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해남의 경관 명소, 어성교와 남천교(홍교)의 중창석비 게시기간 : 2022-07-20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7-19 14:0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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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영조 23) 어성교중창석비(漁城橋重創石碑) “백치(白峙)의 이(李) 제(弟)가 어성(漁城) 아래에서 천렵을 했다. 나는 죽도(竹島)에서 먼저 가고, 창아(昌兒)와 흥아(興兒)는 어제 백치에서 자고 이(李) 제(弟)와 함께 왔다. 근처의 여러 사람들과 송정(松汀)의 이(李) 생(生)이 와서 20여 명이 모였는데 잡은 물고기는 겨우 수십 마리였으니, 별로 흡족하지는 않은 셈이다. 그러나 백치와 송정에서 풍성하게 음식을 차려 크게 잔치를 벌였으니, 오늘의 모임도 쉽게 얻을 수 없는 모임이라 할 수 있겠다.(白峙李弟設川獵於漁城下 余自竹島先赴 昌興兩兒昨宿白峙 與李弟來 近處諸人及松汀李生來 會二十餘人 獵魚堇數十尾 可謂不得意 而白峙松汀設盛饌大享 今日之會亦可謂不易事也) 어성, 백치, 송정, 죽도는 땅이름-지명이다. 이제, 창아, 흥아. 이생, 20여명, 그리고 이 글을 쓴 주인공 “나”. 어성(漁城) 아래 하천에서 천렵을 하는 경관이다. 여름철일 것 같다. 어성은 어디이고 그들은 누구이며 언제일까. 윤이후(尹爾厚, 1636~1699)가 남긴 『지암일기』 1697년(숙종 23) 8월 2일의 기록이다. 당시는 음력을 사용했으니 양력으로 치자면 9월 16일이다. 어성은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백치는 해남군 해남읍 백야리, 송정은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 죽도는 해남군 화산면 금풍리에 있는 마을이다. 창아는 윤이후의 아들인 윤창서, 흥아는 윤흥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하천이라면 이리 저리 연결된 길목일 것이고 응당 다리가 있을 것이다. 저 천렵하기 몇 년전 일기를 보니 어성교가 나온다. “어성교(漁城橋) 가에 이르니, 이석신(李碩臣) 형제가 언역(堰役)을 보기 위해 길가에 나와 앉아 있기에, 나는 잠시 이야기를 하고 일어났다(到漁城橋邊 李碩臣兄弟爲看堰役出坐路上 余與暫話而起).”는 기록. 1692년 4월 11일조이다. 저 다리를 보기 위해 나섰다. 해남군 삼산면 봉학리. 지금 다리는 1980년 시공했다. 시공청은 광주지방국토관리청이다. 연장 거리는 86.5미터. 1925년 『해남군지』를 보니 어성교는 8칸이라는 기록이 있다. 지금의 어성교 옆에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이전에는 어땠을까. 찾다 보니 해남향토문화 전자대전에 “조선시대 어성교의 중수비가 송정마을 창고 앞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윤섭 학우가 사진을 보내 왔다. 삼산면 송정마을의 수로에 걸쳐 있다. 고정희시인 생가 동네. 2021년 4월 23일 현장에 갔다. 마을 앞 길가의 농수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듯 비료포대가 녹아 내린 흔적이 두툼하다. 돌멩이를 주워들고 톡톡톡 떼어낸다. 타고 갔던 택시기사도 거든다. 대시주, 석공 등 기록이 드러나고 “건륭십삼년(乾隆十三年)” 연기도 확인된다. 1748년(영조 24)이다. 가로로 새긴 비제는 “어성교중창석비(漁城橋重創石碑)”. 1925년 기록의 8칸 어성교 보다 180여년이 올라간 기록을 확인한 것이다. “중창”이라 했으니 그보다 앞선 다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저 『지암일기』의 1692년 기록에 보이는 어성교일성 싶다. 어성교가 있었던, 천렵을 했던 포구 어성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37 해남 산천조에 “어성포(魚成浦) : [해남]현의 남쪽 10리에 있다(魚成浦 在縣南十里)”고 나온다.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은 ‘가을 저녁 어성에서 노닐다(秋晩遊魚城)는 시를 남긴다. “긴 하천에 해가 지고 늦추위 밀려오지만 북두성 하늘 너머로 기울어져 돌아왔네 평생 가을다운 멋 얼마나 슬퍼하였던가 오늘 술잔을 입에 대고 억지로 달래보네[日落長川生晩寒 歸來天外斗闌干 平生多小悲秋意 今日含杯強自寬)”. 