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기행] 선생질 그만두고, 나하고 김 양식이나 하자 바다의 블로칩, 김 게시기간 : 2022-03-04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3-02 13:2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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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완도의 한 섬마을에서 김 양식 조사를 하다들은 이야기다. 교사 초임발령을 받고 첫 봉급을 받은 동생에게 형님이 한 말이란다. 요즘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분의 나이를 생각하면 1970년대 말쯤 될까. 당시 김은 일본으로 수출되는 외화벌이 상품이었다. 김 값이 좋아 10여 책(1책 40미터)면 가족이 먹고사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 한 가족은 지금과 달리 많을 경우 10명이 넘었다. 지금은 김 양식을 대규모로 하는 어민은 1000척 이상을 하기도 한다.
* 김은 언제부터 양식했을까. 김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수산물이다. 명절이면 세찬으로 빠지지 않았고, 제물로 올리기도 했다. 한때 대일수출로 외화벌이의 효자품목이었으며, 어촌이나 섬마을에서는 뭍으로 나가는 자식들 유학비용과 혼수품도 김 양식을 해서 마련했다. 최근 우리나라 김이 주목을 받고 있다. 중국, 태국, 미국, 영국 등 아시아를 넘어 서양으로 확대되고 있다. 2021년 단일 품목으로 6억달러를 넘어섰다. 같은 해 수산식품 수출액도 김 수출에 힘입어 역대최고인 27억 달러에 이르렀다. 명실공이 ‘K-수산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 동안 검은 종이라 비아냥거렸던 서양인들도 바다반도체라며 주목을 하고 있다. 이런 김이 언제부터 양식되었을까. 그 열쇠를 광양 태인도에서 찾을 수 있다. 광양제철이 자리한 태인도와 관련업체들이 자리를 잡은 금오도도 일대는 1980년대까지 김 양식장이었다. 그곳이 하동과 광양 사이 섬진강 하구 갯벌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김 양식 시험장이 있었던 곳이다.
태인도 궁기마을에는 처음 김 양식을 시도한 김여익(金汝瀷, 1606-1660)을 모신 ‘인호사’와 ‘김 양식 역사관’이 있다. 김여익은 1606년 영암에서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한양으로 향하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통탄해 낙향한 후 절해고도 태인도로 들어와 칩거했다. 바닷가를 산책하다 나뭇가지에 붙어 자라는 해초를 발견하고 나뭇가지를 꽂아 채취했다. 이것이 대나무, 산죽, 소나무 등 가지를 묶어서 갯벌에 꽂아 김 양식을 하는 ‘섶양식’의 원조다. 김 양식 기록은 그의 묘표문 ‘始殖海衣 不求名利 又發海衣 以俾世人調滋味 而俾世人以調濨味 眞可謂간 世之識見也歟’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처음으로 김을 양식했으며, 또한 김 양식법을 개발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맛을 조리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세상에 보기 드문 식견이 아니겠는가’라는 기록이다1). 이 비문은 1714(숙종 40) 광양현감 허심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 지금은 여익 공의 묘지에 그 비문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비문만 기록되어 전할 뿐이다.
