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의승군(義僧軍)과 의승수군(義僧水軍) 게시기간 : 2022-05-11 07:00부터 2030-12-23 21:21까지 등록일 : 2022-05-09 09:5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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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란과 의승군(義僧軍)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4월에 일본이 조선에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이 임진왜란은 당쟁으로 문약에 빠진 조선왕조를 여지없이 짓밟아 전국토를 휩쓸어 버렸다. 수도인 한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길을 떠나야 했으며 불과 몇 달 사이에 전국토가 왜병의 칼날과 말발굽에 짓밟혀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게 되었다. 왜적이 내침할 당시의 승려들은 유생과 위정자들에게 천대를 받아 산중 깊숙이 쫓겨 가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존재로 이른바 무종단의 시대라 불린다. 다만 전대의 승과에 합격하여 승계를 받았던 승려에 한하여 습관적으로 승계로서 호칭될 정도였다. 그리고 선조 22년에 정여립의 역모에 가담한 요승(妖僧) 의연(義衍)의 무고로 당시 교단의 지도적 승려였던 서산.사명 등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물론 무죄로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이 또한 당시의 배불과 당쟁의 일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선조로 하여금 서산의 인물됨을 알아보게 하였고 뒷날 의승(義僧) 봉기의 가연(佳緣)이 되기도 하였다. 국가로부터 도외시되고 갖은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왜적의 침략이라는 국난을 당하게 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산중에서 선수행(禪修)에 전념하던 승려들은 이를 방관하지 않고 생사를 초탈하여 분연히 일어나 승병을 모집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임란승군의 효시는 서산의 제자 기허 영규((騎虛 靈圭)였다. 임진왜란 당시 공주 계룡산 갑사 청련암(甲寺 靑蓮庵)에 주석(住錫)하고 있던 영규는 의병장 조헌(趙憲)과 호응하여 500여 승군을 일으켜 흑전장정(黑田長政)에 의해 함락되었던 청주성을 그 해 8월에 탈환하고 충청도를 중심으로 한 적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이 청주성 탈환으로 왜적은 사기를 잃어 버렸으며 선발대에 대한 보급 및 연락망이 차단되어 전략상 곤궁에 빠지게 되었다. 그 반면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아군은 반격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의주에 피난한 선조는 영규대사에 의한 청주성 탈환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불교 교단의 지도자격인 서산대사를 묘향산으로부터 불러내려 국난에 임해 줄 것을 간절히 당부하였다. 이에 서산은 7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내린 팔도16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의 직을 받아 전국의 명산대찰에 산재하여 수도하던 문도(門徒)와 전불교도들에 총궐기의 격문을 내리니 전국에서 의승들이 일시에 일어나게 되었다. 문도인 사명당 송운은 금강산에서 일어나 관동지방을 중심으로 800여명을 인솔하였다.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일어나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1,000여명을 인솔하고 북진중 권율 장군의 휘하에 합세하여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만나 모조리 소탕하였다. 서산대사는 임진년 10월 순안 법흥사에서 1,500여 명을 모았다. 충청도에서 봉기한 영규는 청주성 탈환 후 다시 금산전투에서 조헌의 무리한 공격을 만류했으나 조헌이 듣지 않고 전사하자 어찌 혼자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고 수 일을 분전하다가 휘하의 모든 승군들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와 같은 영규대사의 무훈(武勳)에 조정에서는 당상관의 위를 제수했으나 윤두수는 승려가 당상관이 되는 것은 개벽 이래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은근히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서산대사가 본거지로 한 순안 법흥사에서는 사명을 비롯한 승도들의 군세가 날로 증가하여 임진년 11월에는 5,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때 선조는 평양성을 탈환하고자 아군의 병력을 살폈는데, 의승군의 군세가 가장 강력함을 알고 5,000여 의승군을 주력부대로 하여 평양성을 탈환할 것을 명했다. 