이 어성포, 어성교는 해남팔경의 남포귀범(藍浦歸帆)으로 형상화된다. 차일 피일 하다가 일년이 지나 다시 조사를 나섰다. 2022년 6월 17일. 탁본을 하기 위함이다. 늘상 여기저기 동행했던 남도불교문화연구회의 윤여정님, 정선종님. 그리고 해남의 학인들도 나선다. 천기철님, 정윤섭님, 김승기님. 송정리 사영주(60) 이장님께 연락하니 “워메 우리는 제대로 관리도 못했는디” 하면서 반긴다. 사윤홍(82세)님과 정기석님(62세)도 길을 가다 멈추어 여러 얘기를 들려 준다. 고산 윤선도선생이 연동에서 문소동, 수정동을 넘나들었던 세곳의 고개, 남새비재, 설렁이재 등의 땅이름도 듣는다. 고산의 손자가 윤이후이고, 그의 『지암일기』에 어성교가 나오니 서로 연계가 된다. 탁본조사를 하면서 자세히 살피니 “건륭십삼년” 연기는 다시 확인되는데, 간지 부분이 깨져서 판독이 어렵다. 두 번째 글자는 “卯”자의 아랫부분으로 읽힌다. 아마도 “丁卯”일 것 같다. “건륭13년”은 1748년, “정묘년”은 그보다 앞선 1747년. 이런 경우 간지를 취함으로 어성교충창석비의 건립연대는 1747년인 셈이다. 대시주(大施主)와 차시주(次施主), 별좌(別座), 공양주(供養主), 석공(石工) 등이 나온다. 가선과 통정 등 품계와 인명이 새겨 있다. 승려도 보인다. 석공은 김해선(金海先)과 승치향(僧致向). 몇가지 의견을 나눈다. 송정과 봉학 마을 역사는 물론 해남의 보배이니 농수로에 그대로 두기에는 너무나도 미안한 일이니, 마을 한쪽으로 옮겨 놓거나 어성교 원자리로 세우고 안내판을 설치하는 방안, 남천교중수비가 발견되어 새로 지은 해남군청 앞에 역사공원을 만들었으니 그쪽으로 가도 좋고. 옇든 관리는 잘 하자는 논의로 마무리. 다음날 들리는 소식. 군청 문화예술과장과 삼산면 총무팀장이 현장 확인을 하였고, 건립을 추진중인 해남역사박물관에 세우기로 하고 우선 면사무소로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해남 학인들의 저력일 것이다. 1781년(정조 5) 남천교중수기비(南川橋重修記碑) 어성교를 찾게 된 것은 2019년 4월 해남읍성 발굴조사 과정에서 발견된 「남천교 중수기(南川橋重修記)」비와 「청류정(聽流亭)」명 표석의 내용을 검토하면서이다. 해남군청 청사를 신축하는데 따른 문화재 발굴조사였고, 그 보고서에 남천교 중수기에 대해 실었다. 이 과정에서 어성교중창비의 소재를 알게 된 것이다. 「남천교중수기」 비는 『해남문헌집』(1989)에 군청 곁에 있다고 하는 등 향토자료에 소개된 적이 있으나 자취를 알기 어려웠는데 다시 드러났다. 「남천교 중수기」비는 1781년(정조 5) 4월에 세운 것으로 남천교를 2가(架)의 홍교로 개건 중수한 기록을 적은 석비이다. 원래는 지금의 해남읍 읍내리와 평동리를 경계로 흐르는 해남천을 가로 지르는 남천교 곁에 있었다. 다리의 형식은 홍교로 구성하여 지명이 ‘홍교’가 되었다. 이 홍교 다리는 일제강점기에 새다리가 들어섰다. 『해남군지』(1925)의 “사칸이고 예전에는 홍교(四間舊虹橋)”라는 구절로 보아 1925년 이전에 홍교는 바뀐 것 같다. 광복 직후 사진에서는 통행로에서 목조 가구도 보인다. “홍교”는 일반 석교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땅이름은 남아서 지금도 ‘홍교’, ‘홍교로’ 등의 역사 지명이 해남인의 생활 속에 깃들어 있다. 홍교가 들어간 상호가 즐비하다. 해남읍성의 남문 밖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큰 하천이 동문 앞으로 흘러 남문 앞을 해자처럼 휘감고 있다. 이 물길을 건너는 다리가 남천교이다. 남문은 관인들이나 주민들이 읍내외로 드나드는 주 관문으로서 일종이 정문 같은 구실을 하였다. 해남을 오가는 이는 누구든 남천교를 지나 남문으로 드나들었던 것이다. 문루는 “정원루(靖遠樓)” 또는 “해안루(海晏樓)”라 하였다. 남천교는 언제 어떤 형태로 설치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큰물이 넘나들며 훼손이 되곤 하여 설치와 중수를 반복했을 것이다. 1778년(정조 2) 여름에 물이 할퀴고 지난 뒤에 흙과 나무를 써서 만든 흙다리로 대신하였다. 그런데 해마다 손을 보는데 주민들의 고통이 뒤따랐다. 이에 1781년(정조 5)에는 홍교로 개건된다. 현감 김서구의 주도에 힘입어 건축할 수 있었고 그 곁에는 정자를 지어 청류정(聽流亭)이라 했다. 