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조선의 마지막 실학자, 규남 하백원(河百源)의 과학적 성취들(1) 게시기간 : 2022-04-0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4-04 16:5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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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규남 하백원의 학풍 호남의 4대 실학자로 순창의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장흥의 위백규(魏伯珪, 1727∼1798), 고창의 황윤석(黃胤錫, 1729∼1791), 그리고 화순의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을 꼽는다. 그중 하백원은 과학분야 연구에 두각을 나타낸 “실학 최후 시기의 학자”로 평가하기도 한다.1) 그는 당대에 불기(不器), 대유(大儒), 홍유(鴻儒)라 하여 높이 평가되었다. 규남은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림 1】 규남 하백원 선생상, 규남박물관 제공
“근세 사대부들이 하나의 속(俗)자에 얽매여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면 속된 선비로 자처하고 벼슬길에 나아가면 속된 관리로 자처합니다. … 만일 본원을 버리고 지엽적인 일을 쫓는다든지 실체에 어두우면서 헛된 말을 지껄인다면, 이는 내가 말한 ‘유용한 학문[有用之學]’이 아닙니다.”2)
과거 공부에 매이면 속된 선비, 속된 관리가 된다고 하면서 본원 공부란 ‘속된 것’을 위한 것이 아니고 ‘유용한 학문[有用之學]’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무엇에 유용한 학문인가? 규남이 “일상생활에서 사건에 대응하고 사물을 접촉하는 것이 학문이 아님이 없습니다[日用常行 應事接物 無非學也]”3)라 하는 데서 일상생활이 곧 학문의 대상이고 따라서 유용한 학문이란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학문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원 공부란 곧 이용후생학이 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실생활에 유용한 과학적 기기를 발명하거나 제작함으로써 학문의 생활화, 도구화를 적극 실천하였다.4) 이는 규남만의 학문 경향은 아니었다. 이른바 호남 4대 실학자는 모두 백과전서파적 양상, 천문과 지리, 과학기술 등에 대한 관심 등 당시의 유행에 따라 비슷한 이용후생학적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북학사상의 수용과 발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는 그를 기린 묘갈명 등에서 “해박한 견문으로 고금의 역사를 꿰뚫었네/ 천지의 운세/ 별자리의 궤도/ 후종과 수차/ 율력과 산수/ 전예(篆隷)와 도장까지 모두 두루 갖추어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칼을 대기만 하면 잘려나갔네”5)
라거나 “공은 또 우주 사이의 일은 모두 내 분수 안의 일이라 여기고, 천지의 운세와 별자리의 궤도로부터 율력(律曆), 산수, 후종, 수차의 부류까지 깊이 사색하고 정밀히 연구하여 각각 극치에 이르렀다.”6)
고 하는 데서 시대적 흐름에 조응하는 호남실학의 학풍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이런 규남의 과학적 성취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규남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한 다음,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생애에서 드러나겠지만, 규남의 학문은 30세 즈음과 40세 즈음의 경향이 많이 달랐다. 이 점에 유의하면서 그의 과학적 성취들을 따라가 보자. 2. 