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16세기 호남인, 임금 곁을 떠나 포천으로 간 사연은?_박순의 즉흥 소회시” 게시기간 : 2022-04-2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4-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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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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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순이 지은 즉흥 소회시(所懷詩) 이 작품은 박순(1523~1589)이 그의 나이 64세(1586, 선조19) 5월에 선조 임금 곁을 떠나 영평으로 가면서 지은 즉흥 소회시이다. 영평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를 말한다.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박순의 입장에서 다시 적어본다. 임금님 은혜에 보답할 방법이 없어서 내 마음이 어긋났는데, 쇠잔해진 내 몸을 추슬러서 들판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한 점처럼 보이는 한양의 남산은 점점 멀어지는데, 서쪽 바람은 불어 내 옷에 눈물을 적십니다.
1구에서 말한 ‘임금’은 곧, 선조 왕을 가리킨다. 또한 3구에서 말한 ‘종남산’은 서울의 남산을 가리키며, 4구에서 말한 ‘푸른 송라 옷’은 칡덩굴로 만든 옷을 말하는데, 흔히 속세를 떠나 사는 은자(隱者)의 옷을 뜻한다. 다시 말해 박순이 한양을 떠나 포천으로 가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시를 통해 나타낸 것인데, 1구의 “어긋나다”와 4구의 “눈물 적신다”라는 말에서 기분 좋은 이별은 아니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마침 이 작품을 지은 배경과 관련한 기록이 박순의 문집 『사암집』 권7 「제가기술(諸家記述)」에 있어 적어본다. 병술년 5월에 전 영의정 박순이 강촌에 오래 있다가 초천(椒泉)에 목욕한다는 핑계로 영평현으로 가자 임금이 내관을 보내 문 밖에서 술을 하사하니 즉석에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중략) 임금이 그 시를 보고 돌아가기로 이미 결정한 것을 알았음에도 교지를 내려 누차 불렀으나 다 사퇴하였다. (하략)
(박순, 『사암집』 권7, 「제가기술」 중에서) 우선 맨 처음에 나온 5월은 8월로 수정한다. 「제가기술」은 박순이 세상을 뜬 뒤에 어떤 사람이 기록한 것인데, 박순이 지은 「이양정기(二養亭記)」에 “병술년 중추”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중추’는 음력 8월을 뜻한다. 이 글 중에 말한 ‘병술년’은 박순의 나이 64세 때를 말한다. 박순은 그의 나이 57세(1579, 선조12) 때 영의정에 올랐었다. 따라서 “전 영의정 박순”이라 말한 것이다. 이어 박순이 강촌에 오래 있다가 초천에 목욕하러 간다는 핑계로 포천으로 가자 선조 왕이 내관을 보내 술을 하사하였다. 그러니 박순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즉석에서 시를 지었고, 그 작품이 바로 「임금께 절을 올린 뒤에 영평으로 돌아가며」인 것이다. 선조 왕은 박순이 지은 시를 보고, 포천으로 돌아가기로 이미 결정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순을 여러 차례 불렀고, 그때마다 박순은 모두 사퇴했다고 하였다. 이렇듯 「임금께 절을 올린 뒤에 영평으로 돌아가며」 시 창작 배경을 정리해보았으나 위 글 중의 “박순이 강촌에 오래 있다가 초천에 목욕한다는 핑계로 영평현으로 가자”라고 말한 부분이 왠지 마음이 쓰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2장에서 언급하겠다.
