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37세의 짧은 삶을 살다 간 호남의 천재 사가(史家) 임상덕 게시기간 : 2022-10-19 08:00부터 2041-01-01 23:59까지 등록일 : 2022-10-18 10: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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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자뷰 -환국정치의 단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1751년(영조 27)에 저술한 인문지리서 『택리지(擇里志)』의 「복거총론(卜居總論)」 「인심(人心)」조에서 당시의 세태를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사대부로서 현명함과 어리석음, 높음과 낮음이 자기 패, 한 색목에게만 통할 뿐이고, 딴 색목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이 색목 사람이 저 색목에게 배척되면 이 색목은 더욱 귀하게 여기는데, 저 색목도 또한 그러하다. 비록 하늘에 뻗치는 죄가 있더라도 한 번 딴 색목에게 공격당하면 시비와 곡직은 논하지도 않고 떼지어 일어나서 도우며, 도리어 허물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비록 독실한 행실과 숨은 덕이 있다 하여도, 같은 색목이 아니면 반드시 그 사람의 옳지 못한 곳부터 먼저 살핀다.”
‘색목’은 당파를 말하는데, 정국을 주도하던 당파가 급격히 교체되는 환국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당파들간의 갈등은 절정을 이룬다. 이른바 ‘환국정치’였다. 그 절정기인 신임옥사1) 이후 탕평기로 접어들던 때의 정치판의 기류를 『택리지』에서는 위와 같이 묘사하였다. 색목’, 이를 요즘 말로 바꾸면 ‘진영’인데, 거의 그대로 지금의 정치판을 비판하는 말이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사색당쟁을 그렇게 극복해야 할 우리의 치부로 부정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진영논리, 내로남불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구태를 여실히 자행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잘못인지조차도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다. 환국정치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다. 이런 혼탁한 시절에 『동사회강(東史會綱)』이란 사서를 남긴 호남의 또 하나의 천재가 있었으니 바로 임상덕(林象德, 1683~1719)이다. 이 글의 주인공 임상덕은 신임옥사 직전에 37살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다. 그 역시 당파싸움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시론(時論)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함이 오래 되었으나, 원래 분열(分裂)될 처음에 쌓인 원한이나 깊은 혐의(嫌疑)가 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비록 세도(世道)가 여러 번 변하고 사단(事端)이 거듭 생겼더라도 분열이 오히려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식견이 있는 선비들은 오히려 전이(轉移)하는 기틀이 있기를 바랐는데,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기상(氣象)과 하는 일이 만 가지로 나뉘어 몹시 어지러워져 그물을 널리 치고 쇠뇌[弩]를 사방에서 쏘아, 위로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 삼사(三司)에 이르기까지 십수일 안에 차례로 쓸어 버리고, 언관(言官)이 언관을 논박하고 대신(臺臣)은 유신(儒臣)을 배척하기에 이르렀는데, 말이 성궁(聖躬)에 저촉되었다 하여 큰 죄안(罪案)을 만들었습니다. 전하(殿下)께서는 시험해 보소서. 고금 천하에 당화(黨禍)가 이 지경에 이르러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2)"
당쟁의 심함을 “고금 천하에 당화가 이 지경에 이르러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라는 말로 직격했다. 이어서 “지금 전하께서는 사리를 통촉하시고 도리를 좇는 공효(功效)가 정숙(精熟)하지 못한 바가 있으므로, 전후의 시비곡직(是非曲直)이 모두 그 도리에 적중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도 또한 군상(君上)을 깊이 신뢰(信賴)하는 마음이 없어서, 인심(人心)이 날마다 패상(敗喪)하고 국맥(國脈)이 날로 손상되어 점차 난망(亂亡)한 데로 들어가고 있는데, 스스로 알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라 하여 왕을 겨냥하여 직접 신랄하게 경고하였다. 숙종 또한 나라에 당론(黨論)이 있음을 사람에게 고질(痼疾)이 있는 것에 비유하여 매듭짓기를,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 할 만큼 그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3) 임상덕의 짧은 생애 임상덕은 ①서인의 집권과 노·소론의 분화, ②남인의 우세, ③노·소의 대립에서 노론 집권의 확정 등으로 정치세력이 변화하는 소용돌이의 한복판을 살았다. 그런 와중에서, 37세의 짧은 생이었지만, 기억해야 할 만한 소중한 흔적들을 남겼다.
