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기행] 김장용 젓새우를 준비해야 할 때다 게시기간 : 2022-10-28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10-20 09:5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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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쩟국 좀 더 줘요. 저 집 따로 담아주던데. 이 집은이 너무 짜네’, 김장용 젓갈을 사던 어머니가 값을 치루면서 하는 말이다. ‘아이고 알았당께. 그릇이나 줄쇼’라며 두어 국자 퍼 담아 준다. 멀찌감치 실랑이를 지켜보다 100여 년 전 광주시 학동 ‘무송원’ 앞에서 새우젓을 구입하는 사진이 떠올랐다. 무송원은 호남은행을 설립한 무송 현준호가 살던 집이다. 멀리 무등산 정상을 배경으로 새우젓 장수와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새우젓 장수의 지게 위에는 두 개의 젓갈 통이 올려져 있다. 여인이 사발을 들고 살피고 있는 젓갈 통은 새우젓이 든 ‘알통’으로 보이고, 오른쪽 덮개가 올려진 큰 통은 젓국물이 든 ‘덤통’으로 여겨진다. 덤통은 새우젓을 사는 사람에게 덤으로 주는 국물이 담겨 있다. 예나 지금이나 새우젓을 사는 사람은 젓국을 탐한다. 간은 새우가 아니라 국물이 더 요긴하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젓갈 장만하려는 사람이 많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김장을 일 년 행사로 준비하는 사람은 여름에 영광 설도항이나 신안 전장포항에서 생새우를 사다가 갈무리를 해 놓는다. 멸치젓을 이용하는 집은 부산 기장 대변항이나 경남 남해 미조항에서 봄 멸치를 사다 준비해 놓기도 한다. 산지보다는 젓갈을 숙성시켜 내놓는 신안 송도, 영광 염산, 부안 곰소, 논산 강경 등으로 가는 것이 덤으로 젓국을 얻기 좋다.
젓새우는 십각목 갑각류에 속하는 바다생물로 몸집이 아주 작으며 모래와 펄이 섞인 전남의 낙월도와 임자도 해역, 강화도와 장봉도 주변 해역에서 많이 서식한다. 이곳은 강에서 내려온 토사가 다도해 주변에 쌓이면서 이루어진 천혜의 새우어장이다. 새우를 좋아하는 조기, 민어, 부서 등이 많이 잡혔던 곳이다. 새우는 암컷이 수컷에 비해서 크며, 새우젓은 옛문헌에 하해(蝦醢), 하염(鰕鹽, 蝦鹽)이라 했다. 또 새우의 크기와 색에 따라 백하해(白鰕醢), 세하해(細鰕醢), 자하해(紫鰕醢), 감동해(甘冬醢) 그리고 잡히는 시기에 따라 춘젓, 오젓, 육젓, 자젓, 추젓, 동젓(동백하젓) 등으로 구분했다.
* 언제부터 새우젓을 먹었을까. <세종실록> 8년(1426) 기록을 보면, ‘어린 오이(童子瓜)와 섞어 담근 곤쟁이젓(紫蝦醢) 두 항아리’를 영접도감에게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옛 조리서 <주처침처방>을 분석한 박채린(세계김치연구소)은 “어린 외(동자과)를 따서 소금물에 하룻밤 재웠다가 꺼내 반 건조 후 자하젓과 섞는다”는 <감동저>법이 <세종실록>에 소개된 기록과 일치한다고 했다. 기존에 기록보다 앞서 1400년대 새우젓을 넣어 김치를 만들었다는 것이 확인 된 것이다. <증보산림경제>에도 <자하로 젓갈 담그는 법>에 ‘오이와 전복과 소라에 자하를 넣고 소금에 버무려 담으라’고 설명했다. 젓갈은 18세기 이후에 김장문화가 일반화되면서 확산되었다. 무엇보다 비린내를 잡을 수 있는 고추가 등장하면서 크게 확산되었다. 그렇다면 새우는 언제부터 잡았을까.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사신으로 왔다 기록한 『고려도경』에 ‘고려인은 성기게 짠 배로 만든 어망으로 물고기를 잡는다’는 기록에서 ‘성기게 짠 어망’이 젓새우를 잡는 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젓새우잡이가 중요한 어업으로 자리했다. 19세기 서유구의 『난호어목지』와 『임원경제지』는 새우젓이 팔도에 흘러넘칠 정도로 보급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청장관전서』 제62권 ‘서해여언(西海旅言)’에는 곽란(霍亂)에는 새우젓국이 좋다고 했다. 각 고을 수령의 음식을 조리하는 곳을 관주(官廚)라고 한다. ‘목심심서’에는 관주에서 사용하는 해산물로 민어, 추어(석어), 알젓, 새우젓, 계란, 향유, 간장, 미역, 김, 다시마, 소금 등을 언급하기도 했다. 鮸魚二尾,卽民魚, 鰌魚二束,卽石魚, 卵醢一升,鰕醢三升,鷄卵四十箇,白蜜一升,香油一升,淸醬五升,釅醋六合,大棗一升,生薑一兩,海帶二束,俗名曰甘藿, 海衣五束,卽紫菜, 昆布一束,鹽五升,
이 시기 새우젓은 왕가나 궁가 등 특권층만 아니라 민초들에게도 확대되어 일상생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여유당전서』(제7권)에는 새우젓이 팔러 다니는 새우젓 장수의 사정이 잘 드러난다. 싱싱한 갈치며 준치는 한성에만 갈 뿐이고 / 鮮鮆鮮鰣隔漢城
