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명문(明文)으로 아내의 죽음을 해명하다 게시기간 : 2022-10-12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2-10-11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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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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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연으로 남은 재혼 윤안중은 며칠 째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 중이었다.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내 이씨가 죽었다. 이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설마 아내가 자진(自盡)하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아내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이 잠자코 있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의 결혼 생활을 되돌이켜 보았다. 그리고 만력 38년(1610년) 2월 12일. 윤안중(尹安中)은 네 자녀에게 글을 남겼다. 그의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그 글은 편지도 유서도 아니었다. 명문(明文)이었다. 조선시대 문서 중 ‘명문(明文)’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매매와 같은 거래 행위에서 작성되어 서로 주고 받았던 문서였다. 문서 첫 구절에 ‘00에게 주는 명문’이라거나 ‘00전(前) 명문’ 즉 ‘00 앞으로 발급해주는 명문’이라는 말을 썼다. 이어서 ‘위와 같이 명문하는 일은...’이라는 상투어를 넣었다. 명문을 작성하는 이유, 계기, 구체적인 내용, 매매 내용 등을 썼다. 매매를 중심으로 할 때에는 특히 ‘매매명문’이라고도 부른다. 자녀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에 작성하는 문서에서도 ‘명문’이라는 명칭을 쓰기도 했다. 명문이 어떤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증명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옛 문서들의 ‘명문’은 재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윤안중은 재물과 관련없는 내용을 ‘명문’ 형식으로 만들어 자녀들에게 남겼다. 아내 죽음에 대한 해명이었다. 그는 30살에 첫 아내를 잃었다. 고령신씨인 신광한(申光漢)딸이었다. 신씨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신씨에 대한 상(喪)을 마친 직후 원주이씨와 재혼했다. 이씨는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혼식을 치른 날 이씨는 윤안중에게 매우 심한 말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윤안중은 명문에서 자세하게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결혼한 날 밤에 내뱉은 비루한 말들은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다.’고만 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결혼 첫날 밤 둘만 있을 때 한 말이므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했다. 다만 명문에서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을 보면 이씨가 윤안중에게 매우 모욕적인 말을 했고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거나 자존심을 상하게 한 말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재혼한 지 6,7년이 지나갈 무렵 부모님이 잇달아 돌아가셨다. 아버지 윤행(尹行)이 1592년에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1594년에 죽었다.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자마자 어머니 상도 치러야했다. 부모를 잃은 슬픔이 컸다. 그 때 아내 이씨는 곁에 없었다. 아내 이씨는 시부모님 부고를 듣고도 오지 않았다. 초상 때는 물론이거니와 발상(發喪)할 때에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서운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이씨는 윤안중이 사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윤안중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오지 않았다.’고 글에 분명히 썼다.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 다음 해 어느 날 저녁 무렵 이씨가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쳤다. 시부모 상과 장례를 치를 때에는 얼굴 한번 안 비쳤는데, 미리 연락도 안 하고 느닷없이 온 것이다. 윤안중은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씨를 곱게 볼 수 없었다.