『숙종실록』에 전 홍문관 교리 임상덕의 졸기(卒記)가 실려 있다.4)졸기란 어떤 인물이 사망했을 때, 실록을 편찬하는 사관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경우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적은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 졸기와 그의 문집 『노촌집(老村集)』 부록에 실려 있는 「노촌선생연보」, 조현명(趙顯命, 1690~1752)이 쓴 「묘갈명」, 그리고 선행 연구들을5)토대로 그의 삶을 재정리해 보자.
임상덕은 자(字)가 윤보(潤甫) 또는 이호(彝好)로서, 무안에 식영정(息營亭)을 세운 임연(林堜)의 증손이고, 참판 임영(林泳)의 족질(族姪)이다. 호는 노촌이다. 나주 회진인으로 대대로 호남에 살았다. 생부는 통덕랑 의금부도사를 지낸 세공(世恭)인데, 큰형인 세온(世溫)이 후사가 없자 큰형집에 입양되었다. 세온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지냈으며 일찍이 출세에 싫증을 느껴 스스로 강호로 물러나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만년에 당상관[緋玉]의 은혜를 입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4세에 천연두[痘患]를 알아 –몸이 약했다- 아마도 그 여파로 “본래 신약(身弱)하여 약으로 몸을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그래서 “세상과 더불어 서로 잊혀진 지 오래다”라 할 만큼 일찍이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하였다. 신동(神童)이라 불렸다. 그가 쓴 「양이서산수기(兩梨墅山水記)」(1707)를 보면, “내가 열 살 때 이산으로 내려와 살다가 열다섯 살 때 한양으로 돌아갔고, 열아홉 살 때 다시 부친을 따라 내려와 지금 서른 살이 되었으니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라 하여 이산, 즉 무안 배뫼와의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10세부터는 아버지를 따라 무안의 총지사(摠持寺)에 들어가 산방생활을 하면서 사서, 시전 등을 읽었고, 12, 3세에 크게 사학(詞學)을 성취하여 붓을 잡으면 거침이 없고 박학(博學)하고 유려(流麗)하였다. 15세에는 서울로 이사가 학당에 입학하였다. 17세 때인 1699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23세에 숙종 즉위 30주년 기념 증광별시의 전시에서 장원 급제하니, 명성(名聲)이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23세부터 37세의 졸년까지 14년간 그는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문학, 홍문관 부교리, 정언, 수찬, 검토관, 이조좌랑, 사간원 헌납, 시강원 사서, 이조정랑, 교리 등을 거쳤다. 1708년(숙종 34) 26세 때 이재(李縡) 등과 함께 홍문록에 선발, 1711년(동 37) 29세 때 호당(湖堂, 독서당)에 피선되었다. 외직으로는 전라도도사, 남평현감, 진산군수, 능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가 재직하던 시기는 노·소 갈등이 첨예화하던 때였다. 그 까닭에 소론파에 속했던 임상덕의 관로도 결코 평탄하지는 않았다. “천자(天姿)가 활달(豁達)하고 도량(度量)이 넓었으며, 문사(文詞)로 인하여 학문에 뜻을 두고 사색(思索)이 깊어 경의(經義)를 발명(發明)한 바가 많았으며, 품행[踐履]이 또한 독실하였으니, 남방(南方)의 학사(學士)들이 임영(林泳)6)과 아울러 존경하였다.”