촌가에는 가끔 새우젓 파는 소리만 들리는데 / 村莊時有賣鰕聲 돈으로 받길 원치 않고 보리로 받길 바라니 / 不要錢賣還要麥 어부들의 살림살이 어려울 게 걱정이로세 / 怊悵漁家事不成
* 육젓은 잡는 것이 아니다 젓새우 잡이는 경기만 일대의 만도리(장봉도), 용유리(인천공항으로 매립), 석모도(강화도) 인근 어장과 천수만어장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영종도 국제공항건설, 천수만간척사업 등으로 서식처가 감소하고 오염되어 임자도와 낙월도 일대가 중심이 되었다. 지금은 젓새우잡이가 강화도와 장봉도 일대 강화어장과 임자도·낙월도·위도 일대 칠산어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신안군 지도읍 송도 젓새우 위판장 젓새우를 보면, 추젓은 2㎝내외, 오젓은 3㎝내외, 육젓은 3㎝이상이다. 크기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굵기도 다르다. 추젓은 2㎜내외, 오젓은 4㎜내외, 육젓은 7㎜ 내외 정도이다. 가을에 산란한 어린 새우들이 운이 좋아 잡히지 않고 겨울을 잘 나고 봄을 맞이하면서 오젓과 육젓으로 자란다고 한다. 산란 직전에 잡은 것이 통통하고 고소한 맛과 하얀 육질을 자랑하는 육젓이며, 오젓은 우유 빛으로 투명하며 빛깔이 곱지만 육젓보다 무르고 작다. 추젓은 가을에 잡은 젓새우로 담근 젓으로 크기가 가장 작다. 오젓과 육젓은 한 달 차이지만 가격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 오젓은 국밥이나 수육을 먹을 때, 육젓은 그 자체를 반찬으로 내놓는다. 김장용 젓갈로는 값이 싸고 맛도 좋은 추젓이나 북새우를 많이 찾는다. 육젓을 만들기 위해서는 산지에서 수차례 선별하고, 포구로 가져와 다시 작은 새우를 골라내 통통한 새우만으로 상품을 만든다. 그래서 육젓은 잡는 것이 아니라 만든다고 말하기도 한다. * 새우잡이 배 ‘멍텅구리배’와 ‘곳배’ 새우잡는 배를 해선(醢船) 즉 젓갈을 담는 배라 한다. 새우를 잡는 즉시 배 위에서 천일염과 섞어 젓갈을 만들기 때문이다. 새우잡이 배를 ‘젓배’라고도 했다. 젓새우를 잡는 그물은 그물코가 아주 작다. 여러 폭의 그물을 이어서 커다란 닻으로 고정시키고 조류를 따라 밀려온 새우를 잡는 닻자망과 자루그물을 매달아 잡는 안강망이 대표적이다. 조류에 따라 이동하는 새우가 그물에 걸리면 물길이 바꾸기 전에 그물을 건져 올려야 한다. 어장 철이 시작되면 하루에 네 번씩 쪽잠을 자면서 들물과 썰물에 맞춰 그물을 올려야 한다. 오죽 힘들었으면 ‘새우잡이 배로 보내버린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싶다. 칠산어장에서는 새우잡이배를 ‘멍텅구리배’로 불렀고, 강화어장에서는 ‘곳배’라 했다. 강화도에서는 곳배를 젓배나 꽁댕이배라고도 한다. 멍텅구리 배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고 동력선이 예인을 해줘야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곳배는 조선시대 한강의 하류인 강화도에서 마포까지 오르내리며 땔나무나 수산물을 운반하던 배(중선)였다. 구한말 기선이 등장하면서 새우잡이배로 이용했다. ‘곳’은 돌을 담아 닻으로 이용하는 것을 칭하는 것이다.
멍텅구리배에 타는 작업 인원은 선장(사공), 영자, 수동무, 동무, 화장 등 총 5명이다. 선장은 새우잡이를 지휘하는 사람이다. 물때에 밝고 그물을 넣고 빼는 시기를 결정한다. 수온, 날씨, 물 때, 조류에 따라 새우 어획량이 결정되기 때문에 선장의 판단이 중요하다. 영자는 선원들 중에서 경험이 가장 많은 연장자로 배안에 모든 살림살이를 담당한다. 때로는 선장의 일을 대신하며 작업 시간에 맞추어 취침과 기상 등 선원들 일정을 결정한다. 수동무와 동무는 일반선원으로 그물을 올리고 새우를 선별하여 통에 넣는 등 잡일을 맡는다. 화장은 부엌에서 요리를 담당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뱃사람의 지위에 따라 몫(월급)도 차이가 있다. 월급으로 지급되기 전에는 어획량에 따라 몫이 달라졌다. 운반선이 새우를 낙월도나 임자도 등 섬으로 옮겨오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잡어와 상품성이 떨어지는 새우를 추려냈다. 새우는 굵은 소금을 뿌려 새우젓 상품을 만들고, 잡어는 일당으로 가져가거나 잡젓을 담았다. 또 조류가 약해 조업이 어려운 조금 물때에는 터진 그물을 만들었다. 이렇게 새우잡이 배 한 척이면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다. 낙월도에 수십 척의 멍텅구리배가 있던 시절에는 돈도 흔했고 술집과 다방도 많았다.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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