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그림자도 쉬는 곳에서 읊은 시 스무 편_임억령의 누정 제영시 게시기간 : 2022-03-15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3-14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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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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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억령이 지은 누정 제영시(樓亭題詠詩) 이 시는 임억령(1496~1568)이 지은 「식영정20영」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식영정은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소재한 누정으로, 그 일원은 2009년에 명승으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식영정20영」의 시 종류를 굳이 나눈다면 누정 제영시라 할 수 있다. ‘제영시’란 제목을 붙여가며 시를 짓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어떤 특정한 공간을 대상으로 그 주변의 승경을 읊었으며, 그 작품 수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임억령은 식영정 주변의 승경을 총 20가지로 나누어 읊었는데, ‘서석산의 한가한 구름〔瑞石閑雲〕’ 시는 그 첫 번째에 해당한다. 시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으로 다시 옮겨본다. 서석산의 꼭대기 구름이 조금 뭉게뭉게 피어오른 듯하더니 어느 순간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 우리 사람들 중에 그 누가 구름처럼 아무 일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식영정과 서석산이 서로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
시 제목의 ‘서석산’은 물론 무등산을 가리킨다. 따라서 1구에서 말한 ‘산마루’는 무등산 꼭대기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등산 꼭대기에서 구름이 조금 뭉게뭉게 피어올랐다가 또 다시 감춘 모습을 나타내었다. 곧, 아무런 근심 없이 한가롭게 노니는 구름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작자는 이러한 한가로운 구름을 사람에 견주어 3구에서 “그 누가 구름처럼 하릴없을는지”라고 감탄하였다. 한가한 구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을 서로 대비시켰다. 다시 말해 1~2구에서 무등산 꼭대기의 한가한 구름을 형용했다면, 3구에서 시상을 바꾸어 구름을 사람에 견준 것이다. 이어 마지막 구에서 “서로 바라봐도 둘 다 싫지 않네”라고 말하였다. 이 구절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이 지은 시 「경정산에 홀로 앉아〔獨坐敬亭山〕」의 3구를 그대로 옮긴 것으로, 이백과 경정산이 서로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은 것처럼 식영정과 무등산이 서로 바라보아도 싫지 않다는 뜻을 나타내었다. 즉, 식영정과 무등산에 감정을 이입시킨 것이다. 한편, 「식영정20영」의 첫 번째 작품을 뺀 나머지 열아홉 수의 시 제목은 제2영 ‘창계의 흰 물결〔蒼溪白波〕’, 제3영 ‘물가 난간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며〔水檻觀魚〕’, 제4영 ‘양지 바른 언덕에 오이를 심으며〔陽坡種苽〕’, 제5영 ‘벽오동에 비친 서늘한 달〔碧梧涼月〕’, 제6영 ‘푸른 솔에 쌓인 갠 눈〔蒼松晴雪〕’, 제7영 ‘조대의 두 그루 소나무〔釣臺雙松〕’, 제8영 ‘환벽당 앞의 신령한 웅덩이〔環碧靈湫〕’, 제9영 ‘송담에 배를 띄우며〔松潭泛舟〕’, 제10영 ‘석정에서 바람을 쐬며〔石亭納涼〕’, 제11영 ‘학마을의 저녁 연기〔鶴洞暮煙〕’, 제12영 ‘들판에서 들리는 목동의 피리 소리〔平郊牧笛〕’, 제13영 ‘짧은 다리 돌아가는 중〔短橋歸僧〕’, 제14영 ‘흰 모래에서 조는 오리〔白沙睡鴨〕’, 제15영 ‘가마우지 바위〔鸕玆巖〕’, 제16영 ‘배롱나무꽃에 비친 여울〔紫薇灘〕’, 제17영 ‘복숭아꽃이 핀 길〔桃花徑〕’, 제18영 ‘향기로운 풀 돋은 모래톱〔芳草洲〕’, 제19영 ‘연꽃 핀 연못〔芙蓉塘〕’, 제20영 ‘신선이 노니는 마을〔仙遊洞〕’ 등이다. 이러한 시제를 보면, 임억령은 식영정 주변에 펼쳐진 원근의 승경을 거의 총 망라해 「식영정20영」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식영정, 그 이름에 드리운 장자(莊子) 사상 또 일찍이 누정을 하나 얽어 석천에게 미루어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따르며 강학과 토론을 서로 극진히 하였으니, 즉 식영정이 이것이다.
