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기억]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 규남 하백원(河百源)의 과학적 성취들(2) 게시기간 : 2022-05-2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5-23 16:1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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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남 하백원이 30세 즈음에 이룬 성취들 중 자승차에 이어지는 것이 『동국지도(東國地圖)』였다.
2) 『동국지도』 호남의 다른 실학자들도 이미 지도와 지리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관련 저술들을 남겼다. 이런 흐름 속에서 규남도 자승차를 고안한 이듬해에 『동국지도』를 완성하였다. 『동국지도』는 조선 전체를 한 폭에 그린 「동국전도(東國全圖)」와 전국을 8장에 나누어 그린 「팔도분도(八道分圖)」로 구성되어 있다. 「동국전도」는 『동국지도』의 총설에 해당하는데 이를 그려 맨 앞에 둔 이유로 “먼저 전도 한 폭을 실어 편리하게 (전체를) 보며 살필 수 있게 하였다”라고 적어 실용성을 높이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문 끝에 “1811년 늦봄 3월에 수졸헌(守拙軒, 규남의 당호) 주인이 모사하여 그리다”라 하여 모사본임을 밝히고 있다. 모사한 지도의 원본은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1740년대에 제작한 ‘동국지도’의 원도 계통으로, 그의 아들 정항령(鄭恒齡, 1700∼ ?)의 수정본 지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 규남은 왜 이런 지도를 그렸을까? 『동국지도』가 완성되자 규남은 오대언(吳大彦)과 운(韻)자를 내어 함께 부(賦)를 지었는데, 거기서 “지도 펼치고 어찌 작은 동방을 탄식하랴/ 단군·기자의 옛 유풍 아직 남아 있는 것을/ 산은 발해에 이어져 변방의 요새 웅장하고/ 땅은 유독 기름져 해마다 곡식 풍년이라/ 강토는 비로소 삼한 이후에 커졌고/ 팔도에서 서울 경기가 가장 존귀하다네/책상에 늘어 놓고 명승지 찾으면 그뿐/ 집 나서 어찌 수레 타고 사방을 돌아다닐까”2)
라고 하였다. 당시의 조선중화주의에서 발현된 국학적 관심, 내 땅에 대한 의식 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의 여타 실학자들이나 정상기가 갖고 있던 지리에 대한 관심과 다르지 않았다. 한편 당시 지도 제작에서 특기할 점은 대축적지도의 발달을 들 수 있고, 또 중요한 것이 지도 제작에 천문의기를 활용하는 등 새로운 과학을 수용하려는 노력이었다. 즉 신경준이 지리는 반드시 천문을 연구한 뒤에 방위와 대소를 명확히 알 수 있다고 하였고, 실제로 정항령과 함께 간평의(簡平儀)를 사용하여 국토의 사방 모서리에서 해와 달의 궤도를 측정하여 지도 제작의 일을 마치려고 하였던 사례 등이 그것이다. 다만 정항령이 먼저 죽어 끝내 이루지는 못하였다.3) 규남 역시 대축적지도에 버금가는 「동국전도」를 그렸고, 백리척을 기준으로 팔도의 형태와 축척을 같게 만들어 지역에 따라 다르지 않게 만드는 등 실측을 토대로 한 실용적 지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4. 40세 즈음의 성취들 규남은 37살이 되던 해, 스스로 공부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서울로 가서 시대의 흐름을 익히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부족함을 느껴 중국에 직접 가서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다. 여기저기 부탁도 하는 등 노력해 보았지만, 뜻대로 안 되었다. 변방에 살고 있던 벼슬 없는 선비의 안타까움만 반복할 뿐이었다. 시절과 지역을 잘못 만난 탓이라고…. 그래도 서울에 머물면서 적지 않은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40세 즈음의 성취들이 나타났다. 그는 서울 생활을 통해 새로운 시대 조류를 읽었고 특히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영향으로 세계, 그리고 우주로까지 관심의 영역을 넓혀 갔다. 이때의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 안여필(安汝必)에게 보낸 편지글이었다. “근래에 강희제가 편찬한 『율력연원(律曆淵源)』을 보았는데, 이것이 비록 심신의 일에는 절실하지 않지만 또한 하나의 기예로 보아 하찮게 여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중 『수리정온(數理精蘊)』은 곧 상고의 오묘한 것을 미루어 넓힌 것인데, 하도(河圖)의 위치에 따라 1을 더해서 생성의 숫자를 얻고, 낙서(洛書)의 좌우를 서로 돌면서 승제(乘除, 곱셈과 나눗셈)의 근원을 밝히니, 조화의 정밀한 이치를 다 드러내어 다시는 남김이 없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중 『역상고성(曆象考成)』이 있는데 평행 실측의 효과는 하승천·곽수경 무리가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수리정온』과 『역상고성』은 대략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으나,『율려정의(律呂正義)』는 더욱이 평소에 어두워서 많은 시일과 많은 정력을 들여도 얻은 것이 없을까 두려울 뿐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로 마주 보고 한번 토론하여 이 어리석음을 걷어낼 수 있을까요?”4)
『율력연원』은 수학, 천문, 음률에 관한 방대한 책으로 『수리정온』, 『역상고성』, 『율려정의』 3부작 총 100권 분량으로 되어 있다. 이 가운데 수학에 관한 부분이 『수리정온』이고, 천문역법에 관한 부분이 『역상고성』이며 음률에 관한 부분이 『율려정의』이다. 이 편지글을 통해 규남이 천문학, 수학 등 명물도수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대적 분위기였다. 조선 후기에 조선은 서양과학을 자발적으로 수용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지식인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분이 역법과 역법 추산에 필요한 산법류였다. 18세기 중엽 이후 서울을 중심으로 천문학과 수학을 거의 전문가 수준으로 학습하고 논의하는 지식인들은 여럿 있었다. 19세기 전후 유가 지식인들에게 천문학과 수학은 마치 교양처럼 경학을 위한 필수지식이 되고 있었다.5) 이는 서울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지방 사례가 바로 규남이었다. 규남은 구체적으로 어떤 성과들을 남겼을까?
