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정유재란 일본에 잡혀간 호남인, 시에 담긴 그의 애상(哀傷)_강항의 소회시 게시기간 : 2022-07-28 13: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7-2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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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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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항이 지은 소회시 이 시는 강항(1567~1618)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가던 중에 지은 것으로 『간양록』 속 「난리를 겪은 사적」의 첫 번째 작품으로 등장한다. 시의 분위기는 대체로 슬프고도 비통하다. 내용 이해를 위해 문장으로 다시 적어본다. 삼경 깊은 밤 달빛은 밝은데, 어디에선가 죽지사 노래가 들린다. 이웃 배에서 그 죽지사 노래를 듣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데, 그 중에 초나라의 신하 즉, 나의 옷이 가장 젖었다.
시에서 말한 ‘죽지사’는 본래 각 지방의 풍토를 읊은 시가로, 당나라 때 시인 유우석(劉禹錫)이 낭주(朗州)에 유배 갔을 때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의 구가(九歌)를 모방하여 죽지가(竹枝歌) 아홉 편을 지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초나라의 신하’는 초나라의 충신 굴원을 말한다. 강항은 자신을 ‘초나라의 신하’로 지칭함으로써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간접적으로 알렸다. 사실 이 시는 짓게 된 배경이 있다. 『간양록』 속 「난리를 겪은 사적」에 적힌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이날 일본 여자가 밥 한 사발씩을 사람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껍질도 제대로 벗기지 아니했고, 모래가 절반을 차지했으며, 생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뱃사람들은 배가 매우 고파서 깨끗이 씻어 말려서 요기를 했다. 밤중에 이웃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옥(玉)을 쪼개는 듯하였다. 나는 온 집안이 참몰당한 뒤부터 두 눈이 말라붙었는데, 이날 밤에는 옷소매가 다 젖었다. 따라서 절구 한 수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강항, 『간양록』 「난리를 겪은 사적」 중에서) 강항은 1597년 9월 23일에 일본인에게 처음 잡혔다. 이 글은 강항이 일본인에게 잡힌 뒤 9일째 때의 상황을 적은 것인데, 음식은 매우 변변치 않았고, 이웃 배에서 여자가 울다가 옥을 쪼개는 듯한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그 여자가 부른 노래는 강항이 시 첫 구에서 말한 죽지사를 가리킨다. 아무튼 강항은 그 이웃 배의 여자가 부른 노래에 깊이 감동 받아 옷소매가 다 젖을 정도로 울고 또 울었다. 그 여자가 부른 노래는 어쩌면 앞으로 전개될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피로인(被虜人, 적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삶을 알려주는 전주곡과 같은 것으로 생각되었던 것일까? 이 때문에 「난리를 겪은 사적」의 첫 번째 시는 슬프고도 비통할 수밖에 없었다.
2. 피로인(被虜人) 강항, 그리고 시에 표출된 절의 정신 강항의 자는 태초(太初)이고, 호는 수은(睡隱)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남 영광군 불갑면 유봉리에서 태어났다. 또한 조선 전기 문장가로 알려진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의 5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서 학문을 연마했다. 22세(1588, 선조21) 때 진사과에 합격하였고, 27세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교서관의 박사를 거쳐 공조ㆍ형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30세(1597, 선조30)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근친(覲親, 어버이를 뵙는 것)한 뒤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후 조선과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정유년에 또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다. 일본이 침략하기 직전에 강항은 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이 되어 양곡을 운반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이때 통제사 원균(元均)이 한산도에서 패전하고 일본군이 남원을 침범하자 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항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영광으로 돌아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 의병 수는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일본군이 노령(蘆嶺, 전북과 전남의 경계에 뻗은 산맥)을 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들은 그만 흩어지고 말았다. 일본군이 영광 근처까지 침범해오자 강항은 배 두 척을 마련하여 가족들을 태운 뒤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있는 통제영(統制營)을 향해 갔는데, 그만 적의 배를 만나 피로인이 된다.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이때가 1597년 9월 23일이었다. 1597년 9월 23일에 피로인이 된 강항은 1600년 5월에 부산을 통해 고국으로 돌아온다. 피로 생활을 하던 중에 강항은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고, 또한 대략 여섯 차례 탈출을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진 못하였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피로 생활 중에 보고 들은 것을 글로 기록하는데, 그 책 이름이 바로 『건거록(巾車錄)』이다.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 『건거록』은 훗날 강항의 제자들에 의해 『간양록』으로 개칭된다. ‘건거’란 말이 지나치게 겸손한 뜻을 지니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간양’이란 ‘양을 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한 무제(漢武帝) 때 흉노(匈奴)로 사신 간 소무(蘇武)가 북해(北海)에서 양을 치며 지낸 데서 온 말로, 억류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그 책 이름을 『건거록』 대신 『간양록』이라 부르고 있다. 