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한말 호남선비, 진도 벽파진에서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다_황현의 역사회고시 게시기간 : 2022-06-1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6-14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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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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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현이 지은 역사회고시 이 시는 황현(1855~1910)이 진도 벽파진에서 지은 역사회고시이다. 역사회고시란 역사적인 현장에서 해당 역사를 떠올리면서 짓는 것을 말한다. 황현은 시 제목 다음에 작은 주(註)를 달았는데, “여기가 바로 이 충무공이 왜병을 모조리 죽인 곳이다.〔卽李忠武公鏖兵處〕”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를 통해 황현이 벽파진을 1597년 정유재란 때 무공(武功)을 세운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연관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시 내용을 이해하기 편하도록 다시 한 번 서술해본다. 1597년 정유년에 일어난 왜침은 최고 위태로워 벽파정의 앞바다가 왜적 깃발로 완전히 뒤덮였지. 역사는 이순신 장군이 모함 받은 것을 불쌍하게 여겼고, 하늘은 또 이순신 장군이 복권되도록 보살펴 주었다. 이순신 장군이 만 번 죽었다한들 어찌 전쟁의 공을 바랐겠는가. 이러한 장군의 마음을 아무쪼록 무신들에게 알리고 싶다. 지금 이 벽파진은 왜놈 배들이 지나갔던 곳인지라 손가락을 깨물며 명량에 세워진 옛날 비를 가리킨다.
시의 처음 두 구에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벽파정 앞바다의 상황을 언급하였다. 벽파정은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누정이다. 12세기 초ㆍ중엽에 주로 활약한 고조기(高兆基, ?~1157)가 이 벽파정에서 「진도 강가의 누정에서〔珍島江亭〕」 작품을 지은 것을 통해 12세기 초ㆍ중반 이전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파정은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 곳에 자리했을 뿐 아니라 주변 승경이 아름다워 고조기를 필두로 이후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시를 남겼다. 그런데 황현은 벽파정을 아름다운 승경이 있는 곳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정유재란 때 있었던 일을 우선 들어 말하였다. 곧, 역사적 사실을 말함으로써 과거 벽파정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3ㆍ4구에서 이순신 장군이 당시 어떤 처지에 놓였었는지 중국의 역사적인 인물 악의(樂毅)와 분양(汾陽)에 대비시켜 언급하였다. ‘악의’는 전국 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당시 연나라 소왕(昭王)이 즉위하여 인재를 구하는 정책을 펴자 연나라로 가서 객경(客卿, 타지 사람이라도 차별을 두지 않고 유능하다면 뽑아서 고위관리로까지 등용하는 것)에 이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공을 세웠다. 그러나 소왕이 죽고 혜왕이 등극하자 제나라 전단(田單)이 이간질을 하였고, 이 때문에 악의는 마침내 연나라를 떠났다. 또한 ‘분양’은 당나라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가리킨다. 곽자의는 안사(安史, 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는 등 무공을 세웠으나 당시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어조은(魚朝恩)의 참소를 입어 파직되었다가 제도병마도통(諸道兵馬都統)에 재기용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여러 번의 수전(水戰)에서 공을 세우고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올랐으나 경상 우수사(慶尙右水使) 원균(元均)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러다 죽음을 간신히 모면한 뒤에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을 악의와 곽자의의 행적에 대비시킨 것이다. 그리고 5, 6구에서 이순신이 전쟁터에서 열심히 싸움을 했던 것은 전공을 바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였다. 특히, 6구에서 말한 “이 마음〔此心〕”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일 텐데, 황현은 장군의 진정성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7, 8구에서 벽파진이 과거 왜놈 배들이 지나갔던 곳이라 말하며 명량의 옛날 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였다. 여기서 말한 ‘명량의 옛날 비’에 대해 혹자는 1688년(숙종14)에 세워진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를 이른다 했는데, 이는 다시 세밀히 살펴볼 일이다. 명량대첩비는 벽파진에 있지 않고, 해남군 문내면에 소재해 있기 때문이다. 황현은 이와 같이 1597년 9월 7일 벽파정 앞바다에서 벌어진 왜군과의 싸움을 시로 나타내었는데, 당시 이순신 장군이 어떤 상황에 처했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2. 황현의 의리 정신, 진도 유배인을 찾아가다 황현의 자는 운경(雲卿)이고, 호는 매천(梅泉)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서촌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 이미 시재(詩才)로 이름을 날렸다. 24세(1878, 고종15) 때 서울로 진출한 황현은 그곳에서 당대 유명한 문인인 강위(姜瑋), 이건창(李建昌), 김택영(金澤榮), 정만조(鄭萬朝) 등과 교유하며, 우정을 돈독히 쌓았다. 그리고 29세 때 특설 보거과(保擧科) 초시에 응시해 1등으로 합격했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석으로 밀려나자 회시를 보지 않고 광양으로 내려왔다. 