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공모전 수상작] 한시로 읽는 호남사람 이야기 게시기간 : 2022-08-0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7-27 16: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원고 공모전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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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는 일찍이 진도 유배 시절에 만난 예능인〔歌者〕 박덕인을 위한 헌시(獻詩)를 지었는데, 『은파유필(恩波濡筆)』과 『무정존고(茂亭存稿)』 등에 「가객 박덕인에게 주다〔贈歌者朴德仁〕」라는 작품명으로 전하고 있다. 이 글은 이 헌시를 각색한 것인데, 서술의 편의를 위해 당시의 시점에서 정만조가 1인칭 관찰자가 되어 내용을 전개하였다. 1. 박덕인을 만나기까지 나는 1896년, 그러니까 고종 임금이 왕에 오른 지 35년째 되던 해에 전남 진도군 금갑도(金甲島)로 유배되었습니다. 나는 지난해까지 궁내부 비서관과 장례원장례, 시종원시종 비서원승 전의사겸부장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8월 20일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0월의 춘생문(春生門) 사건에 연루, 올해 1월 12일에 면직되어 감옥에 갇혀 있다가 3월 6일에 15년 동안의 유배 명을 받고 금갑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금갑도로 가기 위해 감옥에서 나와 인천을 향해 갔습니다. 그리고 화륜선(火輪船)을 탔는데, 나를 포함해 함께 배를 탄 유배인은 총 여덟 사람이었습니다. 이 화륜선은 증기선의 일종으로, 4년 전 1882년부터 서양에서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된 배입니다. 주로 장거리를 갈 때 사용한 운송 수단이지요. 이 화륜선은 마치 배에 바퀴가 달려 있는 것처럼 수레보다 빨리 달려갔습니다. 화륜선을 타고 가다가 유배인 여덟 사람 중에 세 사람이 목포에서 내렸는데, 나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어 무안을 거쳐 잠시 큰 바람을 만나 우목도(牛目島)에 정박한 뒤 우수영, 녹진 등을 지나 금갑도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이기 때문에 순검(巡檢, 순경)이 따라 다녔는데, 이제 이들도 돌아간다 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유배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배지 금갑도는 많이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었습니다. 금갑도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학을 사랑하는 진도 사람 박진원(朴晉遠)ㆍ이남언(李南彦) 등이 찾아와 문예를 시험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금갑도로 유배 오기 3년 전에 하정(荷亭) 여규형(呂圭亨)이 금갑도로 유배 왔었는데, 그때 이 박진원ㆍ이남언 등이 한시 창작 방법을 익혔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규형이 돌아가고, 이어 내가 이 금갑도로 유배 오자 이들은 자신들의 한시 창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를 찾아와 시험할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처럼 진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점차 유배지에 익숙해져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도 소리꾼 박덕인을 만났습니다. 내가 금갑도로 유배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습니다.
2. 박덕인은 누구인가? 박덕인은 1827년에 진도군 임회면 삼막리에서 세습무계 박헌영(朴憲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가 소리꾼이 된 것은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요? 아무튼 소리꾼이 되었는데, 부인이 세상을 뜨자 낙담한 나머지 이십 년 동안 노래 부르는 일을 완전히 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배인을 위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 이때 박덕인의 나이는 일흔 살이 넘었고, 이십 년 동안 노래 부르는 것을 완전히 폐했다고 하나 그 실력이 남아있었습니다. 노래는 물론이요, 춤도 잘 추고, 가야금과 퉁소 부는 것까지 다재다능, 그야말로 만능 예능인이었습니다.
3. 박덕인을 위한 헌시(獻詩), 열 수를 짓다 나는 박덕인이 춤을 추고, 가야금과 퉁소를 불며, 노래 부르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바치는 시 열 수를 연작으로 지었습니다. 여러 예능을 감상한 것에 보답하고, 무엇보다 그가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첫 한시 작품을 통해 박덕인이 소리꾼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적었습니다.