규남 하백원의 생애 하백원의 자는 치행(穉行), 호는 규남(圭南)으로 1781년(정조 5) 1월, 동복의 야사촌(현 전남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에서 하진성(河鎭星)과 모친 장택 고씨(長澤高氏) 고위겸(高撝謙)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규남의 삶은 먼 시골에서 태어난 ‘큰 그릇’의 빛과 그림자가 얽혀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삶이 남긴 자취에서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펴고 싶으나 여의치 않은 현실에서 오는 실망감, 그럼에도 끊임없는 도전,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자존감,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책임감, 이런 것들이 얽히면서 꿋꿋이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치 있는 성과들을 남겼다는 점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수학기에는 꿈을 키우고 그의 재기를 발휘하면서 성장했다. 17세의 이른 나이에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 19세에는 송시열의 5대손인 송환기(宋煥箕, 1728~1807) 밑에서 수학하였다. 또 갓 스물의 젊은 나이에 가문을 대표하여 『삼임술적벽동유록(三壬戌赤壁同遊錄)』(1802)에 서문을 쓸 정도로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그리고 23세에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진학으로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이때 판서 김달순(金達淳, 1760~1806)에게 편지를 보내 배움을 청하기도 하였다.7) 24세 이후에는 집안 사정으로 야사리에 머물며 학업을 이어갔다. 20대에서 30대 초반에는 학업에 대한 의지도 충만했고, 지적 성장의 속도도 빨랐다. 그가 참판 홍석주(洪奭周, 1774~1842)에게 보낸 편지에서 20세 전후의 학업에 대해 말하면서 “비록 능력이 미칠 수는 없었으나, 문장이 때때로 자못 기발하여 스스로 기뻐했습니다. 이에 어리석은 마음이 날로 자라나 역량을 헤아리지도 않고, 망령되이 ‘우주 사이의 수많은 일들을 펼치고 얽어서 모두 나의 소유로 삼은 뒤에야 학문하는 일을 끝마칠 수 있으니, 비록 하찮은 기예나 작은 술수라도 반드시 뜻을 두어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8)
라고 할 만큼 자신만만해했음을 엿볼 수 있다. 또 자식들에게 훈계하면서 “내가 경험한 바를 말하면 스무 살 전후 보고 읽은 것은 지금도 대략 남아있지만 서른 살 이후는 깨진 항아리에 물을 담는 것과 같았다. 사람이 젊어서 부지런히 학습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으니, 뒤늦게 후회한들 어찌 끝이 있겠느냐?”9)
라고 하는 데서 역시 약관의 수학기 때 가장 총명했었음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의 재기는 30, 40대에 구체적 성과들을 낳았다. 1810년(순조 10) 5월경, 규남이 30세 되던 해, 과거에 합격하여 주서(注書)를 지낸 오하철(吳夏哲)이 이웃으로 이사를 왔다. 일찍이 성균관에서 함께 지낸 인연이 있었는데, 다시 만남을 통해 서울 학계의 분위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고, 이것이 규남에게 새로운 자극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맥락에서 『자승차도해(自升車圖解)』를 저술하였고, 이듬해 『동국지도(東國地圖)』를 남겼다. 30대 후반인 1816년(동 16) 가을, 진사시 이후 14년만에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 다시 서울로 갔다. 이 기간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당시 서울 학인(學人)들의 분위기를 통해 서양 학문에 눈을 떴다. 그리하여 「역상차록(曆象箚錄)」, 「호옥재기윤주설변」(胡玉齋朞閏註說辨)」 등을 짓고,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를 제작하는 등 천문학에 대한 성과들을 남겼다. 이는 그의 학문 경향에 큰 변화가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증좌들이었다. 규남은 더 큰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간절하였다. 그래서 40세 되던 1820년(동 20) 판서 이희갑(李羲甲, 1764~1847)에게 편지를 올려 연경으로 가는 사신 행렬에 동참하여 중국의 문물을 체험하고 싶다는 소원을 간곡하게 내비쳤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가 그만큼 컸다. 그러나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하였다. 다만 이듬해 세계지도인 「태서회사이마두만국전도(泰西會士利瑪竇萬國全圖)」를 그려 더 넓은 세상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그리고 이후 계속 과거에 응시하기도 하고, 또 집안과 연고가 있는 오희상(吳熙常), 유성주(兪星柱) 등 유력인들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기도 하였다. 