이후 34세(1888, 고종25) 때 아버지 황시묵(黃時默)의 권유로 성균관 생원시에 1등 제2인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황현은 중앙정계에 부정부패가 만연한 것을 보고 실망한 나머지 전남 구례 만수동으로 삶의 거처를 옮겨 살며 다시는 서울에 가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황현은 이 만수동에서 저술에 몰입하여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의 역사서를 남긴 한편, 나라를 바로 잡기 위해 「언사소(言事疏)」를 지어 조정에 아홉 가지 개혁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비록 서울과 멀리 떨어진 벽촌(僻村)에서 살고 있었으나 나라가 기울어져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개혁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현의 개혁안이 먹혀들어갈 리가 없었다. 황현은 이렇듯 답답한 상황을 뒤로 한 채 48세(1902년) 때 구례군 광의면 월곡리로 삶의 거처를 옮긴다. 그런데 3년이 지난 51세 때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통해 매국노를 성토하는 한편, 조병세(趙秉世)와 민영환(閔泳煥) 등의 애국지사를 애도한다. 이후 1908년 구례 방광리에 신식 사립학교인 호양학교(壺陽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려 했으나 대세는 이미 황현이 원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2년 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비보를 들은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지은 다음 자결한다. 이때 황현의 나이 56세였다. 이와 같이 황현의 삶을 대략 정리해보았다. 그렇다면 황현은 언제 어떤 이유로 육지와 멀리 떨어진 섬 진도까지 가게 되었을까? 황현은 그의 나이 42세(1896, 고종33) 때 구례 만수동에서 출발하여 진도에 갔다. 물론 혼자 가지 않고, 제자 이상락(李相洛)이 동행하였다. 당시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지금처럼 연륙교도 없었던 상황에서 구례에서 진도까지 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현은 그 어려운 길을 갔다. 구례에서 진도까지 가는 동안 수많은 산과 계곡을 지났을 것이며, 때로는 예기치 못한 상황도 맞닥뜨렸을 것이다. 황현은 이 모든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드디어 진도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진도 유배인 정만조를 만났다. 황현은 정만조보다 세 살 위이며,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은 서울에서 만나 서로 친분을 쌓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황현은 유배인 정만조를 찾아가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불원천리(不遠千里) 먼 길을 멀다 생각하지 않고 구례에서 진도까지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데, 황현은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김택영은 「황현본전(黃玹本傳)」 글에서 “평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유배 되거나 죽었을 경우에 천리 길이라도 도보로 달려가서 위문하는 일이 많았다.”라고 했는데, 황현의 의리 정신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진도에서 만난 황현과 정만조는 각각 시를 지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었다. 우선 황현이 진도와 관련해 지은 작품을 나열하면, 「무정의 유배소를 찾아가서〔訪茂亭謫居〕」, 「소치의 묵연 책에 쓰다〔題小癡墨緣卷〕」, 「길 가던 중에 느낌이 있어 무정에게 부치다〔途中有懷寄茂亭〕」, 「벽파진에서〔碧波津〕」(이상 『매천집』 권2 병신고 소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길 가던 중에 느낌이 있어 무정에게 부치다」 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황현이 진도에서 정만조와 이별한 뒤 길을 가던 중에 지었다. 시 내용에 따르면, 황현은 진도에 남은 정만조의 마음이 상할까 봐서 억지로 기쁜 얼굴을 지었다 했다. 또한 황현은 정만조를 가리켜 “물속의 달 같은 깨끗한 님”이라 말하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시이다. 한편, 정만조도 황현과 관련해 시를 지었는데, 「황운경이 찾아와서〔黃雲卿來訪〕」, 「운경이 그의 제자 이상락을 데리고 왔는데, 젊은 나이로 시를 잘 지었고, 호는 금촌이다. 나에게 시 한 작품을 주므로 그 시에 차운했으며, 겸하여 운경에게 보이다〔雲卿携其弟子李生相洛而來 妙年工詩 號琴村 贈余一詩 故次其韻 兼示雲卿〕」, 「운경이 돌아가려고 함에 쌍계사의 누각에서 모여 술을 마시며〔會飮寺樓 雲卿將還〕」(이상 『은파유필』 및 『무정존고』 소재) 등이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황현과 정만조가 진도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소치(小癡) 허련(許鍊)이 남긴 묵연 책을 함께 보았고, 쌍계사(雙溪寺) 입구 누각에서 술을 마셨으며, 시회도 열었다. 그리고 황현은 벽파진에 들러 주변을 답사하면서 과거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회상하였다. 그리고 지은 시가 앞에서 소개한 「벽파진에서」이다.
사진③
사진④ 【사진③은 2002년에 복원된 황현의 생가 모습이고, 사진④는 복원된 생가에 전시된 황현의 초상화이다. 복원된 황현의 생가는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4-3에 소재해 있다.】 3. 황현의 역사에 대한 사랑의 실천 김택영은 일찍이 「황현본전」 글에서 황현의 학문 특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그의 학문은 소통을 위주로 하여, 시속의 강학자(講學者)들과 종유하길 싫어했고 역대의 문적에 실린 치란흥망의 역사를 살펴보길 좋아했다.
(김택영, 「황현본전」,『매천집』소재) 이 글을 통해 황현의 학문 특성을 알 수 있는데, 특히 “역대의 문적에 실린 치란흥망의 역사를 살펴보길 좋아했다”라는 부분에 눈길이 간다. 바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의 역사서를 남긴 것이 우연이 아니며, 진도 백파진에 직접 가서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을 떠올린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벽파진에서」 시도 역사 현장을 직접 답사해 나온 결과물로 역사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에 옮긴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황 현, 『매천집』
정만조, 『무정존고』 정만조, 『은파유필』 김신중, 「진도의 벽파정과 그 제영」 『한국시가문화연구』 33권, 한국시가문화학회, 2014. 임형택, 「변역(變易)과 위망(危亡)의 시대상을 담아낸 문집」, 『매천집』 해제.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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