2. 박순이 경기도 포천으로 가기까지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이요,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호남 사림 눌재(訥齋) 박상(朴祥)이 그의 중부(仲父)이다. 18세(1540, 중종35) 때 진사과에 합격한 뒤 개성에 있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게 찾아가 학문을 닦았다. 이후 31세 때 문과 장원 급제를 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고, 41세 때 성균관 사성이 된 뒤에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이조 참의, 사간원 대사간, 대사헌, 예조 참판, 대제학, 이조 판서, 예조 판서, 의정부 우찬성을 거쳐 50세(1572, 선조5) 때 우의정, 52세 때 좌의정, 57세 때 영의정에 올랐다. 이어 61세 7월에 병조 판서까지 겸하였다. 이전에 병조 판서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이가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율곡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박순이 병조 판서를 어쩔 수 없이 겸했던 것이다. 당시 이이는 ‘시무6조’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다시 주장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이었다. 그러나 이 ‘십만양병설’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이이는 2개월 뒤에 삼사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나 율곡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이 이이가 병조 판서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가 비게 되었고, 박순이 세 번 장계(狀啓)를 올려 고사했으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이이가 세상을 뜬다. 사실 박순은 우계(牛溪) 성혼(成渾)ㆍ이이 등과 친하게 지냈었다. 박순은 나이에서 성혼ㆍ이이에 대비해 각각 12년ㆍ13년 더 위이다. 곧, 이들 세 사람은 선배와 후배 사이인데, 당시 어느 누구보다 사이가 각별하였다. 그래서 나라일도 함께 도모했는데, 갑자기 이이가 먼저 세상을 뜬 것이다. 그러자 이이에게 갈 비판의 화살이 박순과 성혼에게 이르렀다. 급기야 박순은 탄핵을 받고, 강가로 나아가게 된다. 앞 1장 인용문에서 “강촌에 오래 있다가”의 ‘강촌’은 곧, 여기서 말하는 ‘강가’와 같은 곳을 가리킨다. 당시는 동서 붕당이 막 시작하던 때인데, 박순은 서인의 입장에서 동인과 맞섰다. 상황이 이러하니 선조는 여러 차례 교지(敎旨)를 내려 시비를 가리려 하였다. 그 중에 박순과 관련한 내용이 있어 인용한다. 영상의 사람됨을 보건대, 송균(松筠) 같은 절조(節操)에 수월(水月) 같은 정신으로 충용(忠勇)한 도량에 온아(溫雅)함을 보탠 성품이요, 청신(淸愼)한 덕에 백옥(白玉)의 광채를 발하였다.
(『선조실록』 16년(1583) 8월 18일 자 기록) 이 글은 선조가 교지를 통해 박순의 사람 됨됨이를 언급한 것이다. 특히, “송균 같은 절조에 수월 같은 정신”이라 말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조, 물과 달 같은 정신을 가진 것을 말한다. ‘소나무와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어서 절개를 상징하고, ‘물과 달’은 맑고 밝음을 상징한다. 다시 말해 박순은 절개를 간직한 사람으로, 충성스럽고 용맹한 도량에 온아함을 덧보태었으며, 맑고 신중한 덕성에 흰 옥의 광채를 발한다고 말한 것이다. 선조는 오랜 세월 박순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그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최고의 좋은 말들을 동원해 박순의 인품을 거론했던 것이다. 박순은 이이가 죽은 다음해 63세(1585, 선조18) 때 벼슬에서 사퇴하여 체직되었고 영중추부사를 제수 받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이 수찬이 되어 동인에 속한 이발(李潑) 등에 부화뇌동하여 박순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박순은 스스로 병이 들었다 선조에게 고하고 벼슬에서 물러나려 하였다. 이에 선조는 박순의 말을 쉽게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워낙 박순의 뜻이 간곡하여 마침내 모든 벼슬에서 해임되기에 이른다. 박순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조정의 대신들은 동서로 나뉘어 더욱더 심히 대립각을 세웠다. 박순은 이러한 조정의 상황을 뒤로 한 채 64세 음력 8월에 선조에게 초천에 목욕한다 고하고 하고 포천으로 갔다.
3. 박순의 포천 삶과 생애 마감 처음 선조에게 초천에 목욕하러 간다 말하고, 포천으로 간 박순은 그곳의 산수에 매료되어 터를 잡아 살게 된다. 다음은 박순이 포천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려준 내용으로, 의미가 있어 인용한다.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약초를 심고 고기 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촌사람과 촌 늙은이가 술을 가지고 찾아오면 기쁘게 마주하여 술을 마셨고, 학자들이 와서 강론할 때는 매번 추위나 더위를 잊었다.