라 하였듯이 호남, 즉 남방의 학사를 대표할 만했다. 재난을 당했을 때 구제에 앞장서는 등 지역의 대변인 역할도 하였다. "호남 연해 고을의 전세(田稅) 대동(大同)을 이미 가을을 기다려 퇴봉(退捧)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마는, 가령 내년에 풍년[豊登]이 든다 해도 1년에 두 해의 세조(稅租)를 징납(徵納)하게 되면 결코 일정한 기준대로 받아들일 이치가 없을 것이니, 차라리 금년에 그 반을 양감(量減)토록 하소서.”7)
또 같은 해에 숙종이 “호남의 재해가 더욱 심한 고을은 고부(古阜) 등 고을의 예에 의하여 8분재(八分災)를 주고, 호서(湖西)의 이앙(移秧)하지 못한 곳은 전재(全災)를 허급(許給)하라”라 하였는데 이 또한 임상덕의 청으로 인한 것이었다.8)
평생 동안 윤증(尹拯, 1629~1714)을 스승으로 섬겨 식견(識見)과 언론(言論) 또한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당파싸움이 극심해지자, 진취의 뜻을 버리고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갔다. 그러나 직무에 충실하다 끝내 병을 얻어 서울로 치료하러 갔으나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는 왜 『동사회강』을 썼는가? 유교의 지식체계가 경(經)과 사(史)를 표리일체로 포용하고 있어서, 대부분의 유학자는 경학자인 동시에 사학자였다. 임상덕 또한 “조정에 출신(出身)한 이후로 조정의 윗사람은 견식이 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견식을 기르는 방법으로는 사학(史學)이 또한 긴요하다”10)고 하여 사학을 강조하고 있다. 『동사회강』에는 시대정신이 반영되었다. 양란 이후 시대정신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특히 명청교체와 병자호란으로 인한 정신적 공황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지식인들은 ‘조선=소중화’를 내세웠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이 비록 청에 대해 열세에 놓여 있었지만, 중화인 명이 멸망하자, 이에 따라 조선이 중화문명의 적통을 계승한 유일한 문화국가임을 내세워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열세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르자는 뜻을 담았다. 그리하여 명에 대한 의리론에서 반청의식을 내세웠고, 북벌론을 추진하기도 하였고, 예학을 연구하여 학문적 우위를 찾으려고도 하였다. “우리 동국은 비록 벽국(僻國)이라고는 하지만 기성(箕聖; 기자) 이래 소중화로 일컬어져 왔고, 천하가 생겨난 지도 오래다. 일치일난이 항상 천지대운과 서로 순환하여 왔는데 지금은 또 한없는 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대의 흥망뿐만 아니라 절실하게 마음을 써야 할 바가 있으니, 세상의 동지 선비들은 또한 말없이 함께 한탄해 온 터이다. 이러한 말은 강목의 서례(序例)에 없어 부론(附論)하는 바이니, 보는 이들은 유추하여 음미해 주기를 기대한다.”14)
고 하였다. 즉 양란의 충격으로 세상의 동지 선비들이 “한없는 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기성(기자) 이래 소중화로 일컬어져 왔고, (단군 이래) 천하가 생겨난 지도 오래다”라는 말에 우리나라 역사의 자부심을 담아 그 근심을 극복해내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의 시대정신은 소중화-조선중화주의로 나타났으며 이는 역사관의 변화도 이끌었다. 그는 소중화의 근거를 어디서 찾았을까? 강목체와 정통론 역사서들은 이런 시대정신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 17~18세기 사서의 특징은 범례의 보편화와 강목체 서술형식의 등장, 그리고 정통론의 대두로 나타났다. 사서의 당파성 강목이나 정통을 세운다 하더라도 당파적 입장에 따라 그 강조점이나 내용에는 차이가 나타났다. 색목에 따른 갈등이 사서라고 없을 리가 없었다. 아니 사서 편찬 목적 자체에 정치적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는 오히려 당연한 결과였다. “견식을 기르는 방법으로는 사학이 또한 긴요하다. 그래서 능력이 부족하여 고금을 총괄할 수 없더라도 항상 『강목』 한 질을 가지고 서법(書法)을 연구해 보았는데, 넣고 빼는 작은 뜻이 일의 변화를 재형(裁衡)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동사(회강)』를 쓰게 된 것도 이러한 데서 척도를 세워보고자 한 것인데, 지금 보면 세상의 변화가 날로 격심하고, 시(是)와 비(非)가 날로 어지러워 파도를 따라 출몰하다가는 형편없는 사태에 빠지게 될 것이니 … ”17)
강목의 서법에 따라 마름질하고 저울질하는[裁衡] 척도를 세워보고자 『동사』 즉 『동사회강』을 쓰게 되었다고 하여, 시비가 엇갈리는 정국에서 당파성에 따라 소론의 사론을 정립하여 바른 판단을 얻고자 『동사』를 썼다고 볼 수 있겠다.