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씨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 이씨는 바깥에서 자고 그냥 친정으로 가버렸다. 얼마 후 불 때는 일을 하는 종이 사람뼈 1개를 가져와 보였다. 아궁이의 재를 치우는데 발견했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사람 사는 집에 뼈나 뼛가루를 묻는 일은 저주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저주 사건이 종종 발생했다. 인조 때 유지방(柳之芳)이란 사람이 아버지의 첩과 그 자식들이 집안 곳곳에 흉물과 뼈를 묻어 저주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형, 누이들이 죽었다고 관청에 고발하기도 했다. 청양에 살았던 신숙녀(申淑女)는 죽은 이의 뼈를 묻어 시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영조 때에는 궁녀 박순정(朴順正)이 효장세자가 거처하는 가까운 곳에 뼈를 묻어 놓는 사건도 있었다. 윤안중은 이씨가 지난 번 집에 왔을 때 그에게 저주하는 말을 퍼부은 사실을 떠올렸다. 윤안중은 집안에서 사람 뼈가 나온 것을 보고 그 저주가 자신을 죽게 하기 위한 일임을 직감했다. 즉시 이씨가 부리는 여종 언개(彦介)를 잡아다 조사했다. 언개는 곧바로 실토했다. ‘그 뼈는 여자 상전의 옷장 속에 두었던 것이며, 이것을 윤안중이 잠자는 방의 아궁이에 묻은 것’이라고 했다.윤안중은 무섭기도 했지만, 분노에 찬 마음을 다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씨를 곧장 추궁할 수는 없었다. 종들을 시켜 아궁이를 다시 살피게 했는데 사람뼈가 수없이 나왔다. 집안에 뼈를 묻어 저주했다는 사실은 무서운 일이었다. 누군가를 간접적으로 죽이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사건이 중대한 만큼 이 일은 온 집안, 온 마을에 다 퍼져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윤안중은 몸서리쳤다. 이씨가 무례한 말을 했고, 지난 번 집에 와 저주를 퍼붓기는 했지만, 자기가 자는 방 아궁이에 뼈를 묻어 실제로 저주하는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주의 최종 결과가 죽음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씨의 행동이 남편을 죽이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형법은 명나라 법인 대명률을 적용했다. 그에 의하면 ‘남편을 살해하고자 도모했을 경우에는 참형(斬刑)이며 이미 죽였다면 능지처참’이라고 되어 있다. 비록 살인행위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남편을 배반하거나 죽이려고 마음 먹었다는 사실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이나마 실행했다는 사실 자체가 범죄로 성립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윤안중은 이씨가 저주하는 말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그 저주를 실행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모살(謀殺)’이란 말을 분명하게 표기함으로써 이씨의 속내가 그렇다는 것을 밝혔다. 하지만 자신에게 변고가 생기거나 자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관청에 고소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이씨는 윤대갑(尹大甲)과 함께 온갖 곳을 다녔다. 윤대갑은 윤안중의 동성(同姓) 4촌이었다. 명문에서 윤안중은 ‘이씨가 공공연히 음란하게 행동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윤대갑과 함께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온갖 데를 다녔다. 결혼한 여자가 남편 아닌 다른 남자와 공공연히 다니거나 사귀는 일은 남의 입에 오르내기기 좋은 이야깃거리였고 불륜으로 규정되었다. 무엇보다 윤안중은 ‘음간(淫奸)’이라는 표현으로써 이씨와 윤대갑이 간음한 사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드러냈다. 또 간음을 이씨가 주도했다는 뉘앙스도 풍겼다. 조선시대에 간음은 물론이거니와 친족간 간음에 대해서도 엄격했다.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성과 합의하여 간음했을 경우 장 90도(度), 친족 사이일 경우 시마복(緦麻服) 범위 안에 드는 이들이 간음하면 장 100도였다. 시마복이란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상례(喪禮) 중 한 가지인데 그 범위는 8촌이었다. 윤대갑은 이씨의 시가쪽 사촌이었으므로 시마복 범위보다 더 좁은 범위에 속하는 사이었다. 그들의 간음은 적어도 장 90도에 가까운 벌을 받을 만했을 터이다. 윤안중이 보기에 이씨의 죄는 사소하지 않았다. 시부모가 죽었는데도 와서 상례를 치르지 않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윤리를 어겼다. 집안 아궁이에 뼈를 묻어 저주하고 남편의 죽음을 바란 마음과 태도는 사람으로서 할 일도 아니었고,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었다.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4촌 친족과 음간(淫奸)한 일은 마땅히 법적으로 처결해야할 일이었다. 윤안중은 이씨의 죄가 이 세 가지라고 밝혔다. 가까운 데에 살면서도 시부모가 돌아갔을 때 오지 않은 것이 첫 번째 큰 죄이고, 남편을 저주하며 죽이려고 한 것이 두 번째 큰 죄이며, 남편의 동성(同姓) 4촌과 음간(淫奸)한 것이 세 번째 큰 죄이다.