1) 『만국전도(萬國全圖)』 이때를 즈음하여 규남은 무엇보다 세계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그래서 중국을 가고 싶어했다. 중국을 보아야 조선중화주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판의금부사로서 동지정사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가게 된 판서 이희갑(李羲甲, 1764∼ ?)에게 편지를 보내 사행길에 따라가 중국을 배우고자 하는 뜻을 간절히 표하였다.6)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듬해 그 대신 넓은 세상에 대한 여망을 담아 세계지도인 『만국전도』를 그렸다.7) 규남이 제작한 세계지도의 제명은 ‘태서회사이마두만국전도(泰西會士利瑪竇萬國全圖)’이다.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 이마두(利瑪竇, Matteo Ricci)가 만든 세계지도란 뜻이다. 제명만 보면, 이마두가 제작한 ‘만국전도’를 바탕으로 만든 지도로 보인다. 그러나 이마두는 ‘만국전도’라는 이름의 지도를 제작한 적이 없었다. 규남의 지도와 외형상 유사한 지도는 『천하도지도(天下都地圖)』이다. 따라서 규남의 『만국전도』는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알레니(艾儒略, Giulio Aleni)가 1623년 간행한 『직방외기(職方外紀)』에 실린 『만국전도』를 바탕으로 하여 그린 지도로 판명되었다.8) 그런데 ‘이마두’를 지도 제목에 포함시킨 것은 마테오리치가 서양 학문과 세계지도 제작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이마두’라는 용어는 마테오리치 개인을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했지만 서양 선교사 일반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 통용되기도 했다. 서양 선교사들의 저술과 행위가 이마두의 그것으로 환원되는 경향도 있었다.9) 이미 시헌력 채택으로 서양 역법의 우수성이 공인된 상태에서 서양 선교사가 제작한 세계지도 역시 널리 받아들여졌다. 초기에는 한양과 근기 지역의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서양의 지식이 전파되었고, 서학의 이해가 무르익는 18세기에는 지방에서도 일부 학자들이 서구식 세계지도를 접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당시 지식인들에게 서구식 세계지도는 단순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물(異物)을 넘어 탐구 대상이 되었다. 서양 문물에 대한 관심은 유행이라 할 정도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10) 2) 천문역법 - 「역상차록(曆象箚錄)」과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 조선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1654년(효종 5)부터 대통력 대신 시헌력을 공식역법으로 수용하였다. 서양역법에 기반한 시헌력과 기존 대통력의 가장 큰 차이는 절기배치법과 1일 시각법이었다. 절기배치법을 보면, 서양천문학에서는 태양이 실제로 부등속운동을 한다는 점을 알았고, 따라서 절기의 간격을 달리하는 배치법, 즉 정기법(定氣法)을 적용하였다. 정기법은 태양이 황도상에서 15도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한 절기로 정하였다. 그런 까닭에 여름과 겨울의 절기 간격이 달랐다. 1일 시각법도 대통력이 1일 100각법을 취한 데 반해 시헌력은 96각으로 계산하였다.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서도 탕법→ 매법(《역상고성》 체계)→ 대법(《역상고성 후편》 체제)의 순으로 계속 수정해 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1세기가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시헌력 체제를 학습, 소화하는 노력이 조선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규남의 시기에는 이미 시헌력이 정착되었을 때였다. 따라서 서울 방문을 통해 천문학에 대한 담론들이 지식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음을 보았을 것이고, 이에 그 자신도 이에 대한 글들을 남기게 된다. 38세 때인 1818년 10월에 「역상차록」(曆象箚錄: 천체의 운행에 관한 글들을 보고 든 생각을 적다)을 짓고. 2년 후에 「호옥재기윤주설변」(胡玉齋朞閏註說辨: 옥재 호방평의 기윤 주석에 대한 변론)을 지었다. 이중 「역상차록」을 보면, 대통력과 비교, 검토하면서 시헌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인다. 거기서 “세차의 정확한 수에 대해 살펴보면 시헌력도 정밀하지 않을 수 있으나 다만 옛날 역법과 비교해 보면 정밀하다”라 하여 그 정확도를 평가하지만 “시헌력 적분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다”거나 “시헌력에서 태양의 출입은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같다”고 하여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냈다. 구체적으로 한 예만 보면, 그는 “동지와 하지 전후로 각각 15일 동안 점점 길어지거나 점점 짧아지는 것이 단지 3분이고, 춘분과 추분 전후로 각각 15일 동안 점점 길어지고 점점 짧아지는 것이 18분에 이른다. 동지와 하지에 태양의 운행은 어찌하여 너무 느리고, 춘분과 추분에 태양의 운행은 어찌하여 너무 빠른가?”11)