박덕인은 수년 동안 절에서 꽹과리를 치고, 또한 진도에서 노래를 실컷 불렀다 합니다. 가야금을 치고 퉁소 부는 실력은 원래 꽹과리를 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가서 노래 실력을 익힌 것이 아니라 진도에서 그것을 다졌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세습무계였기 때문에 자연히 그 영향을 받아 꽹과리와 노래를 익혔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부르는 노래 소리가 내 귓가를 스쳐지나가자 매우 놀랐습니다. 그 소리가 마치 하늘 가득한 찬바람이 맑은 노래를 내린 듯했기 때문입니다. 이어 두 번째 시를 지었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박덕인은 이십 년 동안 모든 예능을 폐했습니다. 그 예능을 나는 “가야금을 끊게 했다”라 했습니다. 어디 가야금만 끊었겠습니까? 노래 부르는 것도 폐했습니다. 그래서 “이원을 문 닫은 지 이십 년이 지났다”라 한 것입니다. ‘이원(梨園)’은 원래 당나라 현종 때 금원(禁苑) 안에 있던 동산 이름인데, 현종이 자제 300명을 선발하여 이곳에서 속악(俗樂)을 가르치고, 또 수백 명의 궁녀들로 하여금 예능을 익히도록 했던 장소입니다. 나는 박덕인이 예능을 익혔던 곳이 바로 당나라 이원과 같이 느껴져 이렇게 비유한 것입니다. 박덕인이 예능을 폐한 사연을 속 시원히 말할 수 없으나 지금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듣지 못한 세월이 상당히 오래된 만은 사실입니다. 드디어 이제 박덕인이 부른 노래를 들었는데, 그것은 이별가였습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시를 소개합니다.
노래 부르고 듣는데 술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술은 깨진 옥병에서 마치 무지개가 이는 듯이 나와 그것을 마신 나는 그만 취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유배인이기 때문에 작은 슬픈 일도 슬프게 생각되는데, 날아가던 새가 슬피 우는 소리로 슬픈 노래를 돕는 듯했습니다. 그 슬픈 노래란 바로 이별가를 말합니다. 박덕인이 부르는 이별가를 들으면서 나는 “도대체 누구 집 아녀자가 이별 많이 했을까?”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나는 술에 취해 노래를 듣다가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는데, 여인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노래 소리 끊기고 이번에는 박덕인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시에서 그것을 읊었습니다.
이제 박덕인은 노래는 그만 부르고 춤을 추었는데, 나는 이것을 다섯 번째 두 번째 구에서 “어깨 산과 눈 물결만 움직인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깨를 움직이고, 눈이 움직이는 모습을 이렇게 나타낸 것입니다. 박덕인이 춤을 추니까 마치 뜰의 꽃과 새들도 그에 맞추어 느리게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박덕인의 춤사위는 계속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으로는 노래도 불렀는데, 이것을 ‘영산 촉절가’라 했습니다. ‘촉절’이란 속도를 올려 점차 빠르게 달린다는 의미를 지녔으니 앞에서 들었던 이별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박덕인이 켜는 가야금 연주 소리를 들었는데, 그 내용은 여덟 번째 시에서 읊었습니다.
박덕인은 음악을 사랑하는 예능인입니다. 때문에 비단 같은 가야금을 켜며 세월이 흘러가는 것은 안타깝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벌써 일흔 살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세었으니 한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 그가 켜는 가야금 소리는 왜, 이렇게 구슬프게 들리는가. 마치 대나무에 비가 내리듯이 슬프게 들립니다.
4. 박덕인이 기록되길 바라며 나 정만조는 진도 예능인 박덕인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박덕인을 위한 헌시 마지막 열 번째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진도는 섬이기 때문에 ‘위수’라 지칭했습니다. 나는 박덕인처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구에서 “영문 노래에 화답할 자 예로부터 적었다”라 했습니다. 즉, 박덕인의 노래를 ‘영문 노래’로 지칭한 것입니다. ‘영문’은 전국 시대 초나라의 수도 언영(鄢郢)을 가리킵니다. 『문선』 「대초왕문(對楚王問)」 글에 ‘하리파인’, ‘양아해로’, ‘양춘백설’ 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리파인’을 부르기 쉽기 때문에 따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고, 그 다음 ‘양아해로’는 ‘하리파인’보다 조금 더 어려워 따라 부르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며, ‘양춘백설’은 고난도의 노래라서 따라 부르는 사람이 적었다 합니다. ‘영문 노래’는 바로 ‘양춘백설’을 가리킵니다. 곧, 박덕인이 노래를 워낙 잘 불렀기 때문에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세월이 흐른 뒤에 박덕인의 이름이 악부에 올라가길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도 지금 지은 내 시를 참고삼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고자료〉 정만조, 『은파유필』
정만조, 『무정존고』 박명희ㆍ김희태, 『역해 은파유필』, 도서출판 온샘, 2020, 215~221쪽. 진도문화원, 『보배섬 진도의 그때 그 시절』, 21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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