이 이들은 세상에 다 알려졌고, 집안 어르신도 듣게 되어 사실대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집안 어른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박승종(朴承宗)에게 문서를 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윤안중은 관청에 고소하지는 않았다. 집안에서 처리하고 싶었다. 결국 이씨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계모가 아닌 아비의 원수로 여겨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내는 젊은 나이였을 터이다. 1586년 즈음에 결혼하여 1610년 이전에 죽었다. 이씨의 결혼 생활 기간은 적어도 20년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여성의 결혼 나이가 통상적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임을 감안한다면 이씨가 죽었을 때에는 40살 안팎이었을 것이다. 윤안중은 이씨에 대해 ‘나이가 적은’ 편이라고 여겼다. 비록 이씨가 윤리를 어기고 남편이 죽기를 바라기는 했지만, 한편으로 이씨의 운명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씨에 대한 윤안중의 마음은 단호했다. 분함은 여전히 마음 속에 있었다. 윤안중은 아내가 왜 죽었는지 밝히는 글을 썼다. 유서도, 편지도, 사사로운 글도 아니었다. 명문으로 썼다. 명문은 무엇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작성하는 글이다. 명문은 서두에 ‘위와 같이 명문하는 것은’이라고 하여 문서로써 어떤 사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그것으로 증명을 삼고자 했다. 무엇보다 명문은 말미에 ‘증인(證人)’을 두었다. 증인은 그 사실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람이다. 그들은 문서에 적힌 사실에 대한 증명의 책무가 있다. 문서 내용에 허위가 있을 경우 증인은 위증하는 셈이다. 그 만큼 명문은 사실을 사실대로 서술해야 한다. 윤안중이 자신 집안 일, 특히 아내 이씨의 일을 명문으로 만든 것은 명문이 가진 힘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는 네 자녀들에게 호소와 부탁을 한다. 그러나 어조는 단호하다. 이씨에 대한 자신의 분은 아직도 풀기 어렵다고 호소했다. 예문(禮文)에 생모가 쫓겨나면 그 복(服)을 한 단계 내리지만, 계모가 쫓겨나면 복(복)을 입지 않는다고 했다. 하물며 이씨의 세 가지 큰 죄악 중에 남편을 살해하고자 도모한 일은 어머니를 내쫓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곧 아비의 원수이다. 이씨가 비록 죽기는 했지만 너희들은 아비의 원수라고 생각하여라.
그는 이씨의 악행 중 가장 큰 것으로 자신 곧 남편을 죽이고자 했던 것으로 꼽았다. 그래서 이씨를 ‘계모’로 보지 말고 ‘아비의 원수’로 여기라고 당부한다. ‘계모이면서 아버지에 의해 쫓겨난 여자를 위해 상복을 입지 않는다.’는 예문까지 거론하면서 자녀들이 계모 이씨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도록 엄명을 내린다. 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윤안중은 부부로서의 인연을 끊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훗날 이 일에 대해 누군가 다른 말을 한다면 이 명문을 갖고 관청에 알려 바로 잡으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아비의 통한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윤안중은 재혼한 이씨로 인해 평생 풀지 못할 통한(痛恨)을 얻었다. 부부 사이 일이었으므로 차마 밝히기 쉽지 않았지만, 명문으로 자세한 정황을 밝혔다. 조선시대 명문은 대체로 매매 행위를 증명하기 위해 작성된 경우가 많았다. 재물이 관련되었으므로 증명의 힘이 적지 않았다. 윤안중은 명문이 가진 그 힘을 빌어 이씨가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을 보여주었다. 자녀들에게 계모가 갑작스럽게 죽은 일은 충격이었고, 의문이 많았을 터이다. 윤안중은 아버지로서 사실을 밝혀야 하는 책무를 위해 명문으로 쓴 것은 아닐까 <도움 받은 글들> 박경(2009), 「살옥(殺獄) 판결을 통해 본 조선후기 지배층의 부처(夫妻)관계상」, 『여성과 역사』 10.
이은영(2007), 「한문 산문에 투영된 어머니-18세기 八母服制 담론과 어머니 관련 글들을 중심으로-」,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14. 임상혁(2014), 「고문서에서 명문과 성문의 용례에 관한 연구」, 『고문서연구』 45. 장병인(2003), 「조선 중·후기 간통에 대한 규제의 강화」, 『한국사연구』 121. 조창희(2018), 「조선후기 성범죄 통제방식:법전을 중심으로」, 『한국사회과학연구』 40(1) 한국학자료센터 호남권 http://hnkostma.org/emuseum/service/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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