절절함이 엿보인다. 이런 모든 시도들이 여의치 않자, 40대 후반에는 실의기(失意期)를 맞는다. 시를 통해 그런 정서를 표현했다.10) 그는 시를 통해 “내 나이 사십구 세/ 침체한 삶 스스로 아는 것”,11) “본래 재주 없게 태어난 규남 늙은이/ 한평생 어리석은 삶 누가 시기할까”12)라 하는 등 많은 시에서 우수에 젖어 신세를 한탄할 만큼 어려운 시절을 겪었다. 1832년(동 32) 52세 때 자명종을 제작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관찰사의 천거로 사환기(仕宦期)를 맞는다. 근 10년에 걸친 관직생활 동안에 의금부도사나 형조좌랑 등을 거친다. 그러나 실의기의 감정은 사환기에도 여전히 이어졌다. 「금오에서 밤에 숙직하며」란 제목의 시에서조차 “앞날의 계획 모두 어긋났구나/ 남쪽 고향 내 집은 어디메인가”13)라거나 “부끄러워라 낮은 벼슬로 늙어가는 잠랑(潛郞)”,14) “한미한 벼슬로 대장부의 몸 그르쳤지/ 문득 팔 년을 고향 떠난 나그네”15)라 하여 느지막이 사환길에 나섰으나 낮은 벼슬에 머무르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했다. 실의기와 사환기를 거치면서 아쉽게도 과학적 성취로부터는 멀어졌다. 반면에 가학을 세우는 일에 더욱 집착하였다. 자식들에게 보낸 많은 편지글에 그런 심정을 절절히 담았다. 자신이 다 못한 성취를 다음 세대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사환기의 끝에 불행히 유배를 당하였고, 유배에서 1년 만에 풀려나 집으로 돌아와 이듬해 1844년(헌종 10) 8월, 생을 마쳤다. 3. 30세 즈음의 성취들 그는 젊은 시절에 “우주 사이의 수많은 사물들을 빠짐없이 망라하여 모두 내 것으로 삼은 이후에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16) 하여 백과전서파적 지향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 또한 당시 시대적 조류였다. 30세 즈음은 이런 시대적 조류 안에서 가학 및 지역적 전통에 기반하여 창의력을 발휘하였다. 그 성과로는 수차인 자승차가 대표적이고 『동국지도』가 그 뒤를 이었다. 1) 『자승차도해(自陞車圖解)』 규남의 과학적 성취로 첫손에 꼽는 것은 수차인 자승차이다. 자승차는 흐르는 냇물의 힘을 이용하여 낮은 곳의 냇가에서 물을 퍼 올려 지대가 높은 곳의 논으로 대주는 기계란 뜻으로 자동양수기에 해당한다. 이는 30세 때의 성과였다. (1) 배경 먼저 규남이 왜 수차에 관심을 가졌을까?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18세기 중반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수차와 수리학(水利學)에 대해 종전과는 다른 관심을 보였다.17) 그 하나로 1795년(정조 19) 전좌랑 이우형(李宇炯)이 상소를 올려 물이 흐르는 곳[流水處]에서는 용미차(龍尾車)를 쓸 수 있고, 용골차(龍骨車)가 그 다음이고, 물이 멈춰 있는 곳[止水處]에서는 항승차(恒升車)를 쓸 수 있고, 옥형(玉衡)이나 고전(高轉) 같은 것들도 좋으니 전국적으로 통행하자는 건의를 한 예를 들 수 있다.18) 그러던 것이 1798년(동 22)에 내린 정조의 「권농정구농서윤음(勸農政求農書綸音)」을 계기로 수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특히 윤음에서 수차를 포함한 ‘흥수공(興水功)’을 제일 강조했던 것의 영향이 컸다. 정조는 윤음에서 “농사짓는 근본은 부지런함과 수고함에 달려 있는데, 그 요체는 역시 ①수리 사업을 일으키고[興水功], ②농작물을 토질에 맞게 심으며[相土宜], ③농기구를 잘 마련하는 것[利農器]뿐이다. 이 세 가지가 그 요체인데, 그 가운데서도 수리 사업[水功]이 첫 번째를 차지한다.”19)
고 하고, 이어서 전국의 유생들과 관료들에게 농사일에 도움이 될 만한 견해가 있으면, 상소를 올리거나 책으로 엮거나 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특히 “이속(異俗)에 빠지거나 예전 방법에 구애되지 말고, 바닷가와 산골, 기름진 땅과 메마른 땅에 맞추어서 각자 마땅한 방법을 진달하라”고 명하였다.20) 이에 대해 올린 상소문들에서 수공에 대한 주요 관심은 여전히 “제언과 보·제방의 수축”이었지만, 수차도 자주 거론되었다. 그만큼 수차에 대한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전 감찰 이우형은 또 다시 용미(龍尾), 고전통차(高轉筒車), 항승차(恒升車) 등을 중심으로 수차에 대한 의견을 올렸다. 