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기억] 세 개의 마한과「마한역사문화권」-신경준의 ‘후마한(後馬韓)설’에 주목하며(2) 게시기간 : 2021-12-17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2-14 09:52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풍경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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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한에 대한 인식 「강계고」에서는 최초의 마한, 즉 ‘마한국’에 대하여 “대개 지금 전라·충청 두 도(道)의 땅이 마한의 본래 강역이다. 성세를 이룰 때에는 한강을 넘어 그 이북의 땅도 차지했었다”라 하였고, 이어서 ‘기준마한국’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를 보면, 기준의 마한은 『삼국사』에 “백제 시조왕[온조] 26년(AD 8) 겨울에 사냥을 간다 하고 몰래 군대를 이끌고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그 나라를 병탄하였다”라 하여 온조에 의해 병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 본기에, ‘탈해왕 5년(61) 마한의 맹소(孟召)가 복암성을 들어 항복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때는 마한이 망한 지 이미 50여 년이었습니다. 고구려 본기에, ‘태조왕 66년(118)에 마한 예맥으로써 한나라 현도군을 포위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는 마한이 망한 지 이미 1백여 년이었습니다.”
라 하여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어찌 구신(舊臣)과 유민(遺民)들이 오히려 제(齊, 백제)에 모두 항복하지 않고 이따금 항거해 지키면서 오히려 망한 나라의 옛 이름을 칭한 것인지, 아니면 마한이 중간에 다시 일어났으나 쇠잔하고 작아서 나라답지 아니하므로 그 흥하고 망한 것이 역사에 기재되지 아니하고, 사건으로 인하여 책에 나타난 것인지? 마한은 망하였으나 원산(圓山)·금현(錦峴) 두 성은 또한 단단히 지켜 항복하지 않았고 훗날 백제에 귀속되었다.”1)
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온조왕 26년, 즉 AD 8년에 마한이 한꺼번에 망하지 않았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기준 이후의 마한 즉 후마한의 존재를 제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후마한의 존재가 “중간에 다시 일어났으나 쇠잔하고 작아서 나라답지 아니”하였을 수도 있다는 의문은 그럴 수도 있어 보인다. 후마한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후마한, 곧 기준 이후의 마한에 대해서는 여럿이 말하고 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삼한후설(三韓後說)」에서 “상고하건대 선한(鮮韓, 조선과 한국) 때에 동쪽 한 지역에 나라로 이름하는 것이 거의 백으로 헤아렸는데, 삼국이 함께 일어나 점차 여러 나라를 침탈한 뒤에 세 나라만 존립하고 말았다. … 백제가 마한을 습격하였다고 해서 일시에 그 땅이 몽땅 먹혀버리지는 않았을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마치 단번에 몽땅 먹어치운 것처럼 되었으니, 반드시 그럴 이치가 없는 것이라 사씨(史氏)가 잘못 기록한 것이다.”2)
라 하였다. “백제가 마한을 습격하였다고 해서 일시에 그 땅이 몽땅 먹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라 하여 후마한의 존재 가능성을 지적하였다. 이는 잡설에서도 “특히 온조가 마한을 습격함에 있어 그 형세 응당 일시에 여러 소국(小國)들을 다 겸병하지 못하였을 것인데, 마치 한 번 싸워 다 겸병하여 도무지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하였으며, … ”3)
라 하여 『삼국사기』의 오류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있다. 그 후 한치윤·한진서의 『해동역사(海東繹史)』(1823년)에서도 “진서[韓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마한이 이미 온조왕이 살아 있을 적에 망하였다고 하였는데, 서진(265∼317) 시대에도 마한 등 20여 국이 능히 각자 조공을 바쳤다. 그런즉 온조가 멸한 바는 마한을 총괄하던 왕의 나라에 불과하며, 그 나머지 마한에 소속되었던 여러 나라는 미처 통일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후한서』와 『위서(魏書)』에서는 모두 마한은 54국이라고 하였는바, 백제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범엽(范曄)과 진수(陳壽, 233~297)가 역사서를 찬수할 때에도 백제는 오히려 통일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4)
라 하여 백제가 4세기 초까지도 마한을 다 통일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기씨(箕氏)가 멸망한 것은 이미 우거 때보다 앞이었다. 그렇다면 기준이 취한 마한, 기씨 이후의 마한, 기씨가 세운 마한, 합하여 세 마한이 있는 것이다.”5)
라 하여 한진서도 역시 기준 이후의 마한인 후마한을 포함한 삼마한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또, 「강역총론(疆域總論)」에서 후마한의 병합 시기에 대하여 “서진(西晉, 265~317) 말기에는 백제가 북쪽으로 대방군의 지역을 병합하여 비로소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였으며, 또 마한의 여러 나라를 병합하여 서쪽과 남쪽으로는 바다에 닿고 동쪽으로는 신라와 이웃하였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백제는 진(晉)나라 이후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6)