비록 당파성 때문에 사서에 따라 이런저런 차이가 나타나곤 있었지만, 다만 소중화-조선중화주의라는 시대정신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숭명반청 의식을 춘추대의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는 노론이나 소론이나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런 경향을 가장 전형적으로 또 선구적으로 담아낸 사서가 바로 『동사회강』이었다. 『동사회강』의 사학사적 위치 안정복이 성호 이익에게 올린 편지글을 보면, “우리나라의 역사책들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라고 시작하는데, “근세에 교리(校理) 임상덕이 지은 『동사회강』이 가장 정밀하다 하겠으나 공민왕에서 끝냈으니 아마 그 뒤는 말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라 하여 『동사회강』을 대표적인 역대 사책으로 꼽았다. 공민왕에서 끝낸 서술 시기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했지만 그나마 좋은 평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도 “이제 이 책은 일체 주자의 『강목』을 따랐으므로, 고려의 기(紀)를 공민왕에서 끝냈는데, 이는 주기(周紀)를 끝까지 쓰지 않은 『강목』의 뜻을 적이 본떴다”라 하여 『강목』의 뜻에 충실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1) 1721년(경종 1)부터 1722년(동 2)에 걸쳐 일어난 사류(士類)들의 참변. 신임옥사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하다 일어난 사화이다. 그러나 명분과는 달리 실제로는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2)『숙종실록』 48권, 숙종 36년(1710) 5월 27일 신묘 3번째 기사 3) 위와 같음 4) 『숙종실록보궐정오』 64권, 숙종 45년(1719) 9월 26일 을미 1번째 기사 5) 한영우, 『조선후기 사학사연구』(일지사, 1989) 중 「五. 18세기 초 소론 임상덕의 역사서술 – 동사회강」 등 참조. 6) 조선 중기의 문인·학자(1649~1696). 자는 덕함(德涵). 호는 창계(滄溪). 사마시에 합격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대사헌을 지냈다. 저서에 『의승기(義勝記)』, 『창계집』이 있다. 임영은 임상덕의 족숙이다. 7)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1711) 4월 9일 정묘 2번째 기사 8)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1711) 9월 3일 기축 2번째 기사 9) 『숙종실록』 50권, 숙종 37년(1711) 4월 12일 경오 1번째 기사 10) 『老村集』 권7, 「書」 「答崔副學(昌大) 乙未」(1715) 11) 『與猶堂全書』 第一集 詩文集 第二十一卷 書 寄二兒 壬戊十二月卄二日康津謫中/두 아들에게 부침 임술(1802, 순조 2년, 선생 41년) 12월 강진의 유배지에서. 12) 『老村集』 附錄 「老村先生年譜」 13) 한영우, 앞 책, 172쪽 14) 『東史會綱』 「凡例」 「凡例後語」 15) 정재훈, 「실학자들의 ‘한국사’ 탐구」(『한국사 시민강좌』 48, 2011.2, 일조각), 102쪽. 16) 한영우, 앞 책, 175쪽. 17) 『老村集』 권7, 「書」 「答崔副學(昌大) 乙未」(1715) 18) 한영우, 앞 책, 160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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