이에 의승군이 선봉이 되고 관군과 명군이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이 평양성 탈환은 임진란의 전국(戰局)을 역전시킨 쾌거로 이로부터 아군은 연승을 거듭하였다. 평양성에서 패퇴한 왜적은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으로 도주하였다. 이때 권율군에 합세했던 처영대사(處英大師)의 승군은 행주산성에서 권율군과 함께 이들을 소탕했다. 이로 인하여 왜적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계속 남으로 도주하였다. 이와 같은 의승군의 활약은 선조의 신망을 얻게 되어 서산대사는 선조가 환도할 때 호위장으로 선임되어 사명을 비롯한 정예 의승군 700명을 거느리고 대가(大駕) 호위의 대임(大任)을 완수하였다. 환도 후 서산대사는 노령으로 군직에서 물러나 문도 사명과 처영에게 뒷일을 맡기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선조 37년 세수(世壽) 85세로 입적하기까지 지극정성으로 무운장구와 국태민안을 기원하였다. 그는 청허당집(淸虛堂集)에 “나라를 사랑하고 종사를 근심함에는 산승도 또한 한 사람의 신하이다”라고 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출세간자(出世間者)이지만 홀연히 구국의 대열에 끼어서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실천한 승려였다. 서산대사의 뒤를 이어 도총섭(都摠攝)으로서 의승을 통솔한 승려는 사명당 송운대사였다. 사명당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처음 왜적을 만났을 때 필답으로 왜장을 경복케 하여 사승(寺僧) 다수와 고성을 중심으로 인근 백성들을 구출했다. 묘향산의 서산대사의 격문을 접하게 되자 800 의승을 인솔하여 관동의 왜적을 무찌르는 한편 순안으로 달려가 서산대사의 주력에 합세하여 평양성을 탈환하고 어가를 호위하였다.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사명당은 도총섭의 직을 물려받은 후 영남지방의 왜적을 소탕하니 그 위풍이 조야(朝野)에 진동하였다. 조정에서는 이와 같은 사명당의 무훈을 상찬하여 당상(堂上)의 벼슬을 내렸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사명당이 정예 의승 1,000여명을 인솔하고 왜장 가등청정의 근거지였던 서생포(西生浦)를 포위한 뒤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적진에 드나들면서 화평회답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왜국에 끌려가 있던 조선의 남·여 3,500여명을 무사하게 데려 오기도 한 평화사절의 노릇도 하였던 것이다. 2. 전라좌수영의 의승수군 전라좌수영의 이순신의 휘하에서 의승 수군이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1592) 9월 5개 대로 창설되었다. 이순신의 요청에 호응하여 자원한 승려들이었다. 특히 순천 주진(駐鎭)의 삼혜승장(三惠僧將)과 의능승장(義能僧將)은 의승수군(義僧水軍)군의 상징적 존재로 이순신의 해전에 군사(軍師)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1594년 1월 삼혜승장은 도총섭으로 하는 단일 체제로 정비되고 이때부터 흥국사에 주진하는 상설군으로서 제도화되었다. 창설시에는 400여명이었으며, 정비기에는 본영 즉 흥국사에 300명, 순천과 3지역대를 합하여 300명이었으며 왜란이 끝난 뒤에는 흥국사 주진의 본대만 국법으로 제도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란시 의승수군은 주로 유격대나 돌격대로 운용되어 해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공헌하였으며 승장들은 사호(賜號)나 포상이 있었다. 이순신이 해전에 크게 공헌하고 사후 오랜 기간 동안 추선공양(追善供養)함으로써 사회적인 주목을 받았던 자운승장(慈雲僧將)과 옥형승장(玉炯僧將)은 각각 삼혜(三惠)와 의능(義能)이었다. 즉 삼혜는 속명이 윤눌(潤訥), 법호는 원정(圓正), 사호(賜號)가 자운(慈雲)이었다. 의능은 법호가 기암9奇岩), 옥형(玉炯)이 사호라 하였다. 자운삼혜는 순천 송광사 출신으로 생각되며, 난 뒤에는 송광사로 돌아간 것으로 여겨진다.
