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부용정(芙蓉亭), 연못 도매(盜賣) 사건 게시기간 : 2022-04-13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4-11 16:5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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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칠석동에 부용정(芙蓉亭)이란 이름을 가진 정자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초기 김문발(金文發, 1358-1418)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고려말에 태어나 조선 건국 직후에 벼슬을 했다. 태종실록에 그의 졸기(卒記)가 있다. 고려 때인 1386년에 남원과 보성 등에서 왜구를 물리쳐 이미 이름이 나 있었다. 조선 초기에 충청도, 전라도 수군도절제사에 임명되었고 1418년에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그 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칠석마을에 삶의 터를 잡고 정자를 세웠다. 그리고 그 앞에 못을 팠다. 정자를 세울 때는 대개 주변 환경도 함께 조성했다. 이 때 크든 작든 못을 만들기도 했다. 김문발도 역시 못을 파 물을 대고 연꽃을 심었던 듯하다.
부용(芙蓉)은 연꽃을 말한다. 송나라 성리학자였던 주렴계(周濂溪)는 <애련설>을 지어 연꽃을 칭송했다. 연꽃은 진흙밭에서 자라면서도 진흙의 더러움을 타지 않는다. 우아하게 위로 뻗은 연대, 크고 둥근 푸른 빛 연잎, 흰색 분홍색 꽃잎들은 깨끗하게 펼쳐지고 또 아름답게 피어난다. 실제로 연꽃이 있는 못으로 맑고 깨끗한 물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 위에 피어있는 연꽃이나 연잎에는 더러운 물방울, 진흙, 먼지 등이 거의 없다. 깨끗하기가 이를 데 없다. 주렴계는 연꽃의 이런 생리(生理)에 감탄했다. 김문발이 정자 이름을 부용으로 지은 것은 주렴계의 마음과 같았다.
『광주읍지』에 나온 칠석동의 부용정. 남평천과 황탄(黃灘) 사이에 위치해 있다. 이미지출처:한국학호남진흥원. 그가 부용정을 언제 세웠는지 명료하지 않다. 『광주목지』에 의하면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지만 젊은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부용정을 건립했다.’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411년(태종 11년) 충청도 수군도절제사였을 때 ‘병으로 사직했다.’는 기록이 있다. 50대 초반으로 이 시기에 부용정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부용정에 관해 『광산지(光山誌)』에서는 ‘광주 남쪽 30리에 있으며, 전 감사 김문발의 별서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렇게 보면 부용정은 김문발이 자신의 거처에 지은 정자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용정은 개인 정자라는 의미를 훌쩍 뛰어 넘는다. 김문발은 칠석동에 머물면서 송나라 때 여대균(呂大均) 형제가 남전현에서 시행했던 향약제도를 본받아 향약을 시행했다. 향약을 실행할 때 이용했던 공간이 부용정이었다. 김문발은 자신의 개인 정자로 지었지만 향약을 시행하면서 칠석마을 공공의 공간으로 기꺼이 제공했다. 현재 부용정을 설명하는 글들은 광주 향약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부용정은 더 이상 개인 정자에서 아닌 광주 향약을 상징적인 공간인 것이다. 판 놈은 돈 챙겨 도망가고 애먼 사람만 매 맞고 속이 타다:부용정 연못 도매(盜賣) 사건 1838년 2월 즈음, 동복에 살고 있던 김창신(金昌臣, 1774-1847) 등 몇 사람이 모였고 남평에 사는 광산김씨 일가에도 모임을 요청했다. 얼마 전 들은 얘기 때문이었다. 김씨 일족인 김재원(金在源)이 부용정 앞 연못을 아무도 모르게 팔아버렸다고 했다. 훔쳐서 몰래 판 도매(盜賣)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연못을 산 사람은 김유성(金有成)이란 사람이었다. 4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광산김씨 자긍심의 기반인 부용정 일부분을 떼어내고, 그것도 광산김씨 일족이 스스로 팔아버렸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분노를 일으켰다. 그것도 누구도 알 수 없도록 몰래. 판 놈이나 산 놈이나 똑같이 ‘훔친’ 건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김유성은 연못을 터서 못물을 다 빼내고 논으로 만든다고 공언했다. 김씨 일가들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동안의 사연을 글로 써 관청에 호소했다. 연못 매매를 없던 일로 되돌려 놓고자 했다. 글에는 그들의 분노, 울분, 우려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지난 해 저희들 집안의 불초한 종인 김재원이 부용정 연못을 몰래 팔아 치운 일로 소장을 올렸습니다. 그 때 ‘김재원으로 하여금 김유성에게 연못값을 지급하고 하고 도로 무르는 일이 마땅하다.’고 처결하셨습니다. …중략… 김유성은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이인갑, 김화보 등과 더불어 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정자지기로 하여금 정자의 논에 물도 대지 못하게 합니다. 어찌 이런 풍습이 있을 수 있습니까.
