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5·18 민주화운동과 헌법 전문(前文) 게시기간 : 2022-07-13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7-12 10:1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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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패(成敗)와 시비(是非) 역사는 물론 현실의 세계이지, 당위(當爲)의 세계가 아니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당위’ 즉 마땅히 하거나 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해서 당연히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 당위가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가치 기준도 다를 수 있다. 따라서 나타난 결과에 대한 인과론적 설명이 역사학의 본령에는 더 가깝다. 그래서 역사는 옛것이지만 ‘역사쓰기’는 항상 ‘현재’의 입장에서 해석, 정리되어 ‘다시’, ‘새로’ 쓴다. 개인이 사적(私的)으로 남기는 기록들은 다양하겠지만, 공적(公的) 기록 즉 국가기관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는 그래서 늘 ‘현재’ 이긴 자의 편이다. ‘현재’ 이긴 자가 역사를 자기중심으로 쓰고자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만 그렇다고 그것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18세기 대표적 실학자였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독사요성패(讀史料成敗, 사서를 읽으면 그 성패를 짐작할 수 있다)」란 글에서 “천하의 일은 시대를 잘 만나는 것이 최상이고, 행ㆍ불행(幸不幸)은 다음이며, 시비(是非)는 최하로 여긴다.”1)
고 하여, 통치자들의 재덕이나 선악 또는 천명(天命)에 의하여 성패가 좌우된다는 종래의 관념적인 역사인식에 반대하고 시세(時勢)에 의하여 성패가 좌우된다는 견해를 밝혔다.2) 성호가 포선폄악(褒善貶惡), 즉 시비를 가리는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글의 핵심은 역사의 성패가 시비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승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성패를 정하는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시세, 즉 시대의 흐름이기 때문에 시대의 흐름을 탄 자가 성공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성공이 꼭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당위(當爲)에서 현실로 한편 가치판단의 기준을, 옳음[是]이 이루어지는 것[成], 즉 당위의 관점에서 세우고 역사학을 옳음을 이루기 위한 실천적 수단, 당위의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이른바 실천적 역사학인데, 그런 실천이 마침내 시세의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리하여 어긋났던 성패와 시비가 시세에 의해 일치하여 바로 잡히기도 한다. 이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보려는 5·18 민주화운동의 경우가 바로 그렇다. 5·18 민주화운동은 당위성의 주장에서 당위의 실천으로 전개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실천의 성과들이 쌓여 당위를 현실로 만들어 5·18이 승자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그 승자의 기록의 분명한 상징으로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는 ‘일대 사건’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성패와 시비를 일치시키는 결말을 맞게 되었다. 5·18 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아 그 역사를 가다듬어 보고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되어야 할 당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5·18 민주화운동3) 민주화란 엄숙한 시대적 과제 앞에서 목숨을 건 희생들이 이어졌지만, 총칼을 든 군사 정권이 만들어 내는 극악한 위협과 공포를 떨쳐내고 이에 맞대결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위한 국민적 열정이 모이고 또 지역차별로 인한 분노와 저항의 에너지들이 맞물리면서 1980년 5월 광주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이는 향후 군사 정권에 맞대결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광주민중항쟁이라고도 불리는 5·18 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김대중 석방,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비상계엄 해제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운동이었다. 당시 광주시민은 신군부 세력의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이로 인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 민주화 역행에 항거하였다. 이에 신군부는 강경 진압에 나서 시위진압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폭력적으로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은 군사독재와 지역차별 등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쌓인 여러 사회모순들이 폭발한 것이었고, 거기에는 1960년대 이래 지속된 민족민주운동의 성장이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역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87년 6월 항쟁까지 민주화의 긴 여정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유화 국면이 조성되면서 1985년 중반에 이르기까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과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 투쟁 등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운동은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성장해 나갔다. 특히 이 무렵 학생운동은 국민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민주화 운동의 대중성이 확보되면서 지루했던 민주화 공방은 ‘대중’이란 우군을 맞으면서 승리를 전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운동의 초점은 대통령 직선제 쟁취로 모아졌다. 이는 민주헌법쟁취 천만인 서명운동으로 이어졌고,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터지면서 운동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그 맥락에서 6월 10일 호헌철폐를 외치며 일어난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담고 있는 6·29 선언을 이끌어냄으로써 대장정을 마무리하였다. 20일 동안 수백만 명이 서울과 지방 주요 도시의 거리에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친 ‘민주화의 대드라마’였다. 5·18 광주항쟁이라는 피의 강을 건넌 뒤 7년 만에 민주화 대장정이 마침내 승리의 봉우리에 올라선 것이다. 87년 체제 6월 항쟁의 결과, 1987년 10월 29일 제9차 헌법 개정이 있었다. 개정 헌법 제10호가 확정됨에 따라 제6공화국이 되었다. 그렇게 잦았던 헌법 개정도 이때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6월 항쟁 이후를 “87년 체제”라고 한다. “87년 체제”란 곧 민주화를 뜻한다. 여야 합의에 의해 헌법을 개정함으로써 정치의 민주화를 제도적으로 완성하였다. 2016년 촛불집회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였다. 촛불 소녀들은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어요”라는 피켓을 들었다. 체제를 비판하기보다 체제의 진정성을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더 강한 비판이 되었다. 87년 체제 이후 숱한 도전도 받았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민주주의의 불가역성을 보여 주는 현장이었다. 이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성숙한 민주시민사회의 모습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의 성과 문민정부 출범 후 1995년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졌다. 이에 따라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마침내 〈5·18민주화운동등에관한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루어졌다. 특별법 제1조에서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사건을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라 규정하였고, 이는 1997년 재판에서 “12·12사건은 군사반란이며 5·17사건과 5·18사건은 내란 및 내란목적의 살인행위였다”고 단정하였다. 1997년 대법원은 성공한 쿠데타의 가벌성에 대해 “피고인들(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정권 장악을 통해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헌법질서하에서는 헌법에 의한 민주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폭력에 의해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한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
