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세 개의 마한과「마한역사문화권」- 신경준의 ‘후마한(後馬韓)설’에 주목하며(1)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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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 우리나라 고대 역사문화권을 대상으로 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약칭: 역사문화권정비법)이 2020년 6월 9일 제정, 올 6월 10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법에 명시된 역사문화권으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마한, 그리고 탐라 등 모두 6곳이다. 이때 특히 마한역사문화권에 대하여는 그 권역을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 마한 시대의 유적·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으로 한정하였다.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남 일대가 마한을 대표하는 역사문화권으로 지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남은 물론 광주, 전북까지 나서서 동아시아 고대해상왕국이었던 ‘마한’의 역사문화를 복원하여 지역 발전의 계기로 삼고자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마한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다만 영산강 유역에 타지역과 구분되는 독특한 역사문화가 5∼6세기경까지 존재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리고 이를 ‘마한’의 틀에서 이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산강 유역이 경기, 충청 등 또 다른 마한의 역사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들을 제치고 ‘마한역사문화권’이란 이름으로 특별법에 올랐다. 그래서 마한의 ‘역사’가 궁금해진다.
혼란스런 고대사 대한제국기에 마지막으로 증보·편찬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908) 중 관찬 지리지의 종합편에 해당하는 「여지고(輿地考)」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동방은 단군·기자 이래로부터 제국(諸國, 여러 나라들)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나라를 세웠고, 속국과 여국(與國, 동맹국)이 한 군이나 한 현과 같은 것으로 또 어지럽게 있었다. 서로 다투고 빼앗아 구역이 분명하지 못하고, 또 국호와 지명이 중복되고 혼잡하여, 마한·예맥·고구려가 둘이나 있었고, 옥저·안시(安市)가 셋이나 있었고, 부여가 넷이나 있었고, 대방이 다섯이나 있었고, 가야가 여섯이나 있었으며,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1)
우리나라 옛 나라들의 이름이나 땅 이름들이 중복되고 혼잡하여 마한·예맥·고구려가 둘, 옥저·안시가 셋, 부여가 넷, 대방이 다섯, 가야가 여섯이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어서 “하물며 우리 동국(東國)에서 국사를 만든 것이,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신라는 진흥왕 때부터, 고구려는 영양왕 때부터이니, 바로 중국 양나라와 수나라 사이지만, 이것도 오히려 전하지 아니하는데, 군국(郡國)의 옛 사실들을 어떻게 상고할 수 있겠는가?”
라 하여 우리나라의 옛 사서가 없어 정확한 고증이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측 사서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가 가장 오래된 것이지만, 그 저술 시점이 고대와는 너무 떨어져 있다. 중국측 사서들이 그나마 그 시대에 가깝다. 그래서 고조선의 역사는 『사기』와 『한서』, 삼한의 역사는 『후한서』와 『삼국지』에 주로 의존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들조차 내용도 미미하고 또 서로 차이도 많다. 그렇다.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역사서들 중 고대 이전의 역사에 대한 서술들은 ‘팩트’라기보다는 ‘해석’에 가깝다. 그리고 거기에는 저술 시점의 찬자(撰者)와 당대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 지금 학계에서도 저마다의 주장을 내세우며 자기 주장이 ‘사실’이라고 하지만, 진짜 ‘사실’은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마냥 쳇바퀴 돌 듯하기만 할 것인가? 여기에 변수가 생겼다. 원사료의 성격을 갖는 사서 - 예를 들면 『삼국지』나 『후한서』, 또는 『삼국사기』 등 - 는 더 이상 늘어날 수 없다. 변수는 고고학계의 발굴 성과들이다. 특히 근래에 들어 호남 일대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 성과들이 많았다. 그래서 부족한 사서를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이를 근거로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설들이 나온다. “영간상 유역 마한문화권”의 설정도 그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는 고고학계의 성과가 있어서 「특별법」에 등재될 수 있었다.2) 그러나 사서가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고고학’만으로는 ‘역사’를 주장하기에 한계가 있다. 여기서는 그런 한계가 있지만, 고고학계의 성과란 변수가 작용하여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이를 역사학의 관점에서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또 ‘마한’이 포괄하는 영역은 경기부터 충청, 전라까지 광범위하다. 따라서 전라남도만을 오롯이 ‘마한’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어색함이 있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을 찾아보았다. 