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백화정(百花亭)에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만나다. 게시기간 : 2022-09-2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9-20 10:4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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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김씨(蔚山 金氏)의 장성 맥동마을 입향 울산김씨는 신라 56대 경순왕과 죽방부인 사이의 둘째 왕자인 학성부원군 김덕지를 시조로 모신다. 그가 학성(울산)을 식읍으로 받았다. 김덕지는 935년(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위하려 하자 형인 마의태자와 함께 이를 극력 반대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 마의태자와 함께 개골산(皆骨山 : 금강산의 겨울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 이후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어 승명을 범공이라 하고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도(道)를 닦으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다고 한다. 14세손 김환(金環)이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때 삼중대광 광록대부 영도첨의사에 이르고 문숙의 시호를 하사 받고 학성군에 봉해졌다. 따라서 후손들이 김환을 중시조로 삼고 학성의 개칭인 울산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17세손 김온(金穩)은 김인후의 현조부이다.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흥려군에 봉해지고 양주 목사로 재임하다 1413년(태종 13) 태종의 외척세력 척결로 민무구·민무질과 함께 졸하였다, 배위 정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한성판윤 민량(閔亮)의 딸로, 태종 이방원의 왕후 원경왕후와 종자매(從姉妹)인데, 친가가 피화(被禍)를 입자 아들 세 형제를 비롯한 식솔들을 데리고 낙남(落南)하여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리에 새 터를 잡았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탄생과 관직생활 1510년 장성현 대맥동리에서 김인후는 아버지 의릉참봉(義陵參奉) 김령(金齡)과 어머니 안음훈도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모재는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1528년(중종 23)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고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33년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李滉)을 만나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6월에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진하여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로 억울하게 죽은 조광조의 복권을 발의했다. 당시엔 그런 논의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그러나 김인후는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사림의 무죄를 주장해 한 시대의 도덕과 정론을 바로 세웠다.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 같은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하며 연로하신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 겨울 12월 고향과 가까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1544년 중종이 승하하자, 이듬해 5월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다. 1545년 7월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발작하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난산(卵山)에서의 통곡 1545년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난산의 통곡대 난산(卵山)은 맥동마을 앞 조그마한 동산이다. 그곳에서의 통곡은 김인후를 다시는 정치에 가담하지 못하게 했고 또 평생동안 인종을 그리워하며 도학을 닦으며 자연과 어울리는 삶을 살게 하였다. 훈몽재(訓蒙齋)에서의 강학 1548년(명종 3년) 문정왕후를 위시한 집권 세력이 을사사화를 이르키자 이를 피해 처의 고향인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 백방산 자락에 은거하여 초당(草堂)을 짓고 편액을 훈몽이라 걸고 강학과 유유자적한 나날을 보냈다. 훈몽재에서 남쪽으로 400미터쯤 가면 동쪽 추령천 위에 수십 인이 앉을 만 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이곳에서 제자 고암 양자징을 비롯한 월계 조희문·호암 변성온·금강 기효간·영웅 이지남 등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대학(大學)』을 강의하였는데,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컫는다. 훗날 송강 정철이 이곳 바위에 『大學巖』이라 각자하였다고 한다. 1549년(명종 4년)에 순창 훈몽재에서 대학강의발(大學講義跋)과 천명도(天命圖)를 그렸다. 천인(天人) 관계를 도해한 천명도는 정지운(鄭之雲)이 그린 것인데, 김인후가 이를 대폭 보완 수정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쳤다. 이황도 그 논의에 적극 참여했다.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사칠논변(四七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맥동본가(麥洞本家)에서의 강학 1550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맥동본가(麥洞本家)로 돌아온 후 10년 동안 오로지 학문에 전심하였다. 노수진(盧守愼, 1515~1590), 이항(李恒, 1499~1576),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의 강론(講論)과 질정(質正) 그리고 김인후의 심오한 도학(道學)을 집약한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의 저술이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평천장(平泉莊) 원림을 본떠 만든 백화정(百花亭) 중국 당나라 이덕유(李德裕)는 낙양에 평천장(平泉莊)이라는 별장을 만들었는데, 평천장은 중국과 한국 정원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백화정 백화정은 1552년 건립된 김인후의 외헌(外軒)이다. 일찍이 한양에서 벼슬을 할 때 중국 당나라 이덕유의 평천장에 영향을 받아 한양 동쪽 근교에 평천장 원림을 만든바 있어서 백가지 꽃이 피는 백화정도 잘 만들었다. 이곳에서 거처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며 말년을 보냈다. 1560년(명종 15) 음력 1월 15일 보름날에 자녀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다운 굳은 절개와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 16일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지 15년여 만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 백화정 뜰에 서면 자연가 들리는 듯 푸른빛의 대나무 숲으로 둘러쌓인 백화정 뜰에 서면 한 눈에 들어오는 마을 전경과 넓은 앞들, 건너편 난산정의 풍치에 시야가 트인다. 김인후는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하며 시와 술을 벗 삼아 유유자적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들린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잠시… 불손한 몸과 마음으로 이곳에 서 있는 소인(小人)이 부끄럽다. 인종의 승하를 슬퍼하며 산수에 묻혔던 김인후의 절의가 숨쉬고, 「자연가(自然歌)」가 들리는 듯하다. 청산(靑山)도 절로절로 녹수(綠水)도 절로절로
산(山) 절로 수(水)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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