라 하여 “백제는 진나라 이후로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진나라를 서진으로 본다면, 병합 시기가 대개 4세기 초 이후가 된다. 이는 문헌사에서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때인 369년, 4세기 후반에 마한을 통합한 것으로 보는데, 이와 유사한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이익(李瀷, 1681~1763)의 주장을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익은 “『통고(通考)』를 상고하니 … 효문(孝武) 대명(大明) 6년(462)에는 또 왜가 자칭하기를, ‘왜·백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 칠국제군사(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라고 했다”라고 한 뒤, “동사(東史)에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19년(532)에 가락왕(駕洛王) 김구형(金仇衡)이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했다. 이때는 바로 양(梁) 나라 중대통(中大通 양 무제(梁武帝)의 연호. 529~534) 4년이었는데 만약 가락이 이미 망했다면 왜(倭)도 반드시 이렇게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구형의 자손에 대를 이은 자가 규림(圭林)과 간원(間元)이라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비록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으로 되었어도 나라는 오히려 남아 있다가 수 문제(隋文帝) 이후에야 비로소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과 가야도 역시 이때에 병합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수(隋) 나라 때 이르러서는 신라가 개국한 지 이미 6백 년이 넘었으니, 어찌 마한 이외에 또 모한이 있고, 가락 이외에 또 가라가 있고, 가야 이외에 또 임나가 있었겠는가?”7)
라 하였다. 법흥왕 19년(532)에 가락이 신라에 항복할 때를 거론하면서 ”(가락이) 비록 신라에 항복하여 속국으로 되었어도 나라는 오히려 남아있다가 수 문제(隋文帝, 재위 581∼604) 이후에야 비로소 신라에 병합되었고, 마한과 가야도 역시 이때에 병합된 것이다“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마한이 백제에 병합되는 하한을 6세기 후반까지도 내려 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후마한의 존재에 대한 해석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도 길다.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문화권’의 시작과 끝 백제로 편입되기 전 전남지역 영산강 유역은 어떤 사회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영산강 유역 ‘마한역사문화권’의 시작과 끝을 살펴보자. 우선 그 시작점을 찾아보자. 마한의 역사적 실체는 시·공간을 달리하며 변화한 것으로 본다.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은 우선 한강 유역의 마한 소국인 백제국(伯濟國)이 성장하여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먼저 아산만 일대의 ‘마한’인 목지국(目支國) 세력을 병합하고, 다시 남진하면서 금강 유역 일대의 ‘마한’인 건마국(乾馬國) 세력을, 마지막으로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의 병합이라는 축차적인 과정으로 이해하기도 한다.8) 병합과정이 이렇다고 볼 때, 그렇다면 축차적으로 병합된 모든 마한 지역이 같은 수준에서 같이 시작했을까? 마한의 54개 소국이 경기도부터 전라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정도의 수준으로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선후가 있지 않았을까? 의문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래서 문화의 지속기간이란 관점에서 시종, “처음과 끝”을 찾아가 보자.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는 과연 언제부터 시작했을까? 먼저 고고학계의 의견이 주목된다.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라는 문화권을 설정하려면, 나름 동일한 계통의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때 동일한 계통의 기준으로 철기와 옹관묘를 꼽는다. 이렇게 보아야 마한이 형성된 이후 소멸되기까지 동일한 계통의 문화로 설명될 수 있게 된다.9) 마한의 철기문화는 기원전 3∼2세기경에 시작되었지만, 영산강 유역의 철기문화는 기원후 1세기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한편, 옹관묘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전북지역에 등장하고 전남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은 기원전 1세기경이다. 그리고 영산강 유역 고분은 무덤 중심에 한 기의 매장주체부가 아닌 다수의 매장주체부가 공존하는 경우가 많다. 옹관고분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3세기 말경에 등장한다. 특히 대형옹관고분은 영산강 유역 고대문화를 대표한다.10) 철기문화의 시점과 옹관고분의 등장과는 시간차가 있다. 그래서 기원후 200년을 기준으로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11)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발전단계를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쉽게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는 기원전 1세기부터 시작하되 3세기경을 경계로 전·후기로 나눌만한 문화의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3세기경 이후를 후마한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한편,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의 끝은 어디일까?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제가 영산강 유역을 장악하는 시기와 관련된다. 고고학계에서 전남의 마한역사문화권을 주도하는 연구자들은 옹관고분 등 분구묘(墳丘墓)를 전남지역 마한의 토착문화로 보고, 이런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5세기 후반경에나 백제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 당도하였을 것 보고 있다. 따라서 대형옹관고분 축조 시기인 5세기 후반까지 전남지역에는 독자적인 정치체로서 마한이 존속되었고 백제 세력이 들어와 석실분을 구축하면서 비로소 소멸되었을 것으로 본다. 