1. 여수 흥국사 대웅전 옥형의능은 고흥 출신으로 흥국사와 인연을 맺었고 난 뒤에는 석천사에서 이순신의 천도에 여생을 보냈다. 전란이 끝난 뒤에 의승수군(義僧水軍)은 흥국사의 각 당우(堂宇)와 산내암자에 편대되어 항상 300명을 유지하였다. 수성(守城)과 제지(製紙)·제와(製瓦) 그리고 각종 공출과 부역이 있었다. 대단위의 승군이 효율적으로 기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찰의 중건불사도 큰 책무의 하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조직이 갖추어져 있었으며 각 편대는 노대덕(老大德) 승려를 중심으로 수행과 군무를 함께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1895년 갑오경장의 제도개혁으로 좌수영이 폐지되면서 승군조직도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7년간에 걸친 왜란 동안, 전국 각처에서 승군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전라도 무주 지방에서의 공방전과 경기도 죽산 지방에서의 전투는 그 한 예다. 충청도에서는 영규가 전사한 뒤 홍정과 유정 등 승장이 지휘하던 승군이 대신 중추적인 활동을 하였다. 한편 경상우도에서는 승장 신열(信悅)의 활약이 매우 컸다. 선조 30년 1월을 전후하여 경주에서 방어전에 임했던 100여명의 승군은 고언백(高彦伯)이 경상좌도 병마사로 임명되어 서울 수복 후에 남하하였을 때 널리 모군하여 온 것이었는데 애초 400명이었던 그들이 그간의 유행병으로 대부분이 병사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때 유신(儒臣)들이 승군의 활동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가는 모병에 나섰을 때 승군의 활동을 본보기로 하여 호소하였던 데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승군은 끝까지 일반 의병과는 달리 관으로부터 해체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군이 재정비되고 명군이 내원한 후로는 군량수송에도 담당하게 되었으며 또 서울 수복 후에는 성을 쌓는 데에도 담당하는 준관군(準官軍)의 형태를 띄어갔다. 적의 목을 베인 승군에게는 그 전공에 대한 포상으로 선과첩(禪科帖)이 수여되었다. 승과가 폐지된 현실에서 그 합격증이라는 선과첩이 비록 유명무실한 것에 틀림이 없겠으나 불교의 사회적인 지위를 공적으로 상승시키려는 하나의 계기로 받아 들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승군의 활동으로 선조 38년 4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녹공(錄功)이 있었을 때 34명의 승군(僧軍)이 기록되게 된 것이다. 선조 26년 8월에는 승군동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일원적인 체제로 도총섭 밑에 각 도마다 2명씩 총섭을 두기로 한 16종 총섭제(摠攝制)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그 후 이 제도가 일부지역에서는 교종과 선종과의 2종을 다시 두게 된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되며 각 도에 총섭을 1명씩 두기로 고쳤다. 그러다가 다시 선조 29년 4월에 적군이 북상할 기세를 보이자 경상도에 한하여 총섭을 2명 두기로 하였는데 전쟁 중에서도 명분만을 찾았던 유신(儒臣)의 자가당착적인 불교정책을 여기에서도 엿보게 하여 준다. 3. 조선후기 남·북한성과 의승군 1626년(인조 4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만주의 동태에 더욱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허백당(虛白堂) 명조(明照)를 팔도의승도대장으로 삼아 승군을 거느리고 평양에 나아가서 그곳에서 훈련을 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이듬해 인조 5년 1월 1일에는 다시 나아가 청천강을 지키기 위하여 명조는 4,000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안주에서 진을 쳤다. 만주족(胡賊)에게 용감하게 항전하니 호적은 해주에서 남하를 중단하고 형제의 의를 맺는다는 조건으로 강화를 요구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물러갔던 호적이 정묘년에 맺은 형제의 의를 군신의 의로 고칠 것과 세폐(歲幣)를 증가하고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했다가 거절되자 인조 14년 13만의 대군으로 다시 내침하니 이것이 병자호란이었다. 이렇게 되자 인조는 서울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사명당의 건의로 성을 수축한 후 계속해서 승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승군들에 의해서 일용제반사(日用諸般事)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두청(斗淸)은 의승으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성을 빠져나가 적진을 뚫고 외부의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 황해병사(黃海兵使) 이석달(李碩達),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시방(李時昉) 등과 연락하는 등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정묘호란 때에 큰 공을 세웠던 명조대사는 이때에도 군량미를 모아 보급하였다. 