(김성원, 『서하당유고』하, 「연보」 36세 조의 일부분) 위는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의 문집 『서하당유고』 「연보」 36세 조에 나온 내용의 일부분이다. 김성원의 자는 강숙(岡叔)이요, 호는 서하(棲霞)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광주 충효리에서 태어났다. 임억령과 김인후(金麟厚)를 스승으로 모셨고, 정철(鄭澈)ㆍ기대승(奇大升)ㆍ고경명(高敬命) 등 당대 유명 문인들과 친하게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복 현감을 역임하면서 군량과 의병을 모으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조카 김덕령(金德齡)이 무고로 세상을 뜨자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둔하였다. 또한 1597년 정유재란 때 어머니를 업고 피난 가던 중에 성모산(聖母山)에서 왜군을 만나 어머니를 보호하다 그만 살해당하였다. 그래서 이후 성모산은 ‘어머니를 보호한 산’이라는 의미를 담은 모호산(母護山)이라 불리었다. 이러한 김성원이 36세(1560, 명종15)라는 한창 젊은 나이에 누정을 하나 얽어 석천에게 드리고,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따르며 강학과 토론을 극진히 했는데, 그 누정 이름이 바로 ‘식영정’이라는 것이 위 『서하당유고』에 실린 내용이다. 위 글에서 말한 석천은 바로 임억령의 호이다. 곧, 김성원은 누정 하나를 얽어 임억령에게 드렸을 뿐 아니라 밤낮으로 스승의 예우를 다했던 것이다. 여기서 임억령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임억령의 자는 대수(大樹)요,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으며, 박상(朴祥)에게 나아가 학문을 익혔다. 30세에 문과에 합격한 뒤 동복 현감, 부교리, 지평, 사간, 전한, 대사간, 금산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금산 군수를 수행하고 있을 때인 1545년(명종즉위년) 을사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동생 백령(百齡)이 윤원형(尹元衡) 등이 속한 소윤(小尹)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大尹)에 속한 많은 선비들에게 피해를 입히자 그만 벼슬에서 물러난다. 이후 고향 해남에서 머물다 복직이 되어 동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이어 62세 때 담양 부사가 되었다. 임억령은 이 담양 부사 시절에 김성원을 본격적으로 만난다. 그리고 급기야 첩실 양씨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을 김성원에게 시집보낸다. 『서하당유고』 「연보」 33세 조에 따르면, “임억령이 김성원에게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했다.”는 말이 나온다. 망년지교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귄다”는 뜻이니, 임억령이 김성원을 어느 정도로 아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김성원은 임억령을 장인 겸 스승으로 모시며 예의를 극진히 하였고, 반면 임억령은 사위이자 제자인 김성원을 권위로써 대하기보다는 마치 친구처럼 대하였다. 사실 임억령과 김성원은 29년의 나이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억령은 이러한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김성원을 마치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했던 것이다. 이렇듯 임억령이 김성원에게 망년지교를 허락한 3년 뒤 김성원이 자신이 노년에 지내려고 서하당(棲霞堂)을 짓고, 또 이어 누정 하나를 지어 장인 어르신인 임억령에게 드렸다. 그러면서 어차피 장인 어르신에게 드리는 것이니까 누정의 이름을 임억령에게 지어보시라 요청한다. 그런데 그 까닭은 잘 모르겠으나 임억령은 김성원에게 누정을 받은 즉시 그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라 3년 뒤인 68세(1563년, 명종18) 때 「식영정기」를 통해 누정의 이름을 ‘식영’이라 정한다라고 널리 알린다. 그리고 이 기문을 이어 「식영정20영」을 지었다. 임억령은 「식영정기」의 첫 부분에서 우선 “김군 강숙은 나의 친구이다.”라고 말한다. 망년지교를 허락한 사위 김성원을 ‘친구’라고 공언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식영정기」를 통해 왜, 누정 이름을 ‘식영’이라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그 일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네는 장씨(莊氏, 장주)의 말을 들어보았는가? 