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내 일같이 , 우리 일처럼 게시기간 : 2021-12-1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2-10 11:0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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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지(所志)-한 목소리로 함께 정성이 부르자 도움이 오다 한 사냥꾼이 꿩을 산 채로 잡아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오더니 대뜸 “그 꿩을 제게 주실래요?. 우리 할머니께 꿩요리를 만들어 드리려고 해서요.”라고 한다. 처음 보는 아이인데 당돌하게 꿩을 달라고 하자 사냥꾼은
“값을 치러야 할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는 “닭과 바꾸면 될까요?” “음, 그건 너무 작아서 싼 편이구나” “그러면 소와 바꾸면 될까요?” 사냥꾼은 아이의 말을 듣고는 기특하게 여겨 자기가 잡은 꿩을 그냥 주었다. 남평 도래마을 효자 홍현주(洪顯周)의 어릴 때 사연이다. 할머니가 설사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자 꿩요리를 만들어 드리려고 했던 것이다. 어린 아이인데도 불구하고 할머니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사냥꾼은 기특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아이는 꿩을 소와 바꾸자로 제안했다. 조선시대 소는 매우 가치가 높은 재산이었을 뿐 아니라 나라에서도 특별히 관리하는 동물이었다. 소를 함부로 도살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나라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이는 선뜻 소를 내놓겠다고 하였다. 그 만큼 할머니를 위하는 아이의 마음은 크고 간절했고, 사냥꾼도 그 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홍현주가 할머니를 위해 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다. 오랫동안 앓아 누워 있으니 몸을 제대로 씻지 못해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이도 생겼다. 그는 할머니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빗기고 자기 머리카락을 풀어 할머니 머리카락에 갖다 대었다. 할머니 머리카락에 붙은 이가 자기 머리카락으로 옮겨 오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의 발상치고는 상당히 기상천외하다. 할머니를 평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이리저리 궁리하는 모습이다. 그의 어머니가 아팠을 때다. 약을 사러 집에서 좀 멀리 있는 곳으로 갔다. 해가 지고 저녁 시간에 되어서야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이미 한밤이 되어 컴컴했다. 앞이 잘 안 보였다. 게다가 폭우까지 내렸다. 길 찾기기도 쉽지 않은데 어렵게 사온 약까지 다 젖을 판이었다. 그런데 그 때 지나가던 어떤 이가 묻지도 않고 유의(油衣)를 선뜻 내주었다. 유의는 종이에 기름을 먹여 물에 젖지 않게 하여 그것으로 만든 일종의 비옷이다. 종이가 싸지 않던 시대에, 그것도 기름 먹인 종이 비옷이라면 가격이 꽤 비쌌을 터이다. 그런데 처음보는 젊은이에게 그냥 내주었다. 어머니에게 드릴 약이 젖을세라 품에 안고, 혹 늦게 집에 도착하여 약을 제때 드리지 못할까하는 젊은이의 조바심을 봤던 것일까. 어머니가 아주 독한 설사병으로 또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었다. 생선을 먹고 싶어하자, 한 겨울에 냇가로 나가 쌓인 눈을 헤치고 얼음을 깨면서 물고기를 잡아다 요리해서 드리기도 했다. 집 근처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사기도 했는데, 생선이 있다면 값을 묻지 않고 무조건 샀다. 그의 사정을 눈치챈 생선장수는 싱싱한 생선이 있을 때면 아무에게도 팔지 않고 꼭 홍현주에게 먼저 팔았다.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는 그의 효심과 정성에 감동했던 것은 아닐까. 효심에서 우애심까지 1794년(정조 18) 정명흠(鄭明欽)은 38명과 함께 홍현주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남평현감에게 소지(所志)를 올렸다. 39명의 연명(聯名)이 달린 소지였다. 소지란 조선시대 주로 일반백성들이 관청에 제출했던 글이다. 소장(訴狀) 청원서(請願書) 진정서(陳情書) 등 민원(民願)에 관한 문서라고 할 수 있다. 정명흠은 홍현주의 효심 깊은 행적을 묻어두기에는 안타깝다고 여겨 인근의 여러 사람과 함께 홍현주를 ‘효자’로 추천하는 글을 올렸던 것이다. 우리 마을 풍산홍씨(豐山洪氏)는 호남에서 명성과 덕망이 있는 집안입니다. 멀리 위로는 직학공 홍지경(洪之慶)이 있고, 성천부사를 지낸 홍수(洪樹)가 있습니다. 지금 그 후손인 사인 홍현주(洪顯周)는 형조참의인 홍봉주(洪鳳周)의 동생입니다. 집에 있을 때에는 효도하고 우애있는 행동을 했습니다. 집안에 아픈 어른의 병시중을 들 때 변을 맛보는 일도 하여 하늘도 감격하는 정성이 있었습니다. 여름에 피눈물을 흘리며 상(喪)을 치르면서 진심을 다하고 후하게 하였습니다. 초츤(髫齔)의 나이일 때부터 부모나 집안 어른을 사랑하는 정성이 컸습니다.…(중략)…어머니가 병들자 말년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허리띠도 풀지 않고 살폈습니다. 컴컴한 밤중에 혹 설사라도 하면 손을 내밀어 받아내 맛을 보기도 했습니다. 깊은 밤이면 반드시 몸을 깨끗하게 하고서 하늘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진심으로 슬퍼했고, 염습이나 장례를 치르는 일도 예법에 딱 맞추면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무덤이 10리 거리에 있었는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상관하지 않고 한결같이 날마다 성묘하였습니다.