라 하였다. 이런 의문을 가졌던 까닭은 정기법에 의한 절기배치법의 방식은 이해하나 그 원리가 되는 태양의 부등속운동에 대해서는 아직 이해가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 복잡한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를 한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 또 이때를 즈음하여 황도 남북의 별자리를 그린 『황도총성도』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도총성도』는 1723년 서양선교사 쾨글러(Ignaz Kögler, 戴進賢)가 제작한 서양식 천문도인 『황도총성도』를 모사한 것으로 보인다. 5. 규남박물관이 과학 전남의 꿈을 심어주는 산실로 거듭나길 지금 ‘제4차 산업혁명’이 인구에 회자되는데 19세기에 처음 나온 ‘산업혁명’이란 용어를 여전히 쓰고 있듯이 산업혁명은 현재까지도 세계 나라들의 순위를 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산업혁명을 이끌었던 변화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에서 왔다. 과학기술!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역사 발전에 가장 큰 변수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과학기술이 발전할 수 있는 친화적 환경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규남은 앞서 본 것처럼 자승차 이외에도 자명종,12) 계영배, 방적기, 와륜 등 과학적 기계를 다수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많은 저술들과 유물들이 소실되었는데 그것들이 온전히 남았다면 더 큰 인물로 조명받았으리라 믿는다. 최후의 지방실학자로서 규남이 남긴 과학기술, 천문과 지리 등에 남긴 성취들은 과학 전남의 미래를 위한 가능성으로 지금 오히려 더 가치를 빛내고 있다. 규남의 흔적들을 올곧게 보존하고 전시, 연구하고 있는 규남박물관이 전남의 아이들에게 과학의 꿈을 심어주는 산실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1) 이기봉, 「규남 하백원(圭南 河百源, 1781~1845)의 『만국전도 萬國全圖』」(『규남 하백원의 지도』, 2013 규남박물관 지도특별전-산은 발해로 이어지고, 2013.11, 도서출판 사람들), 32쪽.
2) 「東國地圖成與吳大彦拈韻共賦」, 『규남문집』 제1권, 시, 90쪽. 3) 양보경, 「圭南 河百源의 『萬國全圖』와 『東國地圖』」(『규남 하백원의 지도』, 2013 규남박물관 지도특별전-산은 발해로 이어지고, 2013.11, 도서출판 사람들), 63∼65쪽. 4) 「與安汝必 乙酉正月」(1825), 『규남문집』 제3권, 편지, 271쪽. 5) 고석규, 『역사 속의 시간 시간 속의 역사』(느낌이있는책, 2021) 중 「고비에 선 19세기 천문과학」, 357쪽 참조. 6) 「上李尙書羲甲 甲辰」(1820), 『규남문집』 제2권, 편지, 210쪽. 7) 이종범, 「조선후기 同福 지방 晉陽 河氏家의 學問과 傳承」(『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 연구』, 규남실학사상연구회편, 경인문화사, 2007), 286쪽. 8) 양보경, 「圭南 河百源의 『萬國全圖』와 『東國地圖』」(『규남 하백원의 지도』, 2013 규남박물관 지도특별전-산은 발해로 이어지고, 2013.11, 도서출판 사람들), 58쪽. 9) 구만옥, 「‘利瑪竇’에 대한 朝鮮後期 지식인들의 이해와 태도」(『한국사상사학』 제36집, 2010.12), 387쪽. 10) 오상학, 「조선시대의 세계지도와 세계 인식」(『지리학논총』 별호 43, 2001), 139쪽. 11) 『규남 하백원의 천문역법』(2019 규남박물관 특별전, 규남박물관, 2019.11) 중 「천체의 운행에 관한 글들을 보고 든 생각을 기록하다. 曆象箚錄 戊寅十月」 12) 자명종에 대하여는 2017 규남박물관 학술논문집 『규남 하백원 연구Ⅱ』(규남박물관, 2017. 10)에 수록된 「하백원과 안수록의 왕복간찰에 대한 학술적 접근」, 「조선후기 호남실학에서 하백원(河百源, 1781~1845)의 특징과 위상」 등 두 편의 글이 있다. 자명종은 같은 동복에 살던 나경적이 추동식 혼천의, 즉 자명종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홍대용과 합작하여 통천의를 만드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고, 또 거기에 규남의 증조 하영청과 그 아들 하정철도 함께 했었음을 상기할 때 규남이 자명종에 관심을 갖고 그 제작에 역량을 기울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다만 실물이 전해지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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