장주가 말하기를 “옛날에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햇빛 아래에서 달려 그 달리기를 더욱더 급히 하자 그림자도 끝내 쉬지 않다가 나무 그늘 아래에 이르자 그림자도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하네. (중략) 흐름을 타면 나아가고 웅덩이를 만나면 그치는데, 가고 멈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내가 숲으로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네. 내가 시원하게 바람을 타고, 조물주와 더불어 무리가 되어서 궁벽한 시골의 들판에서 노닐면 거꾸로 비친 그림자도 없어져서 사람들이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으리니, 이름을 ‘식영’이라 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임억령, 『석천집』 5, 「식영정기」의 일부분) 임억령은 처음에 『장자』 「어부」에 나온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신의 발자국을 싫어한다’는 의미인 외영오적(畏影惡迹) 이야기를 말한 뒤에 왜, 누정의 이름을 ‘식영’이라 하면 좋을지 그 이유를 언급하였다. 임억령은 세상살이에서 가고 멈추는 일을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숲에 들어온 것은 한갓 그림자를 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어 거꾸로 비친 그림자, 즉 도영(倒影)을 말한다. 도영은 물〔水〕 등에 비추어 생기는 그림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임억령은 숲에 들어온 까닭은 그림자를 쉬게 하고, 거꾸로 비친 그림자까지 없애서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 위함이라 한 것이다. 결국 임억령이 말한 그림자는 세상에 남기는 자취라 할 수 있으니,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뜻인 ‘식영’은 한가롭게 은거하며 여러 흔적을 없애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임억령은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내외직의 벼슬을 거쳐 담양 부사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화기를 관통해 살았던 호남사림 중 한 사람이다. 특히,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는 임억령이 직접 화를 당하지 않았으나 동생 백령이 사림들을 억압했기 때문에 마음에 큰 짐이 있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68세에 이른 임억령은 세상이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세속의 흔적이란 탈속하고 나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탈속의 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아 진정한 자유의 몸이 된다는 것을 그림자를 들어 말했던 것이다.
3. 임억령을 이어 김성원ㆍ고경명ㆍ정철이 시를 짓다 임억령이 「식영정20영」을 짓자 그 운을 끌어다 같은 시 제목으로 김성원ㆍ고경명ㆍ정철 등이 「식영정20영」을 각각 지었다. 세 사람 모두 식영정과 관련한 다수의 작품을 지었는데, 특히 정철은 「식영정20영」의 영향을 받아 가사작품 「성산별곡」도 지었다. 이중에서 김성원이 지은 「식영정20영」의 첫 번째 작품 ‘서석산의 한가한 구름〔瑞石閑雲〕’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2구에서 무등산의 구름이 이리저리 떠다니며 변화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고, 3~4구에서 그 구름을 바라본 작자의 느낌을 말하였다. 임억령이 지은 것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시 내용을 안배한 것이다. 임억령의 시가 그러했는데, 김성원의 시도 오언절구 작은 시이지만 식영정에서 바라다본 무등산의 모습이 어떠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눈에 보이는 구름의 움직임을 따라 묘사하는 한편,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임억령ㆍ김성원ㆍ고경명ㆍ정철 등 네 사람을 가리켜 ‘식영정사선(息影亭四仙)’이라 일컫는다. 이 네 사람이 마치 식영정에서 신선다운 면모를 보여 이런 호칭을 붙인 것일까? 지금의 식영정에서 옛날의 아름다운 승경을 고스란히 찾을 수는 없으나 수많은 문인들이 드나들며 시심(詩心)을 펼쳤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김성원, 『서하당유고』
박준규ㆍ최한선, 『속세를 털어버린 식영정』, 태학사, 2001. 임억령, 『석천시집』, 경인문화사, 1996. 임억령, 『석천집』, 여강출판사, 1989. 임준성, 광주문화재단 누정총서5, 『식영정』, 심미안, 2018.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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