호남 출신이었던 이우형은 “수차를 만드는 법은 전 찰방 이우형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라 할 만큼 수차 전문가로 식자층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 강진(고창?) 출신 이여박(李如樸, 1740~1822)21) 역시 용미차를 개발, 시험 제작, 가동하기도 하고, 「진수차설소(進水車說疏)」를 지어 바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수차에 대한 이해는 호남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 특히 신경준은 『수차도설(水車圖說)』에서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태서수법(泰西水法)』의 용미차·옥형차·항승차 등에 대한 내용을 그림과 함께 구체적으로 옮겨 놓았다. 알다시피 신경준은 규남의 증조 하영청의 먼 친척이었고, 1754년(영조 30)에는 직접 하영청을 찾아와 교류한 적도 있었다. 더 나아가 하백원이 살던 동복지역에는 이미 나경적이 자전수차를 제작할 정도로 수차에 대한 지식이 확산되어 있었고, 나경적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자명종과 자전수차에 대한 지식은 증손자 나상근에게까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백원은 나상근과 동시대에 한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자동기기에 대한 관심이 컸으리라 여겨진다. 수차 및 수리학에 대한 지식의 유행, 정조의 윤음, 또 타지역에 비해 유난히 서양식 수차에 대한 지식이 많이 보급되어 있던 호남지역, 그중에서도 나경적이 남긴 동복의 지적 맥락 등이 규남으로 하여금 일찍부터 수차에 관심을 갖게 한 배경이 되었다. 더구나 규남은 중국의 전통적 수차나 서양식 수차에 대하여 비판적 수용의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태도가 있어 자승차라는 창성(刱成)적 성과를 낼 수 있었다. (2) 자승차의 구조와 작동원리 규남은 “비옥한 들판과 기름진 토양이 지세가 조금만 높으면 열흘의 가뭄에 이미 타들어 감을 걱정해야 하니,”22) 이를 돕기 위해 ‘자승(自升)’이라 이름을 붙여 사람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이익을 얻게 하고자 하였다. 어떻게 ‘자승’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다음과 같이 물의 성질을 이해하였고 그와 같은 물의 성질에 따르면 ‘자승’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즉 “물의 성질은 가운데가 채워지기 때문에 빈 곳으로 나아갈 수 있고, 어떤 물건이 막으면 물은 나아갈 수 없다. 물이 아래로 나아간다 함은 물이 위아래로 나뉜다는 것이 아니라 빈 곳을 따라 흘러갈 뿐이다. 샘물이 아래에서 솟아나와 위로 넘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물을 인도하여 격동시켜 노하게 할 수 있고[激怒], 빨아들여 취할 수도 있으며[吸取], 몰아서 올라가게 할 수도[驅升] 있음을 알게 된다. 지금 이 수차는 다섯 방향[五方, 동서남북중앙]을 채우되 가운데를 통하게 하고 위를 비워두었기 때문에 물이 들어오는 것은 있지만 나가는 것이 없어 저절로 빈 곳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 수차를 자승이라 명명한 것은 실로 물의 성질을 따랐기 때문”23)
이라 하였다. “빈 곳으로 나아가는” 물의 성질을 이용하여 ①격노(激怒), ②흡취(吸取), ③구승(驅升)의 세 단계를 거치면 자동양수가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수차를 방통(方筒, Cylinder), 수륜(水輪, Gear), 가(架, Frame)의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흐르는 강물이 평조(平槽)에서 언조(偃槽)로 주입되면, 부채처럼 생긴 수삽(水箑, Turbine)을 쳐서 회전하게 하여 수륜을 돌게 하고[①격노] 여기에 연결된 쌍륜이 돌면서 수저(水杵, Piston, 공이)의 치를 밀어 오르내리게 한다. 이때 방통 아래 설치된 두 개의 설(舌, 밸브)이 엇갈리게 움직여 수저가 올라갈 때 물을 빨아들여 앞 통을 채우고[②흡취], 다시 수저가 내려가면서 고인 물을 뒤 통으로 몰아 올라가는 통을 따라 올라가[③구승] 양수가 가능하도록 구상하였다. 수차의 이름을 자승이라 한 것도 빈 곳으로 나아가는 물의 성질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었다.24)
【그림 3】실린더와 피스톤에 해당하는 방통(方筒)의 구성 부분 그림
【그림 4】흐르는 강물을 받아 동력을 얻는 수륜의 구성 부분 그림. 수치까지 상세히 적어서 누구나 제작이 가능하게 하였다.