김재원을 찾아 연못 판 값을 받아내 김유성에 되돌려주고 매매를 없었던 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김재원은 이미 도망쳐버렸다. 그는 가난하고 가진 것이 없어 이리저리 떠돌며 생활했다, 생계를 위해 연못을 팔아 돈을 챙겨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도망갔다. 김유성은 돈을 돌려 받지 못하자 연못 용도를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버텼다. 또 나중에 알고 보니 이인갑(李仁甲)과 김화보(金和寶)도 매매 당사자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도 연못 구매 대금을 돌려 받지 못할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씨 집안 사람들이 관청에 소지와 단자를 제출하여 연못을 되찾으려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연못을 마음대로 처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돌려 받지 못했으니 연못은 우리들 것’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했다. 연못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도 자신들이 정하겠다고 하면서 연못의 물조차 막고서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1838년2월에 김창신 등 17명이 연서하여 광주목사에게 올린 소지. 김재원이 부용정 연못을 몰래 판 일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재원과 김유성을 잡아다 대질하라고 처결했다. 이미지출처:한국학호남진흥원
1838년 3월에 올린 단자. 김유성과 김재원 두 사람을 잡아 오라고 했고, 김재원은 연못값을 물어주고 환퇴하라는 처결을 내렸다. 이미지출처:한국학호남진흥원 당시 부용정에는 정자지기가 딸려 있었다. 김문발이 칠석마을에 터를 잡고 부용정도 세워 삶의 자리를 마련하자 후손들은 줄곧 이 터를 지키며 살았다. 김선명(金善鳴)대에 동복으로 이주 하면서 1695년에 부용정 인근 땅을 외손에게 팔았다. 이후 이씨(李氏), 신씨(辛氏)들이 터로 삼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정자지기가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 부용정과 연못은 김씨 집안에서 계속 지켰던 듯하다. 정자지기는 연못 바로 아래에 있는 논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 논물은 연못으로부터 끌어다 썼다. 그런데 이인갑과 김화보가 연못 물을 끌어다 쓰지 못하게 막았다. 물이 없으면 논농사를 할 수 없다. 정자지기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고 생계는 막막해졌다. 그는 두 사람에게 물을 쓰게 해달라고 매달리며 애원했고, 한편으로는 김씨 집안 사람들에게 알려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김창신 등은 이인갑과 김화보의 행태가 부당하고 패악스럽다고 관청에 호소하여 해결해주기를 요청했다. 광주목사도 ‘이런 행패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경고를 무시하고 물을 대주지 않았다. 결국 폭력사건으로 확대되었다. 김씨 일족들이 연달아 관청에 호소하고 정자지기도 물을 대도록 해달라고 계속 요청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인갑과 김화보가 정자지기 부자(父子)와 할머니를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일로 동복뿐 아니라 칠석마을도 떠들썩했다. 김씨 집안의 한 사람이 연못을 훔쳐서 판 일도 떠들썩해질 일인데 마을 내 폭력사건까지 발생했기 때문이다. 김창신을 비롯한 김씨 집안 사람들은 소지나 단자를 제출하여 ‘연못은 김재원이 훔쳐 판 것이므로 마땅히 되돌려 받아야 하고, 연못물을 끌어다 논에 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관청에서 압력을 행사해주기를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불만을 드러내고 얼굴을 붉히며 구타사건까지 발생했다. 훔쳐서 몰래 판 놈은 돈을 챙겨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대신 구타는 정자지기 가족이 당했고 김씨 집안 사람들의 속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부용정을 지켜라 -연못이 있어야 ‘부용정’도 있나니 연못이 몰래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김창신 등 동복에 사는 김씨 집안 사람들은 분노와 우려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김문발이 향약을 실행했던 그 때부터 부용정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명소였다. 누구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광산김씨, 칠석마을, 나아가 광산(光山)의 긍지를 담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것이 광산김씨 집안에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였다. 연꽃 심은 못이 없어지면 난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부용정이란 정자의 정체성이 약해지고 역사가 없어질 수 있었다. 정자 이름들은 각각 그 근원이 있다. 정자에 대한 기(記)를 쓸 때 정자 이름의 연원을 거의 반드시 밝힌다. 