라고 분명하게 적시하였다. 그리하여 전두환,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고 복권되었지만, 군부의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로 규정되어 사법처리되었다는 점에서 독재 청산 없는 민주화로부터 한 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제 쿠데타는 어떤 경우에도, 비록 성공하더라도, 결코 처벌을 피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님이 분명해졌다. 이것이야말로 광주민주화운동이 이루어낸 민주화의 큰 성과였다. 5·16 군사정변 때와의 차이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5·18 민주화운동’이란 이름으로 국가기념일이 되었다. 그해부터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2011년 5월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승자의 기록이 된 5·18 이처럼 5·18 민주화운동은 우리 현대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되었다. 세계적으로도 민주주의와 인권신장의 측면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내에서 5·18은 아직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호남이란 지역적 사건으로 축소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지역감정에 매몰될 때 역사가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 것인가를 우리는 5·18의 역사에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던 5·18이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중 적폐청산 8번째에 “새헌법 전문에 부마항쟁, 5·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항쟁의 정신을 반영한다”고 하였다. 특히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수록하면서 광주정신, 즉 혁명의 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다만 임기 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못해 반영되지는 못하였다. 20대 대통령이 된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해 11월 후보일 때,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면서 "5·18의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고, 또 우리 헌법 가치를 지킨 정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저는 헌법전문에 헌법이 개정될 때 반드시 올라가야 된다고 제가 늘 전부터 주장을 해왔습니다.”
라 하였다. 그리고 올해 42주년 기념행사에는 윤 대통령을 비롯하여 신정부의 각 부처 장관, 여당 국회의원 100여 명 등이 대거 참석했다.
윤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월 정신은 보편적 가치의 회복이고,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며 “5·18은 현재도 진행중인 살아 있는 역사이며, 이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후손과 나라의 번영을 위한 출발”이며 또 “자유민주주의를 피로써 지켜낸 오월의 정신은 국민 통합의 주춧돌”이라며 “오월이 품은 정의와 진실의 힘이 시대를 넘어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이제 5·18은 여도 야도 구분없이 그 당위를 인정함으로써 승자의 기록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그 정신이 수록되어야 할 당당한 자격을 얻었다. 헌법 전문에 수록되어야 할 당위 헌법 전문이란 헌법의 본문 앞에 붙이는 것으로 헌법 제정의 역사적 의미와 제정과정, 헌법 제정의 목적, 헌법의 지도이념과 기본적 가치질서들을 담고 있다. 이처럼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 법질서의 근본이념을 규정하고 있으므로 헌법 본문을 비롯한 모든 법령에 대하여 우월한 효력을 가진다.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인 제헌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諸制度)를 수립하여”
라 하여 임시정부의 계승을 표방하였고, “민족의 단결”, “사회적 폐습의 타파”, “민주주의 제도들의 수립”을 목표로 내세웠다.
1987년 10월 29일 전부 개정된 현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ㆍ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라 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보다 분명히 내세우고 있으며 4·19 민주이념의 계승이 새롭게 전문에 올랐다. 그리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을 미래의 사명으로 제시하였다. 현행 헌법 전문에 제시된 과제 중 “조국의 민주개혁”은 앞서 보았듯이 5·18을 통해 분명하게 구현되었다. 따라서 4·19가 제헌헌법 전문에서 목표로 내세웠던 “민주주의 제도들의 수립”을 상징하여 현행 헌법 전문에 반영되었듯이 새로 개정될 헌법 전문에는 “조국의 민주개혁”의 상징으로 5·18 정신이 당연히 반영되어야 한다. 우리의 현대사는 5·16, 10·17, 10·26, 12·12, 5·18, 6·10 등등 이런 숫자들만 나열해도 금방 알 수 있듯이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우여곡절 때문에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좌와 우로 진영을 나누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치과잉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화를 넘어 제4차 산업혁명의 성공을, 또 촛불시민혁명이 이룬 민주화의 불가역적 정착을 이루기 위해 진영을 뛰어넘는 협력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생각의 차이는 당연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진영논리화해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서로를 적대시하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공과가 있겠지만, 산업화와 민주화 양쪽이 다 필요했던 것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현대사 인식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현대사의 진정한 승자는 5년마다 바뀌는 정권이 아니라 집단적 현명함과 열정, 헌신으로 오늘의 선진화를 이룬 ‘국민’이다. 따라서 이런 국민의 입장에서 정리되는 현대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는 좌도 우도 아닌 진정한 승자, ‘국민’의 기록이 되어야 할 것이고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은 그 당연한 귀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왔듯이 당연한 것이 당연하게 끝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1) 『星湖僿說』 제20권, 「經史門」 「讀史料成敗」 天下之事所值之勢為上幸不幸次之是非為下
2) 宋贊植, 「星湖의 새로운 史論」(『韓國의 歷史認識』(下), 創作과 批評社, 1976), 370쪽. 이런 인식은 관념적 역사관을 극복하고 객관적인 시세에 의하여 역사의 변동을 설명하고자 한 것으로 역사학을 經學의 연장 내지 應用經學의 처지에서 하나의 독립학문으로 나아가게 했다고 평가받았다. 3) 이하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서술은 고석규·고영진, 『한국사 속의 한국사』3(느낌이있는책, 2016) 제8장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 「현대사 읽기」를 토대로 작성하였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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