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조선후기 백양사의 환성지안(喚惺志安) 문파(門派)의 성립과 계승1 게시기간 : 2022-06-29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6-2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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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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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백양사는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로 1239(약수리 26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백양사(주지 무공스님)는 632년(百濟 武王 33년)에 여환선사(如幻禪師)가 사찰을 창건하고 절 이름을 백암사(白岩寺)라 칭하게 되었다1)는 것에서 비롯된다, 백암사는 1034년(고려 德宗 3년) 중연선사(中延祖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고쳐 정토사(淨土寺)라 불렀다. 1338년(高麗 忠定王 2)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가 3창(創)을 하였으며, 1574년(선조 7년) 환양선사가 백양사로 개칭하였다. 1785년(正祖 10년) 환성지안선사(喚惺志安禪師)가 중창하였고, 조선말기 1863년(高宗 元年)에 도암선사(道巖禪師)가 4창(創)을 하였다. 이어 1917년에 만암종헌선사(曼庵宗憲禪師)가 5창(創)을 하였다. 이후 백양사는 자비(慈悲)와 지계(持戒)의 엄정함을 이은 환응탄영(幻應坦泳, 1847-1929) 스님과 그 뒤를 이은 근세 백양사의 중창주인 만암종헌(曼庵宗憲, 1876-1956) 스님의 승맥(僧脈)이 이어져 오고 있다. 1996년 3월 30일 대한불교 조계종 제120회 중앙종회에서 고불총림(古佛叢林)으로 지정되었다.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8 교구본사(敎區本寺) 고불총림 백양사(古佛叢林 白羊寺)로 3학(계율, 선정, 지혜)을 한 절에서 닦을 수 있는 3원(율원, 선원, 강원)을 갖춘 종합불교수행도량으로서의 총림(叢林)의 寺格(사격)을 갖기에 이르렀다.2) 2019년 11월 6일 조계종 제217회 중앙종회에서 총림의 구성요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등의 사유로 총림을 해제하기로 결정하여 현재는 제18교구 본사로서 사격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백양사는 예로부터 훌륭한 선지식인 큰스님들이 백양사 입구에 줄지어 서있는 고목나무들처럼 끊이지 않았는데, 백양사의 산내암자 운문암은 고려말기 각진국사 복구를 비롯 조선후기의 소요태능, 진묵일옥, 설파상언, 연담유일, 백파긍선 등과 일제시기의 환응탄영, 학명계종, 그리고 용성진종, 석전 박한영, 만암종헌, 인곡, 고암스님 등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불교법통을 이어온 고승, 선덕(禪德) 스님들이 상주 수행하여 수행근본도량으로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북 마하연(北 摩訶衍), 남 운문암(南 雲門庵)” 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북쪽에서는 금강산 마하연 선방이, 남쪽에서는 백양산 운문암이 참선도량으로 최고의 선방(禪房)이라는 것이다.
1.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 석비 이와 같은 백양사 사찰정신은 불조(佛祖, 부처님과 조사)의 혜명(慧命)을 계승하는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석가모니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을 이어가는 백양사의 스님들의 승맥을 파악하는 것은 사찰정신이 언제, 누구에게 비롯되었으며, 어떻게 사자상승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으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승려로서의 활동과 사상의 경향이 어떠하였는지도 아울러 주목해야 할 것이다. 진리탐구와 중생구제가 수많은 스님들의 출가의 원력일진대, 스님들의 대사회적 관계와 이와 연관된 사상적 특성도 사찰정신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진다. 위의 세 가지 관점에서 백양사의 승맥을 살펴봄으로써 백양사의 사찰정신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조선후기 백양사의 환성지안(喚惺志安) 문파(門派)의 성립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으로 추대되었으며, 1996년 고불총림 백양사의 초대방장으로 추대된 서옹 스님은 자신의 법맥을 연담계(蓮潭系)로 밝히었다. 다음의 『서옹선사법어집(西翁禪師法語集)』을 살펴보기로 하자.