* 은사품에서 성절사 물목까지 김은 <경상도지리지>에 토산품으로 ‘해의(海衣)’라 기록으로 등장했다. <동국여지승람>(1478)에는 전남 광양군 태인도 토산품으로 기록했다. 문헌에는 ‘해의’만 아니라 ‘해태’라는 기록도 있다. 전라도에서는 ‘해우’라고 하기도 하고, ‘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김이라는 명칭의 유래로 진상한 김을 맛본 인조가 맛이 좋은데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듣고 김여익의 성을 따서 ‘김’이라 했다고 전한다. 전라도말에 기억(ㄱ)과 지읓(ㅈ)이 함께 쓰이는 말로 길과 질, 김치와 짐치, 길쌈과 질쌈, 깊다와 짚다, 기지개와 지지개 등이 있다. 모두 표준말은 기억(ㄱ)을 취했다. <경세유표>에는 ‘태(苔)라는 것은 해태(海苔)인데, 혹 감곽(甘藿)ㆍ감태(甘苔)라 일컫기도 한다. 태는 또 종류가 많아서 자태(紫苔 : 속명은 海衣이고 방언으로는 김이라 함)ㆍ청태(靑苔)가 있어 대동소이한 것이 5~6종이나 있다’고 했다. 1480년(성종 11) 8월 19일 성절사(聖節使)에게 보낸 <별진헌> 물목에 김이 포함되었으며, 당시 중국에서 조선에 온 사신에게도 마른 김을 선물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라도 부세로 미역, 매생이, 우뭇가사리, 감태와 함께 해의가 포함되어 있다. <만기요람>에는 ‘백성들이 해의를 비롯해 미역, 분곽(粉藿), 다시마 등 해조류를 공물로 진상하는데 힘들어 해 봉진을 하지 말 것을 명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후기 일본 등 인접국가와 외교관계를 적은 <증정교린지> ‘제5권’에는 각도에 복정(정례 공물 외에 임의로 부과하는 조세)한 해의 90첩 중 40첩이 전라도에 분정 되었다. 당시에도 전라도가 김의 주산지였다. 또 <全羅道光陽縣玉谷面太仁島海衣及津下面船所鎭浦市收稅冊>(1861년, 철종12)에는 전라도 광양현 옥곡면 태인도의 김과 진하면 선소진포 수세 절목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 자료는 명례궁의 조세절목이다.
조선말기 작성된 <新行때의 扶助記와 流用記>(1886년, 고종23)’ 물품으로 상어(商魚), 대구(大口), 문어(文魚), 가오리(加五里), 대게(大蟹)와 함께 해의(海衣)의가 포함되었다. 이 유용에서 소비한 총액은 도합 3,100원이다. 新行은 혼인을 한 후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일을 말한다. 또 1889(고종 26) 5월 부산항의 수출입품목을 보면 일본상인들이 잡화, 우피(牛皮), 해태 등을 수출하고, 잡화, 소금(鹽), 양포(洋布) 등을 수입 했다. 왕실만 아니라 민가에서도 김은 특별하게 거래되었다. 지주에게 땅을 빌려 소작료를 내는 것처럼 미역이나 김이 많은 갯바위나 해안에서 해조류를 채취할 때도 해암주에게 세금을 내야 했다. 해남윤씨 문서에서 나온 <윤형욱 수표>를 보면, ‘해남연동 윤형욱이 정미년 3월 초5일 해의 값 231냥 4전을 받았다’는 영수증에서 확인할 수 있다.2) 標
右標事段 海衣價貳佰參拾壹兩四錢捧上之意 如是成標事 標主海南蓮洞尹亨郁(手決) 丁未三月初五日 (출처 : 디지털장서각) 역시 해남윤씨 문서 중에 1911년 6월 17일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 죽도, 곽도 섬 주민들이 윤씨가에 정해진 세를 납부하겠다는 증서도 있다. 이 증서를 보면, ‘해남군 연동에 거주하는 島庄主(미역이나 김 등 해조류가 자라는 갯바위 주인, 필자 역)’에게 가사리, 모해의(毛海衣), 海衣(김), 頭八里鹽 등을 해마다 어기지 않고 상납하겠다고 세 섬의 주민 대표 네 명이 제출했다. 이 세 섬은 진도군 진도군 조도면에 위치한 섬으로 4백여 년 동안 대대로 전해온 해남 尹氏家의 島庄이 있던 곳이다. 나중에 금융조합으로 넘어갔다가 섬 주민들이 매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도 자연산 돌미역이 유명한 섬이다.