인조 2년에 남한산성의 축성을 맡아서 팔도도총섭의 직첩을 받았던 벽암각성(碧岩覺性)은 축성을 마친 뒤에 화엄사에 가서 수도하고 있었는데 호적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승을 모집하여 3,000명을 이끌고 북진하던 중 왕이 치욕적인 강화를 하였다는 소식을 중도에서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귀사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국란을 당하여 많은 승려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을 하였지만 여기에 소요되는 경비 등은 국가로부터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이로 인해 교단의 경제적 타격이 막대하게 심했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이 엄청난 희생과 천대를 당하면서도 이것을 감수했던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로지 구국일념의 신앙심 때문이었다고 말 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실제로는 승려들의 타협적인 태도, 즉 불교교단과 집권사대부(報權士大夫)와의 이념 및 실제적인 마찰을 피함으로써 교단을 유지하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교단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집권층과의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한 점이 작용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승려들의 활동도 어느 정도 자유스러워지고 인정도 받을 수 있어서 교세의 회복을 위한 일종의 시책이었다고 짐작된다. 왜란과 호란을 통해 의승군에 대한 조정의 신뢰는 매우 두터워졌다. 그리하여 의승군에 대한 신망은 양란이 평정된 평화시까지 연장되어 조정은 승군에게 남.북한산성을 본거지로 하여 국도의 수호의 중임을 맡기에 되었다. 남한산성은 인조 2년 벽암각성의 축성 직후부터 승군의 본거지가 되었다. 승군은 이곳에서 1년에 6회의 교대로 소집되어 와서 방어에 임하였다. 본래 성내에 망월사(望月寺)와 옥정사(玉井寺)의 두 절이 있었는데 새로개원사(開元寺), 한청사(韓靑寺), 장경사(長慶寺), 천주사9天柱寺), 東林寺(동림사), 靈源寺(영원사) 등 7개 사를 지어 이 9개 사에 군기나 화약을 비치하고 개원사를 승군의 본부로 삼아 총사령관인 도총섭이 머무르고 나머지 8사는 8도에서 올라온 승군의 숙소로 삼았다. 그리고 영제(營制)와 규모는 도총섭 1명, 중군장 1명, 교련관 1명, 초관(哨官) 1명, 원거(原居) 승군 138, 그리고 8도에서 소집되어 온 의승 356명 등이었다. 그리고 의승군으로 편제되어 수비하던 남한산성이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에 커다란 성과를 경험한 조정은 수도방위에 산성을 통감하고 북한산성의 축조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 계획은 효종 때부터 논의가 되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드디어 숙종 37년 4월에 착공을 보게 되어 그해 10월 공사를 마쳤다. 이때 화엄사의 승려 성능(聖能)이 승도들을 지휘하여 공사를 맡았는데 성능은 축성후 북한산성 의승군의 초대 도총섭이 되어 30여년을 수도방위에 힘쓰다가 연로하여 영조 21년 11월에 산성사(山城事) 14조(條)를 적은 『북한지(北漢志)』를 남기고 도총섭의 직을 서윤(瑞胤)에 물려준 뒤 화엄사로 돌아갔다. 북한산성도 남한산성의 예에 준하여 승대장 팔도도총섭이 머무는 중흥사를 중심으로 성내에 여러 사찰을 두어 승군을 주둔케 하였다. 북한산성 내에는 중흥사 외에 태고사,노적사,서암사,경흥사,국녕사,부왕사,진광사,보국사,용암사 등 11개사가 있었다. 그리고 이 북한산성 의승군의 규모는 남한산성과 비슷했으나 營制는 약간 달랐다. 승대장(도총섭 겸임) 1명, 중군장. 좌별장(左別將). 우별장 각 1명, 천총(千摠). 파총(把摠). 좌병방(左兵房).우병방 각 1명, 교련관. 기패관(旗牌官).중군병방 각 2명, 5기차지(五旗次知) 1명, 도훈도(都訓導). 별고감관(別庫監官) 각 1명, 사료관(射料官) 10명, 서기 2명, 통인9通引) 2명, 고직(庫直) 2명, 책장무(冊掌務). 