佛祖源流 太古門孫 蓮潭系譜(白羊寺)3)
2. 고불총림 백양사 위에서 보여 주듯이 서옹스님은 만암종헌의 법사(法嗣, 전법제자)로서 서산휴정 문하의 연담유일 문파의 법맥을 이은 것으로, 그는 자신의 법맥을 연담계(蓮潭系)로 밝히고 있다. 한편, 1990년대 중반 간행된 자료에 의하면, 백양사 문중의 스님들을 <蓮白門徒會>로 칭한 적이 있었다. <연백문도회>는 연담백파문도회의 약칭으로 “연담유일과 백파긍선의 문계(門孫)들의 모임”이란 의미이다. 이것은 백양사의 법맥이 연담유일과 백파긍선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연담유일은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하였으며, 백파긍선은 순창 구암사에 주석하면서 후진을 지도하였다. 이들은 주석처가 각기 달랐지만, 같은 환성지안의 문파에 속했으며 두 도량이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양 문도끼리 밀접한 상호교류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렇다 보니 양 문도끼리 본의 아니게 사소한 갈등관계에 놓이는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하나의 문도로 파악되어 1990년 중반에도 세력의 결집을 위해 <연백문도회>로 지칭함에 이르게 되었지 않았나 여겨진다. 그런데, 이능화(李能和)의 『朝鮮佛敎通史』上篇 朝鮮寺刹禪敎兩宗三十本寺幷其所屬末寺의 全羅南道長城郡白巖山白羊寺 條에 따르면5), 寺乘에 (중략) 爲湖南屈之禪苑 其統失傳 而傳授禪敎兩宗統祖淸虛休靜禪師之五代嫡孫
喚惺志安禪師之心印者次第相承 改號白羊寺(호남에서 손꼽는 禪院이 되었으나 그 법통은 失傳되고 禪敎兩宗의 統祖 淸虛休靜 禪師의 5대(4대의 잘못-필자) 嫡孫인 禪師의 心印을 전해 받은 이들이 차례로 이어오며 백양사로 고쳐 불렀다). 燈規에도 白羊寺 本末寺는 派祖인 喚惺志安 禪師의 法孫으로 住持를 삼는다. 고 하였다. 백양사는 환성선사의 심인을 전해 받은 스님들이 법등(法燈)을 차례로 이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환성지안계 스님들이 주석함으로써 백양사로 사명이 고쳐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백양사의 법맥이 환성지안 문파이며, 절 이름의 개칭이 환성지안문파 스님들의 주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백양사의 법맥은 연담계(1998년), 연백문도회(1990년대 중반), 환성지안 문파(1918년)로 파악된다. 시기에 따라 달리 지칭되었으나, 조선후기 이래로 일제시기에 이르기까지 환성지안 문파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1911년 조선사찰령에 의해 사법인가를 받을 때에도 환성지안 선사의 심인을 전해 받은 이들이 차례로 이어왔으며 백양사 본말사(本末寺)는 파조(派祖)인 환성지안(喚惺志安) 선사(禪師)의 법손(法孫)으로 주지(住持)를 삼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백양사는 환성지안의 법손이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사찰이었다. 환성지안의 문손으로 연담유일, 백파긍선이 있었으므로 그들의 문손인 백양사 문도는 <연백회>라고도 할 수 있었다. 또 연담계는 『西翁禪師法語集』에서 보여주듯이 순창 구암사의 백파긍선이 이 법맥에서 제외된 것이다. 구암사의 백파문도와 운문암의 연담문도는 사소한 다툼이 있어 서로 갈등관계에 놓인 적이 있었다. 운문암을 중시하는 백양사의 문도는 순창 구암사의 백파계와 구분하여 그들의 법맥을 연담계로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파는 선운사와 친연(親緣)이 있었던 관계로 원래 구암사에 있었던 백파비가 현재는 고창의 선운사에 옮겨져 있고, 백파의 부도만 구암사에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은 복제된 백파비가 구암사 부도 밭에도 건립되어 있다. 고창 선운사는 일제시기에는 백양사의 말사였지만,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의 제24교구 본사 사찰로 사격이 높아졌다. 이와 같이 서옹스님은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했던 연담유일의 법맥을 계승한 만암종헌의 법사(法嗣)였으므로 자신을 연담계로 칭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3. 백양사 진영각 백양사에서 백양사의 법맥을 최근에 들어와 좁은 의미로 칭하는 경향이 보이지만, 조선후기 이래로 최근에 이르기 까지 오랜 기간 환성지안 문파로 이해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환성지안을 파조(派祖)로 하는 본사급(本寺級) 사찰이 여러 군데 있으므로 문파의 결속과 외연 확대를 위해서라도 백양사의 법맥을 환성지안 문파로 정리하여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3. 환성지안(喚惺志安) 문파(門派)의 사자상승(師資相承) 백양사에 환성지안 문파가 주석하게 된 것은 어느 스님으로 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와 그 법맥의 사자상승이 구체적으로 어떠하였는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환성지안파의 파조(派祖, 문파의 시조) 환성지안을 살펴보고 그 법맥을 이어간 스님들을 간당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1) 환성지안(1664-1729) 법명이 지안, 법호는 환성, 자는 삼낙이었다. 15세 때 출가하여 미지산 용문사의 상봉정원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7세 때 금강산에 순방, 월담설제에게 법을 구했다. 월담 스님은 스님을 대하자 곧 그 근기를 인정하여 의발을 전했다. 27세 때에 직지사에서 모운진언 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학도가 수백 인에 달하였다. 태고보우에서 청허휴정으로 이어지는 선의 적통을 계승한 대선사이며, 통도사, 대흥사, 금산사, 백양사 등 전국 각지를 돌며 화엄의 대종장으로서 화엄학을 강의하였다.