달, 소나무, 구름과 같은 구체적인 사물에서부터 주변 경치의 아름다움이나 정자 주인의 성품이나 삶의 성향에 근거하여 이름을 짓기도 한다. 그 만큼 명명의 근거는 다양하다. 부용정은 ‘연못’에 명명의 근거를 두었다. 연꽃의 깨끗하고 고결한 모습을 발견하고 칭송했던 주렴계의 뜻을 품었다. 이름은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이름을 통해 드러난다. 부용정의 이름과 정체성의 근거는 바로 그 연못이다. 연못이 없어지면 정자 이름의 연원도 사라지고 정자 안에 스며 있는 정신과 정체성마저도 뿌리를 둘 데가 없어지는 것이다. 지금 부용정 주변에는 연못이 없다. 현판이 있어 그것이 부용정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정자가 ‘왜 부용정?’인지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 설명을 들어야 알 수 있다. 김창신 등은 이를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지와 단자에서 ‘부용이라는 이름은 연못에서부터 나왔으므로 정자가 아무리 우뚝하게 서 있어도 연못이 없으면 이미 정자의 호칭을 잃은 것’이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또 부용정은 김문발이 살던 때부터 향약을 실시하던 장소였다. 뛰어난 경치를 감상하며 세상살이 긴장감을 풀어내는 쉼터에 그치지 않았다. 마을 구성원들이 함께 하며 서로 도우며 살아가려는 마음을 환기시키는 공간이었다. 마을 풍속을 순화시켜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어가려는 뜻을 다지는 공간이었다. 경치나 즐기며 시구를 읊어대는 흥취 공간이란 의미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광주목사에게 올리는 글에서 ‘(참판공이) 당시 선비들과 향약과 향좌목을 강론하던 곳이므로 사람들이 이 정자를 드높이고 그리워하는 것이지 그저 이리저리 거닐고 다니면서 완상하기만 하는 장소는 아니’라고 하였다. 김창신 등은 부용정이 그 이름을 잃으면 정자에 스민 향약 정신과 그 역사성조차 희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용정이 의미나 역사성이 전혀 없는 건조한 건물로만 달랑 남게 될까 염려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현실적이면서 정자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인갑과 김화보는 정자지기가 연못 물을 쓰지 못하게 겁박했고, 정자지기는 불만에 차 있었다. 논농사는 생활 기반인데 물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생활 기반이 없어지면 정자지기는 정자 관리일을 그만두게 될 터이다. 관리자가 없어 정자를 관리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 허물어지고 결국 완전히 무너져 없어질 수도 있다. 김씨 일가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처음 정자를 지을 때 연못은 정자 주변을 꾸미는 부속적인 장소였다. 이제는 거꾸로 되었다. 연못은 정자 정체성의 뿌리가 되었고 정자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정자가 살아남느냐 없어지냐는 연못에 달리게 된 셈이다. 이리저리 살펴봐도 부용정과 연못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정자와 연못은 서로 짝을 이루고 한 묶음으로 있어야 했다. 김씨 집안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부용정이다. 그러나 부용정이 부용정다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못이 필요했다. 연못만 따로 떼내어 훔쳐서 팔아버린 김재원에 대한 분노심, 부용정의 뿌리를 없애려는 행태에 대한 우려심과 위기 의식이 없을 수 없었다. 김창신을 비롯한 김씨들이 광주목사에게 호소한 것은 분노, 우려, 위기심에서 나온 일이고 부용정에 걸맞은 짝을 찾기 위한 일이었다. 지금도 의연한 부용정 부용정은 지금도 칠석마을에 있다. 기와를 얹은 2층 목조 건물이다. 고싸움과 관련한 교육관, 고싸움을 할 수 있는 넓디 넒은 마당, 마을의 집들이 둘러 싸고 있다. 연못은 비록 없어졌어도 부용이란 이름을 달고 조용한 마을 안에 서 있다. 겉으로는 평온함을 뿜어내지만 그 동안여러 고난을 겪었다. 일찍이 김창신이 40대였을 때 안보원이란 사람이 부용정과 연못 부근에 바짝 붙여 그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었다. 이 일로 집안 어르신이었던 김만직(金萬稷, 1738-1819)과 함께 관청에 드나들었다. 관청에서는 ‘무덤을 파서 옮기라.’고 처결을 내렸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아 애를 먹었다. 그런데 겨우 2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부용정 연못이 몰래 팔리고 그로 인해 폭력사건까지 일어났다. 김창신은 또 다시 소지와 단자를 들고 관청에 드나들어야 했다. 부용정은 이 일들을 다 보고 들었을 터이다. 비록 자기 이름의 연원이었던 짝을 잃었어도 말없이 의연하게 서 있다. 부용이란 이름의 고결한 뜻과 광주 향약 정신을 여전히 품은 채. <도움 받은 글들> 권수용(2022), 『광주향약1』, 한국학호남진흥원.
김희태, 김대현(현판 번역)(2019), 『부용정 양과동정』, 심미안. 박순(1999), 「조선전기 광주지방의 향약과 동계」, 『동서사학』 5, 한국동서사학회. 이종일(2009), 「조선시대 광주향약의 성립 과정 연구」, 『향토문화』 29, 향토문화개발협의회.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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