먼저 마한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정리해보고 나아가 호남의 대표적 실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인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삼마한설(三馬韓說)’과 그 안의 ‘후마한’으로 전남지역 마한을 해석할 수 있을지 타진해보고자 한다. 마한에 대한 일반적 인식 먼저 문헌을 토대로 한 역사학계의 입장에서는 마한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마한은 삼한 중의 하나로 진국(辰國)에 뒤이어 기원전 2세기경부터 한반도 중부 및 서남부지역에 자리잡았고, 백제가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점차적으로 흡수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는 영산강 유역에 남아있던 잔여세력까지도 백제에 통합되었다고 본다. 즉 마한은 한강 이남 경기·충청·전라를 포괄하는 권역에 있던 소국들에 대한 총칭으로 ‘마한’이라는 통합된 고대국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삼한의 위치에 대해서는 마한은 경기·충청·전라지방, 진한은 낙동강의 동쪽, 변한은 낙동강의 서쪽으로 비정하고 있다.3) 『후한서』 「동이열전」 「한(韓)」을 보면,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辰韓),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 나라로 백제(伯濟)는 그중의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인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방 4천여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이 [한족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에 도읍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삼한의]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사실 이 기록만 제대로 보아도 현재의 일반적 인식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현재의 통설이 자리잡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왜 그랬을까? 그 배경에는 신라 말기 최치원(崔致遠, 857~ ?)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의 글이 있었다. 그는 ‘삼한일통의식’의 반영으로 삼한-삼국의 계승관계에 주목하여 마한=고구려, 변한(卞韓)=백제, 진한=신라로 이어진다고 보았고,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의 신라에 대해 ‘삼한’이라고 하였다.4) 이렇게 삼한을 삼국과 연결시킨 최치원의 삼한인식은 줄곧 부정하기 힘든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삼한=삼국”이란 인식틀의 구속에서 벗어나 이를 바로잡은 것은 70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한백겸(韓百謙, 1552∼1615)에 이르러서였다. 남자남 북자북(南自南北自北) –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조선후기로 들어오면서 문헌고증에 바탕을 둔 역사지리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역사지리학을 확립한 선구자가 한백겸이었고, 그 효시가 된 책이 『동국지리지』(1615년경)였다. 그는 우리나라 고대의 강역을 문헌고증의 방법으로 해명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후한서』 「삼한전」에 대한 해석에서 “남쪽은 옛날부터 남쪽이고, 북쪽은 옛날부터 북쪽으로, 본래 서로 침범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그 한계가 확실하게 어느 곳이었는지 알지 못하나, 아마 한강 남쪽 일대에 지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최치원이 이르기를,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라’고 한 것이 첫째 잘못이고, 권근은 비록 마한이 백제가 되는 것은 알았으나 고구려가 변한이 아니라는 것은 역시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이로부터 역사가들이 그릇되고 잘못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다시는 그 지역에 대해 그 사실을 밝히지 아니하여 드디어 한 구역의 삼한 땅을 가지고 좌우로 끌어당겨 어지럽고 착잡하여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사이에 정설(定說)이 없으니, 어찌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5)
라 하여 “남쪽은 옛날부터 남쪽이고, 북쪽은 옛날부터 북쪽으로[南自南北自北], 본래 서로 침범하지 아니하였다”라 하여 삼국 이전에는 한반도가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어 독자적으로 역사가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즉 북쪽은 삼조선의 땅으로, 남쪽은 삼한의 땅으로 비정하고 각각의 역사가 독자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아 남북 이원적 국사체계를 새로이 설정하였다. 이른바 ‘남북분야설(南北分野說)’이다.
이런 인식틀에서는 삼한을 굳이 삼국과 연결시킬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삼한은 각각 마한은 백제로,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로 계승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고구려는 빠졌다. 이와 같은 한백겸의 남북분야설과 삼한인식은 이후 정설이 되었고 지금 일반적 인식도 이와 같다. 신채호는 이런 한백겸을 “조선사계(朝鮮史界)에서 선생이 처음 사학의 단서를 열었다 하여도 가할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6) 한편 신경준은 한백겸의 설을 받아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동유(東儒)들의 삼한을 논한 자들이 예전에 삼한과 조선이 남북으로 대치하여 땅이 스스로 구별이 있음을 알지 못한 까닭에 삼한의 옛땅을 조선의 경계에서 항상 구하다 보니 마침내 신라·백제·고구려를 삼한에 분배하였다. 진(辰)은 항상 바뀌지 않았는데 변한과 마한은 서로 바뀌었다. … 『여지승람』 한 책에 비로소 삼한을 남쪽에, 조선은 북쪽에 두어 대체를 대강 짐작하였다.”