우선 홍현주 집안 연원이 오래되고 명망있는 집안임을 밝혔다. 풍산홍씨는 고려 때 국학직학을 지낸 홍지경이 풍산에 정착하면서 홍씨의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단종 때 성천부사을 지낸 홍수는 단종 폐위를 반대했고 이로 인해 화를 입게 되자 나주 금안동으로 피했다. 중종 때 홍한의(洪漢義)가 기묘사화를 피해 남평으로 들어오면서 정착하게 되었다. 홍현주는 그들의 후손인 셈이다. 효행의 근원이 집안의 덕망에 있음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홍현주의 효행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있었음도 밝혔다. 초츤(髫齔)이란 이를 막 갈기 시작하는 때이다. 젖니를 갈아 영구치로 바꾸기 시작하는 나이로 7,8세 정도의 어린이를 말한다. 이는 그의 효행이 학습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미 타고난 성정이 효성스러웠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명흠의 소지는 홍현주의 효심이 타고난 것이고 또 그것을 어려서부터 실천했고, 늙을 때까지도 변함없었음을 서술한다. 위에 말한 여러 가지 일들을 포함하여 할머니와 어머니 병 시중을 들면서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한 일, 똥을 맛보아 가면서 증상을 관찰하고 그에 맞게 약을 적절히 달여 올렸던 일, 상례를 치를 때 예법에 맞게 한 일, 장례가 끝난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했던 일 등을 썼다. 그의 효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를 밝히는 대목이다. 이어서 홍현주의 우애도 보여준다. 막내동생 홍면주(洪冕周)가 전염병에 걸렸습니다. 둘째동생 홍정주(洪鼎周)와 함께 밤낮으로 서로 안고 있으면서 땀이 나지 않는다며 매우 걱정했습니다. 한밤중에 이불도 같이 덮고 약도 먹여주면서 정성을 다했습니다. 자신도 전염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불행히도 막내동생은 죽었습니다만 효자 홍현주는 아무 탈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지금의 유숙포(庾叔褒)구나.”라고 말하였습니다.
유숙포는 진(晉)나라 사람 유곤(庾袞)이다. 당시 전염볌이 확산되어 3명의 형 중 2명이 죽고 유비(庾毗)만 남았다. 유비도 곧 전염병에 걸리자 집안 사람들은 혹시 전염될까 무서워하여 다른 곳으로 피하였다. 그러나 유곤은 혼자 남아 간호했고 둘다 살아남았다. 전염병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적, 사회적 문제이며, 더 강해지거나 전파 범위가 확대되면 펜데믹으로 발전한다. 전염에 대한 공포는 시공간과 무관하다. 의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에 전염병에 대한 공포심은 더 심했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곤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형 유비를 살려냈다. 그의 이야기는 형제간의 우애를 말할 때 자주 언급된다. 정명흠은 홍현주를 유곤에 비유하여 우애가 돈독했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효심은 물론이고 우애심까지 갖춘 훌륭한 인품과 덕행을 겸비한 인물로 서술했다. 아울러 홍현주에게 생긴 일들은 모두 ‘정성이 하늘을 감격시킨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홍현주의 정성, 진심이 사람뿐 아니라 하늘에까지 닿아 신의 마음조차 움직이게 했다는 말이다.