선종5가의 핵심적인 개념을 정리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 『선문오종강요』는 조선후기 선논쟁의 근간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스님은 크게 명성을 얻어 전국을 순방하며 화엄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명성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게 되었다. 금산사에서 화엄대회를 크게 열고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는 중에 수년 전의 금산사에서의 일로 무고를 당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일주일 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그 때 세수는 66세요, 법랍은 51세였다.6)
4. 백양사 진영각 내부 2)설파상언(雪坡尙彦, 1707-1791) 본관은 전주(全州), 속성은 이씨(李氏). 호는 설파(雪坡), 상언(尙彦)은 법명이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1세손으로, 아버지는 이태영(李泰英)이고,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상언(尙彦)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매우 가난하여 스스로 살길이 없었다. 이에 19세 때 선운사로 출가하여 희섬(希暹)의 제자가 되었으며, 연봉(蓮峯)과 호암체정(虎巖體淨) 두 화상에게 게송을 받았다. 또 회암정혜(晦菴定慧)에게도 배웠다. 선종(禪宗)의 계보로 말하면, 서산(西山)의 7세손이자 환성지안(喚醒志安)에게는 손자가 된다. 한때 벽암(碧岩)의 법계(法系)에 속하는 회암(晦庵)의 지도를 받았으나, 특별히 섬긴 스승은 호암체정이다. 1739년 용추사에서 처음으로 강좌를 열었는데, 그때 이미 삼승오교(三乘五敎)에 통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까지는 중국의 청량대사(淸凉大師)[징관(澄觀)]가 지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抄)』 90권이 우리나라 화엄학 연구의 지침서가 되고 있었는데, 내용이 너무 방대하고 어렵게 쓰여 있어 공부하는 사람의 근기에 따라서는 잘못 이해할 가능성이 컸다. 이에 상언은 일일이 주석을 달고 알기 쉽게 소(疏)니 과(科)니 분류하여 각기 귀결됨이 있게 하였다. 또한 승재와 부영 등이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에서 인용한 것에도 틀리고 쓸모없는 것이 없지 않으니 어찌 해인사로 옮겨가 여러 판본을 고증하여 다른 점을 보충하지 않습니까?” 하자, 가서 머물며 비교 고증한 뒤에야 『청량초적결은과(淸凉抄摘抉隱科)』를 펴냄으로써 후학의 길잡이가 되게 하였다. 1770년(영조 46)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에 있는 징광사(澄光寺)에 불이 나서 『화엄경(華嚴經)』 80권 책판이 다 소실되었다. 이에 상언이 탄식하며 “여기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감히 여래에게 예배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재물을 모아 다시 판각하였는데, 사람과 하늘이 도와 봄에 시작하여 여름에 마쳤다. 1774년(영조 50)에는 책판이 완성되자 경상남도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 덕유산에 있는 영각사에 새로 장판각을 세워 보관하였다. 그 뒤 상언은 영각사에 우거하였으며 금강산과 묘향산, 두류산 등으로 편력하면서 참선을 했으며, 지리산의 영원암(靈源庵)에서 10여 년을 지내는 동안 염불을 일과로 하여 하루에 1만 편을 암송했다고 한다. 1791년(정조 15) 1월 3일 기쁜 표정으로 열반에 들었다. 나이 85세, 법랍 66세였다. 이날 제자 27명이 받들어 다비하였는데, 여러 고승이 달려와 통곡하였고 하계의 중생들도 서로 고하며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언은 일찍이 사리(舍利)[화장한 뒤 남는 영롱한 구슬]가 나온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다비함에 상서로운 빛이 7일 밤 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나 끝내 한 개의 사리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들이 영원사와 선운사에 탑을 세웠다. 법맥(法脈)은 휴정(休靜)―언기(彦機)―의심(義諶)―설제(雪霽)―지안(志安)―체정―상언으로 이어지며, 뛰어난 제자로는 긍선(亘璇)·성우(性瑀)·홍척(洪倜) 등이 있다. 그는 화엄의 전통을 고수한 고승이었다. 1) 「白巖山淨土寺橋樓記」
2) 李啓杓,『전남의 전통사찰』Ⅱ(전통사찰총서 7, 사찰문화연구원, 1996); 전라남도․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태학사, 2002, 397-398쪽) 3) 西翁禪師法語集刊行會,『西翁禪師法語集』Ⅱ大衆法語(民族社,1998년, 660-661쪽) 4) 幻惺志安禪師로 되어 있는데 喚醒志安禪師의 誤記이다. 5) 李能和,『朝鮮佛敎通史』上篇(寶蓮閣, 1979年 影印本, 653쪽) 6) 喚醒志安(1664-1729)은 해남 대흥사에 비와 부도가 있으며, 그의 행적은 아래의 것이 참고 된다. 海源,<喚惺和尙行狀>,(한불전9-475~476) 조선불교통사 상편 531쪽, 대둔사지 267-쪽, 동사열전 197-201쪽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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