【그림 6】자승차의 작동 원리. 문중양,
(3) 창성적 성과 규남의 자승차는 어떤 점에서 여타와 구별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닐까? 첫째는 ‘창성일법(刱成一法)’이란 생각 자체이다. 규남은 기존 수차들이 지닌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가지 책들을 고증하여 “스스로 천 번 생각한 끝에 터득한 바가 있어서 한 가지 방법을 창안하여 완성시키고[刱成一法]”라 하여 자승차를 ‘창성’했다고 하였는데, 바로 스스로 창안했다는 그 점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 둘째는 도해(圖解), 즉 수치가 포함된 그림 설명서를 붙였다는 점이다. “상세히 그림 설명서로 드러내어 농부들에게 보게끔 한다. 온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본떠 행하여 월나라의 호미나 연나라의 함처럼 여긴다면, 족히 풍속을 이롭게 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라 하였다. 농부들이 누구나 도해를 통해 보고 만들어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도해를 붙여 놓았다. 이는 창성의 성과를 농부들에게 나누어 이용후생의 뜻이 널리 퍼질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여기에 진정 실학의 정신이 담겨 있다. 셋째는 새로운 기술적 장치들이다. 하나는 축, 수삽(水箑), 쌍륜으로 이루어진 수륜의 원형 회전운동이 수저의 직선운동을 만들어내도록 구상한 점인데, 당시에 이 두 운동이 결합된 수차는 없었다.25) 다른 하나는 강물의 흐름이 지나치게 빨라 수륜과 수삽이 급하게 돌아가 수저가 미처 오르내리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해 별도로 축을 만들고 대소전륜(大小全輪)을 설치하여 느리게 하는 장치를 고안하였는데, 이 또한 매우 새로운 시도였다. (4) 당대의 평가 조선 식자층이 지니고 있던 수차지식은 19세기 전반에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본리지(本利志)」 「관개도보(灌漑圖譜)」 편에 잘 정리되었다.26) 거기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하백원의 『자승차도해』이다. 『기기도설(奇器圖說)』, 『제기도설(諸器圖說)』, 『태서수법(泰西水法)』 등과 나란히 『자승차도해』 전문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서유구가 어떤 수차보다도 자승차의 정밀성을 높이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서유구는 1834년(순조 34) 전라감사로 있을 때 규남의 자승도해를 보고 이를 실용화하기 위해 규남에게 편지를 보내 부탁하였다. 그는 자승차에 대해 “집안마다 이 기계를 설치하여 가뭄에는 물을 끌어올리고 장마에는 물을 끌어내린다면, … 이용후생에 어찌 보탬이 적다 하겠는가?”라 하고, 표본제작을 거쳐 농정과 수리에 서둘러 이용하려 하였다. 다만, 이에 대해 규남이 “자승차도해는 곧 10여 년 전에 붓 가는 대로 써두고 미처 시험 삼아 활용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사용할 때가 설명할 때와 다를까 염려되어 감히 남에게 꺼내 보이지 않았습니다”라 하면서 “시험 삼아 활용해보지 않은 설계”라는 등의 이유로 거절해 실현될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자승차도해』 전문은 『임원경제지』에 그대로 실렸다. 이는 서유구가 자승차의 가치를 얼마나 높게 평가했는지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다만, 온갖 창성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자승차는 실제로 작동되지 못했다. 이는 당시 과학기술 내지 실측·실험의 현실적 한계, 정밀 제작 능력의 부족 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인접과학들이 같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고 또 자금 능력도 풍부해야 했으나 이는 시골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1) 李鉉淙(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이 1977년 1월, 景仁文化史의 영인본 『圭南文集』에 쓴 해제 참조.