(『동국여지지』 권2, 「영평현」 ‘유우(流寓)’) 위 글 내용에 근거해 보면, 박순은 시사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 약초를 심고 고기를 잡으며 책을 읽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또한 촌사람 또는 촌 늙은이가 술을 가지고 오면 기쁘게 마주하여 술을 마셨고, 간혹 학자들이 찾아오면 학문에 대해 강론했다 하였다. 박순은 31세에 문과 장원급제를 한 이래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고, 50세 이후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정승 자리에 있었다. 그러니까 한양 생활에 익숙한 박순이기에 포천의 시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기록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시사에 귀를 닫고, 촌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촌사람들이 하는 일을 하면서 거기에서 즐거움을 찾았던 것이다. 박순은 이제 온전한 자연인의 모습을 보이며, 포천 생활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포천 생활에 익숙해지자 주변의 승경을 찾아 유람하기 시작하였다. 단발령, 영평, 창옥병, 종현산, 부유산, 관음산, 국망산, 보장산, 불정산, 금오, 우두석, 와준, 낙귀정, 삼부연 폭포, 화적연, 용화산, 우두정(금수정), 백학담, 홍류동, 무릉 시내, 채지원, 수조대, 영벽당, 낙모암, 자연암, 풍악산, 만폭동, 마하연, 정양사, 장안동, 보덕굴, 중흥동, 석룡퇴, 마렵 등등 박순이 다녀간 곳을 나열하면 이렇듯 다양하다. 주변의 산과 계곡은 물론이요, 심지어 금강산까지 찾아가 유람하며 느낌을 시로 옮겼다. 당시 포천은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북관대로 중 한 곳으로 유명하였다. 이렇기 때문에 포천에 살고 있는 박순은 금강산을 쉽게 갈 수 있었다. 또한 박순은 자신이 살고 있는 포천의 창옥병 인근의 자연물과 인공물에 이름을 지어준 뒤 그 이름을 바위에 새긴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박순이 지은 「이양정기」에 나오는데, 창옥병 주위의 ‘백학대’, ‘청학대’, ‘산금대’, ‘수경대’, ‘토운’, ‘와준’, ‘명옥’, ‘창옥병’, ‘배견와’, ‘이양정’ 등은 박순이 이름을 지은 것들이다. 다시 말해 포천 창옥병에 가면 박순이 남긴 흔적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박순은 왜, 이와 같이 창옥병 주변의 자연물과 인공물에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그 해답은 박순의 시 「정자, 누대, 시내, 바위에 모두 이름이 있어 그 위 돌에 새기고, 이로 인해 느껴 시를 짓다〔亭臺溪巖 皆有名號 刻石其上 因感而賦之〕」에서 찾을 수 있다. 박순은 이 시에서 “세월 보내며 애써 바위 모퉁이에 글자 새김은, 오랫동안 하늘과 함께 남겨지길 기약해서이다. 안타깝도다, 눈 깜빡할 사이에 회겁에 따라, 개울 돌아가고 산 묻힌 뒤의 일 그 뉘 알까”라고 하였다. 즉, 세월이 지나면 쉽게 잊히는 것이 아쉬워 이름을 짓고, 바위에 그 이름을 새기기까지 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박순은 그의 나이 67세 7월에 포천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박순이 처음 포천으로 간 때가 64세 8월인데, 만 3년 뒤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박순의 전 생애에 대비했을 때 포천 생활이 그리 오래지는 않다. 그러나 박순은 추측컨대, 생애 어느 때보다도 이 3년 동안 마음의 여유를 누렸으리라 생각한다.
<참고 자료> 『사암집』
『경기도읍지』 「영평군읍지」 『영평지』, 포천시 / 영중면주민자치위원회, 2013. 박명희, 『박순의 생각, 한시로 읽다』, 도서출판 온샘, 2019. 홍순석, 『포천의 암각문』, 포천문화원, 1997.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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