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유산 상속, 자격부터 따져야 게시기간 : 2022-06-22 07:00부터 2030-12-10 12:12까지 등록일 : 2022-06-21 09:4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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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여 버린 계획 1657년 12월 강진. 연말이니만큼 새해를 맞기 위한 일을 해야한다. 지난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 올 새해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계획해야 한다. 정부인 임씨는 80세가 다 되어가는 때여서 자신의 삶도 차근차근 정리하고 남은 생을 어떻게 지내야할지 모색해야 할 때라고 여겼다. 그녀는 ‘삶 정리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그녀의 ‘삶 정리 프로젝트’는 쉽게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20년 전 죽은 남편이 남긴 유산을 분배하는 일만 남았다. 수양 아들에게 거의 전부 물려주고 서녀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나눠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위 중 한 명이 강하게 반발했다. 모두 똑같이 나눠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송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큰소리쳤다. 평소 말없던 사위가 유산 나눌 때가 되자 자기몫을 챙기려 하고 또 자식들 모두 공평하게 나눠가져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유산 상속이란 어느 집이든 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건만 임씨 속내는 더 복잡했다. 남편 오신남(吳信男, 1575-1632)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셋이었다. 수양 아들인 오상지(吳尙志), 각각의 다른 첩에게서 태어난 서녀(庶女) 둘. 오상지는 오신남의 5촌 조카인 오열(吳悅)의 둘째 아들이다. 오신남과 오상지는 6촌 사이인 셈이다. 임씨 부인은 오상지가 3살이 채 되기 전에 데려다 길렀다. ‘3살이 안 된 아이를 거둬 기른 수양 자식은 친자식과 거의 같다.’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신남과 임씨가 서두른 것은 당시 오신남이 후금(청나라)에 억류되어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서였다. 후금의 누르하치가 건주에서 나와 명나라 영토를 점진적으로 손에 넣었고, 1618년에 무순(撫順), 청하(淸河)까지 진출했다. 명은 조선에 구원병을 파병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2천여 명으로 편성된 군대가 요동으로 출정했다. 오신남도 강홍립 군대에 소속되었다. 강홍립 군대는 1619년 2월 19일에 요동에 도착했고 다음 달 3월 2일에 심하(深河, 사르후)에서 후금 군대와 싸웠다. 하지만 맹렬하게 싸우던 김응하(金應河)가 전사하고 강홍립은 투항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홍립과 함께 간 오신남도 10여 년 간 후금 땅에 억류된 채 지냈다. 그들의 처지는 거의 포로 수준과 비슷했다. 불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오신남은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접었다. 그 때 집안을 이어갈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임씨에게 편지를 보내 오열의 아들이 3세가 되기 전에 얼른 입양하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오신남과 임씨는 급작스럽게 수양 아들을 들였다. 그것도 3살이 채 안된 남자아이를. 1627년, 오신남이 다행히 풀려나 고향 강진으로 왔다. 그는 오상지가 자신을 계승할 아들이라고 주변에 널리 알렸다. 1631년에는 예조에 소지를 올려 오상지가 ‘적법한 계후자(繼後子)’ 즉 집안일과 집안 제사를 계승하여 받들 자격이 있는 아들이라는 공인을 받아냈다. 오신남과 임씨는 그제서야 한시름 놓았다. 만천하에 공인된 아들, 계후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임씨는 특히 오상지를 데려와 키우면서 자신의 낳은 아들과 다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자신이 갖고 있던 재산을 증여했었다. 남편 집안 사람들이 모두 동의했고, 서녀나 사위들도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남편의 재산을 나누려하자 사위가 이의를 제기했다. 똑같이 나눠주셔야 한다고, 똑같이 나눠가져야한다고. 임씨의 ‘삶 정리 프로젝트’가 유산 분배 단계에서 꼬여버린 것이다. 셈법이 다르면 줄 것도 받을 것도 달라져