2) 「이취오 규동에게 보낸 편지[與李聚五奎東]」(『규남문집(圭南文集)』 제3권 편지), 292쪽. 『규남문집』은 2017년 4월, 규남박물관·전남대학교·호남문화사상연구원·화순군에서 간행한 번역서를 활용하였다. 3) 「김화군수 유성주에게 보낸 편지」1[與兪金化星柱 己丑十二月]」(1829)(『규남문집』 제2권 편지), 221쪽. 4) 안동교, 「조선후기 호남실학에서 하백원(河百源)의 특징과 위상」(2017 규남박물관 학술논문집 『규남하백원 연구Ⅱ』, 규남박물관, 2017. 10), 220쪽. 5) 「墓碣銘」(宋秉璿, 1899.07), 『규남문집』 부록, 529쪽. 6) 「墓誌銘 幷序」(鄭琦, 1943년 단오절), 『규남문집』 부록, 540쪽. 7) 「與金尙書達淳 甲子八月」(1804년 8월)(『규남문집』 제2권, 書), 217쪽. 8) 「上洪參判奭周 丁丑」(1817)(『규남문집』 제2권, 書), 203∼204쪽. 9) 「「寄子瀷 戊戌正月」(1838년 1월)(『앉으나 서나 눈에 밟히는 얼굴-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2021년 규남박물관 자료집, 글쓴이 하백원, 옮긴이 이영숙·나상필, 규남박물관, 2021.12), 78쪽. 이 편지를 비롯하여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이 자료집에 편지 전문이 원문과 함께 번역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책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하 자료집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줄여서 썼다. 10)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명희, 「규남 하백원 시에 나타난 情懷의 변모 양상」(『규남 하백원의 실학사상 연구』, 규남실학사상연구회편, 경인문화사, 2007.12), 217쪽 참조. 11) 「歲暮端居偶次李白紫極宮韻」(『규남문집』 제1권, 詩), 127쪽. 12) 「平溪七夕夜坐」(『규남문집』 제1권, 詩), 154쪽. 13) 「直金吾夜」(『규남문집』 제1권, 詩), 162쪽. 14) 「次水館主人韻 己亥」(1839)(『규남문집』 제1권, 詩), 171쪽. 15) 「生朝有感」(1840)(『규남문집』 제1권, 詩), 171쪽. 16) 「김화군수 유성주에게 보낸 편지」1[與兪金化星柱 己丑十二月](1829)(『규남문집』 제2권 편지), 226쪽. 17) 이하 수차에 대한 일반 사항은 문중양, 「조선후기의 水車」(『한국문화』 15,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1994)를 참조하였다. 18) 『정조실록』 42권, 정조 19년(1795) 2월 18일 경오 2번째 기사. 19) 『정조실록』 50권, 정조 22년(1798) 11월 30일 기축 1번째 기사 “農之本, 在乎勤與勞, 而其要則亦惟曰興水功也, 相土宜也, 利農器也。 三者爲要, 水功居先” 20) 위와 같음. 21) 김덕진, 「조선후기 서양식 수차와 실학자 李如樸」(『남도문화연구』 제33권, 2017) 22) 「自升車圖解說」, 『규남문집』 제5권, 잡저, 374쪽. 23) 위와 같음. 24) 「還家」(『규남문집』 제1권, 詩), 194쪽. 25) 정명현, 같은 글, 180쪽 26) 문중양, 앞 글, 308∼310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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