긴 시간의 어려운 일, 그래도 함께 한 일 홍현주에게 일어났던 일들, 믿기 쉽지 않지만 또한 있을 법한 일이기도 하다. 홍씨 집안과 정명흠은 홍현주의 효행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그의 효행이 마을 안에서만 전해지는 일은 애석했다. 전국적으로 알리고 공적으로 인정 받고 싶었고 그에 합당한 포상을 받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을까. 조선시대는 유교 윤리를 국가적 차원에서 권장했다. 특히 효를 강조했다. 지방의 목민관들이 꼭 해야할 일 중 하나는 그 지역에서 효행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내 조정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 ‘효도, 우애 절의 등의 선행을 한 사람을 연말에 예조가 정기적으로 기록하여 왕에게 아뢴다.’고 명문화했다. 급복(給復)이란 제도도 있었다. 충·효·열에서 남다르고 탁월한 행적이 있는 사람 또는 그 집안에 대해 세금이나 부역을 면제해주는 제도였다. 효행이 국가적으로 공식 인정되면 그에 부합하는 혜택이 주어졌던 것이다. 작게는 쌀이나 옷감 등 일종의 상으로 주어지는 물품을 내려주기도 한다. 크게는 효행을 표시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문을 세우는 정문(旌門)을 내려 표창하거나, 효행자의 집안에 부과된 부역이나 세금도 면제되었다. 벼슬이 없으면 벼슬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이미 벼슬이 있으면 한 등급씩 오르기도 했다. 심지어 하층민이라면 면천(免賤)하여 신분도 상승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혜택이 큰 만큼 국가의 공식적 인정을 받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전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포상을 청원하는 글이 접수되면 사실 여부를 꼭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다. 그 마을에 가서 조사하기도 하고 향교나 서원 등 그 지역 사림들의 여론을 문서로 제출하도록 했다. 정명흠의 이 소지는 바로 ‘마을 사람들, 사림들의 여론’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단 한번의 여론 표현만으로 효행이 공인되지 못했다. 반복적인 여론 형성과 여론을 담아낸 글을 제출하는 일이 있어야 했다. 홍씨집안에서도 지속적으로 했던 듯하다. 정명흠이 1794년에 소지를 올렸고, 1808년에는 기태온과 87명이 연명하여 당시 호남의 암행어사로 온 서유망(徐有望)에게도 글을 올렸다. 여기에는 나주부터 광주, 순창, 보성, 강진, 해남 등 호남 전 지역에 있는 유림들이 함께 하면서 반드시 정려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유망은 ‘취사 선택이 매우 어려우므로 현재 헤아리고 있는 중’이라고 답하였다. 호남 전역 유림의 여론에 대한 중압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어서 1820년에는 기태검(奇泰儉)등 35명이 계(啓)를 올렸고, 1821년에는 김기휴(金驥休) 등 53명이 관찰사에게 상서(上書)를 올렸다. 거의 30년에 걸쳐 호남의 유림들이 힘을 모아 홍현주의 효행에 대한 포상과 정려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홍효자의 일은 일찌감치 들어서 알고 있어 감영에 알려 임금께도 전해지게 하고 싶었지만 때를 놓쳐버렸으니, 관찰사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올리는 게 합당할 듯’하다거나 ‘지금 상량(商量) 중에 있다.’ 등이다. 또 남평현감으로부터 관찰사에까지 글이 올라갔지만 관찰사는 ‘가상한 일이니 살펴서 잘 처리하라.’고 남평현감에게 미루었다.
1808년 기태온 등 88명이 올린 상서 1820년에 기태검이 올린 글.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소지를 작성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실제 효행의 실제 행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인근 사람이나 특히 지역 유림들이 수용하고 인정해야 여론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집안 사람들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한편, 여론을 형성하여 현감에게 전달하고 관찰사를 거쳐 임금에게 이르는 일은 또 하나의 어려운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현주를 위해 호남의 사람들, 유림들은 30년 동안 노력했다. 이 일은 개인적이고 사적인 가문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국가의 인정을 받게 되면 벼슬길도 열리고 가문의 명예도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효행의 포상이나 정려 요청은 온 마을, 전 지역 사람들이 힘을 모았다. 그 집안 영광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잘 되면 기뻐하는 이도 있고, 내심 시기하는 이도 있는 법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뻐하는 것도 시기하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다만 기쁨을 함께하고, 기뻐할 일을 함께 만들어가고 이뤄내는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일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행복 포만감도 정비례할 듯하다. <도움 받은 글> 사진, 한국학호남진흥원 제공
박주(1988) ‘조선시대 효자에 대한 정표정책’, 『한국사상사학』 10(1), 한국사상사학회. 김혁(2004), ‘19세기 김채상 집안의 효자정려 취득과정, 『장서각』 12,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주(2007), ’18·19세기 동래부 영양천씨 집안의 효자정려 청원 과정‘, 『사학연구』 85, 한국사학회. 권수용 외 6인(2020), 『남평 도래풍산홍씨 석애문중』(호남한국학기초자료해제집3), 한국학호남진흥원.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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