특히, 『간양록』 속의 「난리를 겪은 사적」 부분은 강항이 피로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글인데, 군데군데 감정을 담은 시를 수록하였다. 『간양록』 속의 「난리를 겪은 사적」 부분에 수록된 시는 총 17편. 이예주(伊豫州, 이요주) 대진성(大津城, 오츠성)에서 동지를 맞이했을 때, 1598년 1월에 명나라가 울산에 이르러 왜적을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2월 5일에 평의지(平義智, 히라요시)의 부곡(部曲) 백여 명이 귀순(歸順)하고 나머지 항복하는 왜도 서로 잇따르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금산(金山) 출석사(出石寺)의 중이 부채에 시를 요청했을 때, 대진성에 올라갔다가 느낌이 일었을 때, 대진성 승사(僧舍)에서 중이 시를 지어주었을 때, 좌도(佐渡)의 아버지 백운(白雲)의 집에 현학(玄鶴)이 있어 감회가 일었을 때, 무안현의 아전 서국(徐國)이 대진으로 사로잡혀 가서 시를 요청했을 때, 1598년 6월 대판성(大阪城, 오사카성)으로 가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 병선(兵船)이 왜적에게 빼앗기게 되어 우치하(宇治河, 현재 교토시 남부의 강) 입구에 와 있음을 보았을 때, 대판성에서 복견성(伏見城, 후시미죠)으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전라 좌병영의 이엽(李曄)이 무사인데도 시를 지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진주의 세 사람 강사준(姜士俊)ㆍ정창세(鄭昌世)ㆍ하대인(河大仁)을 만났을 때, 기묘명현(己卯名賢)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손자요, 학사(學士) 김권(金權)의 조카인 흥달(興達)ㆍ흥매(興邁) 형제가 사례했을 때, 일본 승려 조고원(照高院)이 부채 열 자루를 부쳐주었을 때,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조선인 강사준(姜士俊)이 술을 가지고 왔을 때, 일본 승려 가고(加古)가 시를 요청했을 때, 1600년 4월 2일 도쿄를 출발했을 때 등등 강항은 틈틈이 시를 지어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타내보였다. 이 중에서 풍신수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지은 시를 인용해본다.
당연히 강항은 풍신수길의 죽음이 반가웠을 것이다. 당시 풍신수길이 죽자 북쪽 교외에 매장하고, 그 위에다 황금전(黃金殿)을 짓고, 왜승(倭僧) 남화(南化)가 큰 글씨를 써서 그 문에 “크게 밝은 일본이여, 한 세상 호기로움 떨쳐라. 태평의 길을 열어 놓아, 바다 넓고 산 높도다.〔大明日本 振一世豪 開太平路 海濶山高〕”라고 새겼다. 이를 본 강항이 붓에 먹을 발라 그 옆에다 위의 시를 써서 풍신수길이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켰던 일을 비꼬았던 것이다. 일본에 잡혀있는 상황에서 풍신수길을 비판한다는 것은 보통의 마음가짐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비판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으로 가던 중에 죽음을 여러 번 넘긴 강항. 이 때문에 죽음에 초연해졌을까? 이처럼 강항은 위험한(?) 시를 지어 그의 절의 정신을 직접 나타내는 과감함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묘수원(妙壽院)의 일본 승려 등원성와(藤原醒窩, 후지하라 세이카)가 걱정스런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대합(大閤)의 총전(塚殿)에 붙은 글씨를 보니, 바로 귀하의 글씨였습니다. 왜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않습니까?”
(강항, 『간양록』 「난리를 겪은 사적」 중에서) 강항은 당시 등원성와에게 주자학을 전수해주었으니, 이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가 된 셈이다. 아마도 등원성와는 진정 강항이 염려스러워 위와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즉, 자신에게 주자학을 전수해 준 강항이 혹시 해를 입지 않을까는 하는 노파심에서 한 말인 것이다. 강항과 등원성와의 우정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이처럼 강항은 등원성와에게 주자학을 전수하는 등 일본에서 학문을 전수하는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이 때문에 강항의 학식을 높이 산 일본 막부는 강항에게 귀화를 간곡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강항은 일본 막부의 이러한 요청을 거절한 뒤 1600년 5월 드디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3. 후대인에 남겨진 강항 절의 정신 강항은 고국으로 돌아온 뒤 선조 임금에게 일본의 사정(事情)을 자세히 보고했을 뿐 아니라 승정원ㆍ예조ㆍ비변사 등에 자문해 주었다. 그리고 1602년 대구 교수, 1608년 순천 교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며 부임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향인 영광군 유봉 마을에서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에게 강항의 절의 정신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절의’의 사전적 의미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 꿋꿋한 태도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이다. 즉, 어떤 모진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태도 또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일본의 피로인 강항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으나 꿋꿋한 태도를 반드시 지녔고,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강항의 이러한 삶의 자세는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말할 수 있다.
<참고 자료> 강 항, 『간양록』(내산서원 소장)
강 항, 『수은집』 이을호 역, 『수은간양록』, 수은 강항선생 기념사업회, 1980. 김희태, 「수은 강항의 행적과 관련문화자원의 활용」, 『영광 내산서원 필사본』 상, (재)한국학호남진흥원, 2021. 박세인, 「睡隱 姜沆의 시문학 연구: 內傷의 표출 양상과 치유적 형상을 중심으로」, 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9.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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