라 하여 신경준도 한백겸의 남북 이원적인 국사체계를 받아 ”삼한과 조선이 남북으로 대치하여 땅이 스스로 구별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른바 ‘남자남 북자북’의 역사인식을 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반드시 전라·충청 2도로 마한을 삼고 경상 일도로 진·변을 삼고 진이 북쪽에 변이 남쪽으로 한 연후에 『한서』와 가히 부합할 것이다. 내가 생각한즉 한구암[백겸]의 설이 삼한의 정론이 된다.”
고 하여 한백겸의 설이 『후한서』의 내용과 부합한다고 하여 정론으로 세웠다. 「강계고(疆界考)」에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여지고」로 - 관찬 지리서 편찬자 신경준 신경준은7) 이미 잘 알려진 호남의 대표적 실학자인데, ‘역사지리학자’로서의 신경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역사지리 연구는 그에 의해 한 단계 더 심화되었다. 특히 그는 관찬(官撰) 지리서의 편찬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일찍이 「강계고」(1756년)8)를 썼는데 그것이 인정받아 대표적 관찬지리서인 『동국문헌비고』(1770년)의 「여지고」 편찬을 주관하였다.9) 「여지고」는 한백겸 이후 일련의 역사지리 연구를 신경준의 입장에서 집대성한 것으로 당시대의 정설(定設)이라 할 수 있겠다. 고조선의 영역을 요동까지 확장시켜 보던 당시의 영역관 변화를 수용했고,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사실로 인정했다는 점 등은 특기할 만하다.10) 신경준은 개인의 역사지리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적인 편찬사업을 주도하게 된 ‘국가 공인’ 역사지리학자로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다른 많은 실학자들이 사찬(私撰) 활동에 그쳤음에 비하여 그는 국가사업에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실천적 지리학자로서 다른 실학파 지리학자들과는 구별된다.11) 관찬은 아무래도 사찬보다는 공신력이 더 크다고 본다. 교과서 시비가 큰 이유도 ‘교과서’라는 말 자체에 공신력이 담보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찬을 주도할 수 있었다는 점은 그가 풍부한 지식과 고증역량을 토대로 다양한 역사지리인식을 수렴하여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서술을 할 수 있다고 국가로부터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삼마한설’과 ‘후마한’에 주목하는 이유도 이와 같은 공신력에 있다. 신경준이 본 마한 - 삼마한설 신경준은 「강계고」에서 『후한서』의 기록을 소개한 다음, “진국(辰國)이 『전·후한서』, 『통전』, 『문헌통고』에 모두 소상하게 기재되었는데, 동사(東史)에는 하나도 나타난 것이 없으니, 소루함이 심합니다”라 하여 우리나라 사서에 기록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대개 진(辰)은 조선과 남북으로 나누어 나라를 세운 것인데, 그 시말을 상고할 수 없고, 진국(辰國)의 뒤에 마한이 되고, 마한이 나뉘어 삼한이 되었습니다”12)라 하였다. 또 『후한서』에서 “과거에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절멸(絶滅)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自立)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는 등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살피건대 기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이를 파(破)하였다고 한즉 이는 기준의 전에 이미 마한이 있었다는 뜻이다. ‘준의 후손이 절멸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이 되었다’라 하였으니 그런즉 이는 기준의 후에 다시 마한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사(東史)에는 모두 마한을 다만 기준의 나라라고 하였고, 마한의 역사 연대를 논한 데에 이르러서는, ‘한나라 혜제 정미년(기원전 194)에 일어나서 신나라 왕망 기사년(9)에까지 이르렀으니, 모두 2백 3년이라’하였고, 또 ‘사군 이부의 시대를 지났으니, 대를 전한 것이 또한 2백 년이므로, 기준의 나라가 마한의 시종(始終)이 된다’고 하였다.13)