오신남은 첩 둘을 두었고 그 첩들은 각각 딸 한 명씩 낳았다. 둘다 결혼해 한 명은 강진에 살고, 또 한 명은 서울에 살았다. 비록 서녀였지만 임씨는 자신이 낳을 딸처럼 생각했다. 남편이 남긴 재산을 나눌 때가 되자 서녀들도 상속자로 포함시켰다. 조선시대 첩의 자식들도 아버지 재산을 물려받을 법적 권리는 있었다. ‘아버지의 재산은 적처 자식과 첩 자식에게 나누어준다.’는 법 조항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씨는 법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 사이라는 정의(情誼)를 생각해 서녀들에게도 유산을 나누어 주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사위 한 명이 똑같이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유산 분배 방식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셈법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 조선시대 아버지쪽 재산에 대한 상속권은 적처 자식과 첩 자식들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상속분(相續分)에 있어서는 적처 자녀와 수양 자녀, 적처 자녀와 첩 자녀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적처의 자식이 있을 경우, 수양 자녀는 적처 소생의 1/7을, 양첩 자식 곧 양민 출신 첩이 낳은 자식은 1/7, 천첩 자식 즉 여종이나 기생처럼 천민 계층 출신 첩이 낳은 자식은 1/10을 받는다. 적처의 아들 딸이 모두 없을 경우 수양 자녀와 양첩 자식들은 상속분이 똑같다.
1631년(인조9) 윤11월에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오신남이 조카 오열의 둘째 아들인 오상지를 양자로 삼고 후사를 이을 수 있도록 예조에 올린 소지이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특히 수양 아들을 키울 때 그 아이가 3살 미만일 때 데려왔는지, 그 이후에 데려왔는지에 따라 유산 상속도 달라졌다. 대개 3살 이전에 거둬 기를 때에는 후계자로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3살 이전에 거둬 기르면 ‘자기 자식과 거의 같다.’는 법 내용도 있었다. 무엇보다 적처가 낳은 아들 딸이 모두 없을 때에는 수양 아들이 유리한 편이었다. 아버지 유산을 거의 모두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상지가 바로 이 경우였다. 자식 중 누가 제사를 받아 모시느냐에 따라 재산을 더 받을 권리도 있었다. 제사 받드는 일이 중요한 일로 인식되고, 그 제사를 아들이 계승하고 특히 맏아들이 계승하는 관례가 굳어감에 따라 재산 분배에 있어서도 ‘제사를 이어받을 사람’이냐 아니냐에 따라 상속 받을 수 있는 재산 분량이 달라졌던 것이다. 오상지는 집안 제사도 지속적으로 받들어 왔기 때문에 제사몫을 받는 데에서도 유리했다. 첩 자식은 어떠했는가. 경기도에 사는 서녀의 어머니는 여종이었다. 오신남이 첩으로 들인 후 값을 치르고 속량해주었다. 여종이라는 천민 계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 오신남이 죽은 후 수절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다. 이처럼 상속할 재산 분량을 규정하는 조건이 다양해져서 실제 상속하거나 상속 받을 때에는 조건을 꼼꼼하게 따질 필요가 있었다. 재산 분배에서 풀어야할 문제는 오상지와 경기도에 사는 서녀의 ‘자격’이었다. 셈법에 따라 상속 받을 분량이 달라지게 될 터였다. 오상지를 보자. 3살 이전에 오신남 집에 들어왔고 1631년 오신남이 죽기 직전 예조로부터 ‘오상지는 오신남의 아들로서 후사(後嗣)’로서 적법하다는 공인을 받아냈다. 그런데 입안에 ‘수양(收養)’ 즉 수양 아들이란 표현이 들어 있었다. 당시 오신남은 여러 차례 후금 사신으로 오갔기 때문에 입안을 받은 후 확실하게 마무리할 여유가 없었다. 또 하나는 경기도에 사는 서녀의 ‘자격’이었다. 그 어머니가 여종이었고 속량되기는 했지만 다른 남자에게 가 버렸다. 그녀를 양첩 딸로 봐야할지, 천첩 딸로 여겨야할지 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셈법에 따라 오상지나 서울 사는 서녀, 강진에 사는 서녀 곧 윤인철의 처가 상속 받을 유산의 규모는 더 많을 수도, 더 적어질 수도 있었다. 윤인철의 셈법은 이러한 듯하다. 우선 그는 예조에서 발급한 문서에 ‘수양’이라는 표현을 꼬투리 삼아 오상지가 ‘수양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오상지가 계후자 자격이 없다고 보았다. 수양 아들이므로 서녀의 배우자인 윤인철 자신의 자격과 같다고 생각했다. 서울 사는 서녀는 어머니가 이미 속량 되어 천민 계층에서 벗어났으므로 양첩 자식으로 보았다. 