판장무(板掌務) 각 1명, 취수(吹手) 2명, 각사(各寺) 승장 11명, 수승(首僧) 11명, 그리고 각 도에서 소집되어 온 의승 35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한산성의 의승 역시 남한산성과 마찬가지로 1년에 6회씩 교체하였으므로 한번 소집되어 오면 2개월씩 근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이 의승들은 남.북한산성을 축조하고 그 수비를 담당하였는데, 그렇다고 하여 이 산성수비 의승군에 대한 경비를 국가에서 지원해 준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로 말미암아 불교교단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우선 첫째로 양 산성 의승 수는 합해서 700명에 이르는데 2개월에 한 번씩 그 인원을 전국 사찰에서 차출한다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니고, 둘째로 700명의 인원을 채우려면 대찰에서는 4-5명, 소찰에서는 1-2명씩 차출되어야 하는데, 승려수가 적은 사찰의 경우에는 그 사찰을 비워 놓고 와야 되며, 셋째로 승려수가 많은 경우라도 차출되는 승려는 청년층이어야 하는데 할당된 수만큼의 젊은 승려가 없는 사찰의 경우에는 고령의 승려를 내보내야 했고, 넷째로 차출된 승려들이 거주 사출로 부터 산성까지 오고 가는 데에 소요되는 경비가 적지 않았는데 그러한 여비를 사찰이나 개인이 부담해야 했고, 다섯째 산성에서 근무하는 동안에도 식량과 의류 등 일체의 비용을 자담해야 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승려가 없게 된 사찰은 자연 폐사가 되기도 했고, 어떤 사찰에서는 승려가 여비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기나 전지(田地)등 사찰의 재산을 팔아야 했다. 어떤 사찰은 노등만 남게 되어 사찰운영을 할 수 없게 되기도 했고 심지어는 사찰에서 경비를 조달할 수 없어서 속가의 재산까지도 팔아야 했다고 한다. 더욱이 계속된 척불시책으로 교단의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고 사원경제가 영세한 상황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그러한 폐단은 심화되어 갔다. 이와 같이 의승군의 남.북한산성 수비제도가 큰 폐단을 가져오게 되자 불교 교단 안에서 원성이 높아짐은 물론 이러한 참상을 목격한 지방관의 주청도 있게 되어 마침내 영조 31년 8월 이 제도에 대한 일부 수정이 가해지게 되었다. 곧 제번징전(除番徵錢)의 제도인바, 이는 2개월마다 윤번으로 소집되어 오던 것을 돈으로 냄으로써 면제시켜 주고 정부에서는 그들이 낸 번전으로 두 산성에 상주할 승려들을 고용하여 산성을 수비케 하는 제도인 것이다. 그런데 이 남.북한산성 의승의 번전제는 한편으로는 연 6회씩 교체하는 번거로움과 절을 비우고 와서 고생해야 하는 폐단을 없앨 수 있었으나, 1인당 년 40량(兩)이라는 번전을 납부해야 했기 때문에 그러한 경제적 부담은 당시 사찰이나 승려의 재력으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사원경제의 어려움이 쌓이게 되자 이것이 계기가 되어 2차적 조치가 취해져 정조 9년 2월 번전액이 반감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변동 없이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상과 같이 인조이후 조선말기까지 의승군이 남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했는데 남북한산성을 지형적으로 보아 수도 서울을 방어하고 일단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왕이 그곳으로 피난하여 최후의 항전을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곳을 수비한다는 것은 국방상 중요한 임무가 부여되어 있다고 하겠다. 또한 남북한산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의승군에 소요되는 경비를 국고에서 지급하지 않고 승려들에게 자담시켰던 것은 국방력도 강화하고 국고도 절약한다는 정책적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지만 결과적으로 사원경제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기 때문에 승려들을 국방에 유용하게 이용하면서도 척불이라는 기본정책도 유지할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교단으로서는 남북한산성의 의승제도가 살아 있는 한 조정이나 유생들로 부터 불교말살만은 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사찰이나 승려에게 어떠한 희생이 다르고 어떠한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의승군의 남.북한산성 수비에서도 조정과 불교 교단의 명암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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