* 김의 사회문화사 <조선일보>(1921.2.2.) ‘庚申을 餞送하는 陰曆年末의 市況?’이란 기사를 보면 ‘해의 한 톳에 사십젼으로 오십젼까지하는대 김한톳이란 것이 불과 삼십오매도 못되는 것은 실로 엄청나게 빗산거이며’라 했다. 당시 사십 전을 오늘날 화폐로 계산하면 4, 5만원에 이르니, 요즘 한 톳(100장)으로 셈하면 10만원이 훨씬 넘었을 것 같다. 또 수출품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1923.12.17.)에는 ‘海衣養殖有望’이란 기사에서 ‘최근 일 년의 이출은 80만근 150만원으로’ 일본 김과 비교해 품질이 열등인 까닭에 개선을 하고 간사지를 개척하면 수출품으로 유망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김이 주목을 받으면서 어촌마을에서는 공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이나 쌀 대신 해조류를 갹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21.8.5) ‘正道里人土敎育熱’이란 기사에서 마을 아동교육을 위해 개량서재를 사립학교로 확대하기 위하여 땅을 가진 사람은 일부 기부를 하고, 가가호호 가사리, 미역 그리고 김의 수입액의 일부나 일정비율을 내놓기도 했다. 정도리는 완도에 있는 몽돌해변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일제강점기 신농조합이라는 협동조합을 설립해 운영한 마을공동체의 모델로 알려진 마을이기도 하다. 1920년대 중반에는 전라남도에만 김 어획고가 2백만 원이 넘었다. 당시 김 양식은 전남과 경남이 중심이었다. 당시 경상남도도 전라남도에 절반 수준이었다. 전남과 경남은 김만 아니라 굴 양식도 적지로 일제가 주목하던 지역이었다. <동아일보>(1928.5.3.) 기사를 보면, ‘잠을 잘 자기 위해서 먹으면 좋은 음식으로 포도주, 사과, 밀감, 어류, 고구마, 감자, 토란 등과 함께 김과 다시마를 권하기도 했다. 또 같은 신문(31.1.23)에 ‘김국’으로 ‘깨끗한 김을 잘라 가지고 보통 맑은 장국을 맛있게 끓이다가 김을 반장씩 끊어 넣고 휘저어 맛을 보면 구수한 맛이 훌륭합니다’라고 소개했다.
1970년대 어촌에서는 김 10줄 내외로 한 가족이 생활했다. 당시 김 값이 그만큼 좋았다. 김 한 톳이 그때나 지금이나 가격이 비슷하다고 한다. 당시 <경향신문>(1977.12.12.)의 기사 ‘김 값이 좋을 때 한 톳(100장, 2천원), 색시가 있는 술집에서 두서너 명이 술을 먹으려면 김 10톳이 있어야 했다. 또 색시와 잠깐 지내려면 김 3톳, 밤을 새려면 5톳이 필요했다’는 기사를 보면 당시 김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미역이 그랬던 것처럼 김도 바닷마을 사람들에게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마을 전기세, 학교기성회비를 마을 공동 김 양식장을 운영해 마련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빠지면 갯벌이 드러나는 조간대에 시설을 했지만 지금은 고흥과 해남과 진도 난바다를 지나 추자도 인근까지 김 양식장이 확대되고 있다. 신안, 무안, 완도 등 일부지역에서는 지금도 갯벌 기둥을 세우고 김발을 붙여 양식하는 지주식 양식이 지속되고 있다. 김은 마른 김, 짱아지, 부각, 국 등만 아니라 스넥 등 가공식품과 파스타 등 서양음식에 이용되고 있다. 1) 우리나라 수산양식의 발자취(2016), 32 재인용
2) 이 자료의 정미년(丁未年)은 어느 해 인지 특정하기 어렵고, 수취인도 명시하지 않았다. 다만 해남윤씨가의 다른 수표에서 수취인을 이덕조(李德祚)로 추정했다(디지털장서각 참조)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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