윤인철 자신이나 서울 사는 동서가 똑같은 양첩 자식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래서 장인이 남긴 재산은 셋 모두 똑같이 나눠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인철은 오상지가 3살 이전에 오씨 집안에 들어 와 양육되었다는 사실, 그 동안 오상지가 집안 제사를 받들었다는 사실 등은 무시했다. 임씨 부인 셈법은 달랐다. 그녀는 오상지를 3세 이전에 데려왔으므로 자신이 낳은 친자식이나 다름 없다는 것, 오신남이 강진에 없었을 때와 오신남이 죽은 후 집안일과 집안 제사를 성실하게 봉행해왔다는 것, 남편이 평소 오상지를 계후자로 여겨 많은 이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했고 예조의 공인까지 받아냈다는 것 등을 더 중시했다. 서울 사는 서녀에 대해서는 그녀 어머니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여전히 천첩 소생으로 여기고 있음을 드러냈다. 윤인철이 ‘적서(嫡庶)’ 차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무례하게 따지고 들었던 일도 불쾌했다. 임씨 부인과 사위 윤인철 셈법이 달라지면서 임씨 부인은 재산 분배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처음에는 오상지를 자기가 낳은 자식으로 여겨 그에 합당한 만큼 주고, 첩 자식이지만 어머니로서의 정의(情誼)가 있다고 생각해 그들에게도 정에 맞게 주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다시 꼼꼼하게 따져야 했다. 어떻게 하면 오상지에게 붙은 ‘수양’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적법’하고 정당한 ‘친자식’처럼 만들어 집안의 제사 계승자로서 많은 재산을 줄 수 있을지, 서울 사는 서녀를 천첩 소생으로 할지 양첩 소생으로 할지 등등. 상속자들의 자격에 따라 그들에게 돌아갈 몫은 엄청 차이가 날 터이니까. 상속에 관한 법이 있으므로 법에 따라 하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법 조항을 근거로 각각의 상속자를 어떻게 규정할지 즉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속분의 규모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 문제를 순찰사가 풀도록 했다. 이리저리 궁리하여 소지(所志)를 써 올려 처결해달라고 했다. 아울러 자신의 의도대로 처결 받기 위한 전략을 짜야 했다. 의도는 오상지를 집안 계후자로 굳히는 일이었다. 정의(情義)로 논하자면 이 수양 아들을 3세가 되기 전에 거둬 기른 것은 남편이 후사로 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살아 돌아올 때에는 길거리에서 오랫동안 서서 기다렸고, 남편이 서울에 있을 때에는 매번 가서 인사 드렸습니다. 그런데 끝내 상여를 들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고 3년 상복을 입었습니다. 그 효성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산 것이 30여 년이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집안 사당이나 산소, 제사 받드는 일 등을 이 아이에게 모두 맡겨 일하게 한 지도 또한 20여 년입니다. 제사를 주관하면 후계자이니 재산을 줄 때 계후자(繼後子)로서 논하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중략) 오상지는 남편의 육촌 손자뻘입니다. 비록 수양 아들이라고 칭하기는 하나 오상지 외에 계후자로서 할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사를 받들게 하기 위해 거둬 길렀습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이미 이루어진 일이고, 남편이 죽은 후에 오상지가 사당, 산소, 제사 등의 일을 주관한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수양 자녀로서 제사를 받들지 않는 사람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오상지를 3세 이전에 데려왔다는 사실, 남편이 생전에 오상지를 집안 후계자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는 사실, 남편이 죽자 3년상을 직접 치른 사실, 남편이 죽은 후 20여 년 간 집안의 가묘나 산소를 돌보고 제사도 정성을 다해 받들었던 사실 등을 집중적으로 부각했다. 오상지만 부각할 수는 없었다. 서녀에 대해 적모(嫡母)로서의 애정도 보여주었다. 첩의 딸들은 비록 천첩의 소생으로 시집갔지만 또한 남편의 골육으로 이들 외에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들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얕겠습니까? 그들에게 재산을 줄 때 법을 참작하면서, 인정상으로도 좋게 처리하려고 했습니다.