고 하여 마한의 시종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예로 들면서 이런 시종 인식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대안으로 “살피건대 마한은 셋이 있다. 전후 두 마한 사이에 기준마한이 있다. 기준마한의 시작은 가히 알 수 있으나 그 끝은 알 수 없다. 전후마한과 진변(辰弁) 이한(二韓)의 끝은 가히 알 수 있으나 그 시작은 알 수 없다. … 기준이 마한으로 도망쳐 온 해,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해로 마한의 시종으로 삼았는데 이는 세 개의 마한이 있음을 몰랐기 때문이다.”14)
라 하여 이른바 “①기준이 탈취한 마한, ②기준의 마한, ③기준의 후손 이후의 마한”으로 모두 세 마한이 있다는 ‘삼마한설’을 주장하였다.15) 신경준의 「강계고」에 기반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를 보면 단군조선국부터 시작하는 「역대국계(歷代國界)」에 남쪽 지역에 대하여는 진국(辰國)부터 마한국, 기준마한국, 후마한국, 진한국, 변한국(弁韓國)까지 같은 수준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를 보면, 마한을 “마한국, 기준마한국, 후마한국” 등 세 개의 마한으로 각각 구분하고 있어 삼마한설을 정론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증보문헌비고』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또 마한국부터 변한국까지 모두 ‘한국’이란 명칭을 쓰고 있어 북은 ‘조선’으로 남은 ‘한국’으로 구분하는 “남자남 북자북”의 인식이 반영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1)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제13권 「여지고」 1(『증보문헌비고』1, 13쪽, 세종대왕기녑사업회, 1978). 이는 신경준이 쓴 『동국문헌비고』 권6 「여지고」1의 서문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2) 고고학계의 입장에서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문화권에 대하여 가장 적극적인 주장을 펼친 임영진 교수의 『우리가 몰랐던 마한』(HOLLYDAYBOOKS, 2021.07)에서 그 대체를 살필 수 있다. 그밖에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단행본, 논문들이 활발하게 발표되어 왔다. 3) 최성락, 「馬韓論의 實體와 問題點」(『박물관연보』9, 목포대 박물관, 2000.11), 11∼12쪽. 4) 문창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 연구-연구 추이와 특징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연구』 62, 2011.06, 한국고대사학회), 63쪽. 이 글은 수정·보완하여 『실학자들의 한국 고대사 인식』(2012.11,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 편, 경인문화사)에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삼한사 연구와 의의」로 재수록되었다. 5) 『東國地理志』 「後漢書」 「三韓傳」 6) 고영진, 「한백겸」(『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 1994.05, 창비신서), 187쪽. 7) 신경준에 대하여는 (재)한국학호남진흥원의 「호남학산책」에 기게재한 필자의 「다시 보는 한글-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훈민정음운해』를 중심으로」(1)(2) 참조. 8) 이 글에서 활용한 「강계고」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신경준의 『여암전서(旅菴全書)』 권4∼7의 것이다. 9) 신경준의 역사지리 인식에 대하여는 朴仁鎬, 『朝鮮後期 歷史地理學 硏究』(이회, 1996.11) 중 제2장 「신경준의 『동국문헌비고』「여지고」」 참조. 10) 정재훈, 「실학자들의 ‘한국사’ 탐구」(『한국사 시민강좌』 48, 2011.02 일조각), 98쪽. 박인호, 「신경준」(『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상), 1994.05, 창비신서), 255쪽. 11) 양보경,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국토』, 1999.05, 국토연구원), 38, 42쪽. 12) 『旅菴全書』 권5, 「疆界考」 「辰國」 「漢書 眞番 辰國 欲上書見天子」 13) 『旅菴全書』 권5, 「疆界考」 「箕準馬韓國」 14) 『旅菴全書』 권5, 「疆界考」 「三韓歷年之辨」 15) 이는 『증보문헌비고』 제13권 「여지고」 1 「역대국계」1 「기준마한국」(『증보문헌비고』1, 80쪽, 세종대왕기녑사업회, 1978)에 “기준이 탈취한 마한과 기준의 후손 이후의 마한과 기준의 마한으로 모두 세 마한입니다”라고 정리되었다.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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