남천교 중수에 참여한 이들은 감관(監官) 정석준(鄭碩峻)과 김철주(金喆柱)는 건립 공사를 감독하는 관리이다. 도색(都色) 안종후(安宗垕)는 물자를 동원하는 총괄 책임자이다. 화주승(化主僧)은 공사에 참여한 기술 인력과 시주 등을 총괄하는 직임으로 대흥사 승려 총념(捴念), 총밀(捴密), 봉찰(奉察)이 담당했다. 시주질(施主秩)은 24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석수질(石手秩)은 일반 기능인 2명, 승려 2명이다. 전물(典物)은 제반 물자 보급을 담당하는 직역으로 1명이다. 음식 등을 담당하는 공양은 3인의 승려가 담당했다. 야장(冶匠)과 목정(木丁)은 각 2명씩이다. 그리고 여러 잡역 인부는 승려 장권 등 29인이다. 대흥사를 비롯한 해남 관내의 승려들일 것이다. 남천교 규모는 “홍교로 2개를 얽었고, 높이는 3장(丈), 너비는 10여 척, 길이는 수십 보, 두 개로 새긴 용두에는 풍경을 매달아 아래로 드리웠다.”고 하였다. 현재 단위로 추정해 보면 높이는 9.09m이다. 너비는 300.3㎝, 길이 는 최소 18.2m 이상이다. 남천교의 개건 사례는 주민을 위한 행정의 표본으로 당시 사회의 귀감이 되어 전해졌던 것 같다. 20여년 뒤 인근 강진으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은 김서구 현감과 해남 주민의 남천교 중수 개건 사례를 『목민심서』에 올린다. 1781년 남천교를 홍교로 개건한 이후 이곳의 경관은 “홍교유수(虹橋流水)”라 하여 해남 팔경으로 형상화되어 해남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송파 이희풍(松坡 李喜豊, 1813~1886)은 정원루에 올라 홍교유수(虹橋流水)의 아름다움을 읊었다. 『송파유고』에는 “제해안루(題海晏樓[海南)”로 올라 있다. 이희풍이 활동하던 무렵 해안루가 사진으로 남아 있다. 해안루 시 두 수 가운데 하나는 홍교에 넘치는 물, 푸른 무늬로 갈라지는 광경을 보고 읊었다. 강의 양쪽 언덕에 늘어선 버들은 그늘을 이루어 한 폭 그림 같다. 이윽고 저물녘인가. 누각 동쪽 난간에 비추는 밝은 달빛. 죽지사에 옥퉁소로 화창을 한다. 그 동쪽에 청류정이 있었다. 어쩌면 두 번째 ”홍교수창록생의(虹橋水漲綠生漪)”의 시는 청류정에서 읊었을 것 같다. 홍교에 넘치는 물이 푸른 무늬를 이루고 虹橋水漲綠生漪 양안에 드리운 버들가지가 그늘 그림같구나 楊柳陰陰兩岸乖 누각 동쪽 난간에 비추는 밝은 달빛 아래 畵閣東欄明月下 죽지사(竹枝詞)에 옥소(玉簫)가 화답한다 玉簫和唱竹枝詞 「남천교중수기」비의 경우 원 자리로 옮겨 세우는 것이 역사성 차원에서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현장은 도시화가 이미 진행되어 버렸다. 따라서 읍내의 상징적인 공간에 옮겨서 보존했으면 한다. 군청 앞 광장에서 홍교로가 보이는 곳, 신청사 내에 마련 예정인 전시관이나 그 가까운 곳이라면 더 많은 주민들은 물론 해남을 찾는 이들도 가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청사 전시관에는 옛 지도 등 자료와 함께 역사성과 “청류유수(聽流流水)”의 상징성을 설명하는 공간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앞 구절은 『해남읍성』발굴보고서에 자료로 실은 남천교중수기비의 검토 논문의 맺음말에서 제안한 것이다. 근래 들으니 해남군청사 앞에 따로 세우고 안내판도 마련했다고 한다. 주민들의 심성속으로 다시 파고 든 것이다. 지역 산천의 경관은 보통 팔경으로 전한다. 해남 팔경은 금강폭포(金剛瀑布, 해남 금강골), 미암청풍(眉岩淸風, 금강산 미암산), 홍교유수(紅橋流水, 해남읍 홍교), 호산명천(葫山名泉, 호산 문필봉), 연봉제월(蓮峰霽月, 덕음산), 두륜귀운(頭輪歸雲, 두륜산), 남포귀범(藍浦歸帆, 어성교), 은사효종(隱寺曉種, 은적사) 등이 전해 왔다. 오랜 세월에 홍교유수, 남포귀범 2경이 사라졌다고 했는데, 두 곳의 석교중수중창비 발견을 계기로 되살려졌으면 한다. 참고문헌 김희태, 「해남 ‘남천교 중수기’ 비의 내용과 성격 검토」, 『해남읍성』, 전남문화재단 전남문화재연구소·해남군, 2021.
윤이후 지음 ; 하영휘 외 옮김, 『윤이후의 지암일기』, 너머북스, 2020. 디지털해남문화대전[http://haenam.grandculture.net]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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