임씨 부인은 첩의 딸들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잘 나누어주려고 했다. 다만 사위가 오상지의 상속 자격을 따지는 바람에 서녀들의 자격도 따질 수밖에 없었다. 법 조문도 뒤져보고 그 법을 해석해보기도 하면서, 전략적으로 소지를 작성했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머리 아프게 했던 그 유산 분배 문제를 순찰사의 손에 넘겼다. 훗날 일어날 말썽을 미리 막기 위해.
순찰사에게 넘어간 문제, 그 해법은? 순찰사는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했다. 향촌 강진의 정부인이 올린 글이니 그저 무심하게 놔 둘 수도 없었다. 대명률, 경국대전 등 여러 법전을 뒤져가며 우선 ‘법’에 의한 처결하려고 했다. 처결은 대략 이러했다. ‘수양 아들은 원래 1/7을 받거나 적처 자녀가 없을 경우 양첩 자식과 똑같이 받아야 하는데, 오신남이 일찍이 마음으로 오상지를 계후자로 여겼고, 계후자로서 인정 받을 만한 예조의 허락도 받았으며 그 동안 제사를 받들었으니 그 점을 잘 생각하고 서녀와 같게 할 수는 없을 듯함. 윤인철 처인 서녀와 서울 사는 서녀는 처지가 다르므로 똑같이 할 수 없으니 서울의 서녀에게는 천첩의 예로써 줄 것, 다만 자녀들의 상황을 감안하여 더 주면 법에도, 정(情)에도 잘 부합할 것임.’
임씨 부인은 먼저 정의(情誼)에 따라 유산 분배를 하고자 했다. 그리고 법전도 찾아보았다. 정과 법 사이에서 오갔다. 순찰사는 임씨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처결했다. 그 후 임씨는 어떻게 했을까. <도움 받은 글들> 고윤수(2004) ,「광해군대 조선의 요동정책과 조선군 포로」, 『동방학지』123, 연세대국학연구원.
문숙자(1997), 15~17세기 첩자녀의 재산상속과 그 특징, 『조선시대사학보』2. 조선시대사학회. 배재홍(1990), 「조선시대 첩자녀의 재산상속과 존재양태-분재기 분석에 의한 접근」, 『대구사학』39. 대구사학회. 손경찬(2018), 「자식 없이 사망한 배우자의 재산상속」, 『홍익법학』 19(4). 홍익대 법학연구소. 손계영(2019), 「조선시대 별급 분재의 사유와 변화 양상」, 『국학연구』39. 한국국학진흥원. 장정수(2021), 「심하전역 당시 광해군의 밀지와 대후금 배후교섭의 변질」, 『사총』 104. 고려대 역사연구소. 위백규, 『존재집』 권22, <가의 오공 행장(嘉義吳公行狀)> 한국학자료포털, https://kostma.aks.ac.kr/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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