새 3단(암기와 3장 적층)이나 막새나 망와 등이 보이지 않는다. 관아의 권위를 의미하는 건축 부재인데 보이지 않으니 민가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 민가로 보기에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보이는 방향으로 오른쪽 삼칸 건물은 한쪽이 드나드는 문 구실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대문채로 보기도 애매하다. 원래는 있었는데 없어진 것일까. 혹시 집 안에 있는 중문으로 보아야 할까. 오른쪽 문 건너에서 여러 명이 강강술래 현장을 주시하고 있다. 총각들도 있을 것 같다. 가운데 칸은 판장으로 가렸다. 왼쪽 칸은 조그만 창문이 있다. 어쩌면 가운데 칸은 헛간이고 창문있는 그 방은 마당쇠가 있을 것 같다. 왼쪽 칸은 판장문이 있다. 부엌일까. 그런데 문 자체가 상당히 높아서 부엌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도 같다. 직접 출입하기는 너무 높다는 것. 계단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바깥쪽으로 출입문이 있었을 것 같다. 돌담은 담쟁이로 덮였다. 6월이니 녹음방초 한창일 거다. 지붕 너머로 제법 큰 나무들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면 어쩌면 개인 민가는 아닐 듯 하다. 왼쪽에 건물 지붕이 조금 보인다. 우진각 지붕일까, 팔작 지붕일까. 정면을 향하고 있는 사람이 그 중 설소리꾼인 것 같다. 그 뒤에 한사람은 몸은 보이지 않지만 왼쪽으로 발을 딛고 있다. 환하게 웃으면서 신나게 즐기는 모습도 보인다. 남도 민속의 “신명”과 “흥”, 말 그대로이다. 1938년 장흥 원도리 당산나무와 강강술래 1938년 5월 송석하선생이 조사한 민속현장, 장흥 원도리의 강강술래 사진이다.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 1구 원도마을. 2021년 8월 찾아가 보니 사진속의 당산나무는 그대로 있었다. 건너에는 고층 아파트 숲이 들어섰다. 저 사진은 1938년 7월 12일자 조선일보에 실려 있다. 송석하의 ‘향토문화를 찾아서’ 장흥 기사 가운데 다섯 번째 “民俗의 가지가지”편의 설명이다. 舞踊 유독히 장흥 뿐만 아니라 순천, 보성, 해남, 완도, 진도 등의 해안지방 일대에 정월 上元의 저녁이나 8월 추석의 밤에 젊은 부녀자의 民俗圓舞인 ‘강강수월래’가 있는 것은 전에 소개한바 누차 있거니와 강강수월래는 한자로 ‘强羌水越來’라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이는 附會를 위한 附會에 지나지 못하고 舞踊學上이나 민요 발달의 자취로 보아서는 반드시 수백년 전의 것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고대인 古舞踊 형태의 하나라고 斷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용에 수반되는 민요의 곡조는 그간 불명하였으나 이제 실제로 조사하여 본 즉 진양조가 주가 되고 그 다음 점차로 急調로 급템포로 변하는 것이다. 무용은 비교적 심플하나 그 반면에 소박한 맛은 나쁘게 세련된 것 보다는 수배 優雅하다고 하겠다.(사진)
지금은 ‘강강술래’를 주로 쓰고 있지만 저 때는 ‘강강수월래’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자 표기 ‘强羌水越來’는 부회를 위한 부회(附會)라 언급하고 있다.
원도리 현장을 찾은 것은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을 보고서이다. 진도 출신으로 가무악의 완성자라 할 무송 박병천(1932~2007)의 일생을 시대사와 사회사정을 함께 버무려 썼다. 당시 편집인(김태영님)에게 가객(歌客) 박덕인(朴德寅) 관련된 『은파유필』의 이미지 파일을 제공하였다. 『은파유필』은 무정 정만조(1858~1936)가 진도 유배기간 중 전반기(1896~1899)에 기록한 생활문화현장의 시집이다. 정만조가 "가객 박덕인에게 주다[贈歌者朴德寅]"라는 시 제목 옆에 세주를 기록했다. 유배객이 받은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가객의 나이는 70여 세로 모든 가곡의 고상함과 속됨, 맑음과 탁함, 느림과 빠름, 슬픔과 기쁨을 최고로 잘 하였다. 그것을 폐한지 20여 년이 지났으나 나를 위해 비로소 펼친다고 하였다. 또 춤을 잘 추었는데, 가야금 및 퉁소를 부는 것보다 더 잘하였다.[歌者 年七十餘 凡歌曲 雅俗淸濁緩促哀愉無不極善 廢之二十年餘 爲余始發云 又能舞 尤工於伽倻琴及吹簫笛] 박덕인은 대금산조의 창시자로 알려진 명인 박종기(1880~1947)의 부친이다. 박종기의 형님 박종현의 손자가 박병천이다. 국악명가로 내림이 있다. 『인간, 문화재 무송 박병천』에는 강강술래를 설명하면서 “장흥 지도리”로 표기하고 있다. 강강술래가 진도와 해남 일원만이 아니라 육지부 등 여러 곳에서 행해졌던 민속놀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지도리”는 어진 낯설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된 송석하의 조사자료를 보니 “장흥면 지도리”라 되어 있다. 자세히 보니 조사카드에 “元道里”로 표기했는데 약간 흘림체라 “元”을 “之”로 보고 이를 한글로 "지"로 표기해 버린 것 같다.
무정 정만조의 『은파유필』에는 강강술래를 보고 지은 시가 있다. 강강술래 관련해서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1914년 진도 사진은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1938년 장흥 사진은 내륙에서도 성행된 민속놀이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1966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승지역은 해남과 진도이다. 2009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도움되는 자료 - 장흥문화원, 『長興 地理志·邑誌모음』-향토자료총서 제1집-, 1992.
- 장흥문화원, 「70년전의 長興의 文化遺蹟과 民俗 현장-1938년, 장흥 향토문화를 찾아서-(송석하)」, 『장흥문화』, 장흥문화원, 2010. - 국립민속박물관, 『송석하 -한국민속의 재음미 上·下-』, 2004. - 윤여정, 『대한민국행정지명1』-전남·광주편-, 향지사, 2009. - 박명희·김희태 역해, 『은파유필(恩波濡筆)』(정만조 저), 진도문화원, 도서출판 온샘, 2020. - 이치헌 글, 김태영 기획·편집, 『인간문화재 무송 박병천』, 문보재, 2021.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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