또한 앞서 본 것처럼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의 ‘모한(慕韓)’이 마한의 후신이고 그 세력은 5세기 말에 백제에 흡수되었어도 6세기 전반까지 왜와 교류관계가 있었다고 하여 마한의 하한을 6세기까지 내려 보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여전히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는 기원전 1세기경에 시작하여 시기에 따라 지역적으로 부침을 거치면서 5세기 말∼6세기경까지 지속되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겠다.12) 영산강 유역의 마한을 후마한으로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의 시작과 끝을 이와같이 설정한다면 특히 3세기 이후의 사회를 신경준의 삼마한 중 후마한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마한으로서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전히 남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때 고려할 것은, 어느 나라 기록에도 AD 300년 이후에는 ‘마한’이란 이름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소국’들은 존재했겠지만 그보다 발전된 통합정치체로서의 ‘마한’이 6세기 중엽까지도 잔존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고고학 발굴 성과들을 보아도 문화양상은 설명할 수 있으나 정치체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마한에서는 진왕(辰王) 혹은 마한왕(馬韓王)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국가의 단계로 볼 수 있는 문헌기록이나 고고학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13)고 한다. 고고학계 일반에서도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를 고대국가로까지는 보지 않는다. 이렇듯 문헌기록이나 고고학 발굴 성과를 보아도 어떻다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부족하지만, 다만 5세기 후반 그 이후까지 영산강 유역에 백제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독자적 문화권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는 ‘후마한’이란 범주 내에서 소국들이 존재했던 ‘권역’이란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예를 들면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이 “우리 나라 사람이 중국을 일컬어 한(漢)이니 당(唐)이니 하는데, 이는 한ㆍ당이 전해진 세대가 오래되어 그 위엄이 외국에 떨쳤기 때문에 외국 사람이 습관적으로 일컫게 되는 것이다.”14)
라 한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우리가 조선시대까지 중국을 줄곧 ‘당’이라 부르거나 지금 중국을 ‘진’에서 유래한 ‘차이나’로 부르거나, 우리나라를 외국에서는 ‘고려’에서 유래한 ‘코리아’라 부르거나 하는 것들도 이와 같은 습관적 현상이다. 한말에 주로 그랬던 것처럼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를 ‘한’이라 불렀고 그런 이유에서 ‘대한제국’이란 국명이 탄생하게 된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런 이름들이 해당 국가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그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한 대명사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의 ‘한’ 또는 ‘마한’도 같았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15)
『해동역사』의 편년 구분을 보면 주나라 때 한강 이북은 ‘조선’이라 하였고, 한강 이남은 모두 ‘한국’의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이 마한·진한·변한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한국이 진으로 시작해서 한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진국이 되는 변화를 거치지만, 지명은 여전히 ‘한’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지역을 ‘한’이라 부르게 된 단초였다. 삼국을 거치면서는 고구려까지를 포함하여 ‘삼한’이라 부르게 된다. 그 후 조선 후기 한백겸의 ‘남자남 북자북’의 구분이 나오면서 ‘한’의 범위는 남한으로 제한되었고 북은 ‘조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전체를 아울러서는 여전히 ‘한’이라 부르는 관습은 유지되었다. 그래서 ‘한’은 곧 우리나라를 의미하게 되었다. 한반도 내의 정치체가 바뀌어도 이 지역 전체를 ‘한’이라 부르듯이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도 그 안에서 소국들의 부침이 있었고 비록 통합된 정치체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300년 이후 6세기경까지의 고대사회를 권역명으로서 ‘마한’이라 부르는 것은 가능해 보인다.16) 다만 마한의 권역은 경기·충청·전라 모두에 걸쳐 있기 때문에 이를 전라남도가 오롯이 하기에는 또 문제가 있다. 지금 「역사문화권정비법」에 ‘마한’이란 명칭을 전남지역에 한해 사용하고 있어 타지역으로부터 흔쾌히 동의를 받지 못하는 점도 있다. 이를 전남지역과 보다 일치시키려면 신경준의 삼마한설에 나오는 ‘후마한’과 연계시켜 구분해 보면 어떨까? 이런 제안을 해 보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단정도 하기 어렵다.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다. 사서의 기록은 턱없이 부족한 데다가 이 지역의 고고학 발굴 성과들은 너무 다양하고 해석 또한 서로 다르다. 또 앞으로 땅에서 뭐가 나올지도 모른다. 행정의 다급함이야 있겠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포함하여 이 문제를 보다 유연하게 미래지향적으로 풀어나가기를 기대한다. 1) 『旅菴全書』 권5, 「疆界考」 「馬韓國」.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속)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온조왕 27년(9)에 멸한 것은 여기에서 대개 기준 마한이고, 탈해왕 5년(61)에 항복한 것은 여기에서 대개 후마한(後馬韓)인데, 원고(原考)의 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라 하였다.
2) 『東史綱目』 부록 상권 하 「雜說」 「三韓後說」 3) 『東史綱目』 부록 상권 하 「雜說」 「삼국(三國)이 처음 일어나다」 4) 『海東繹史』 속집 제3권 「地理考」3 「三韓」 「疆域總論」 5) 『海東繹史』 제3권 「世紀」3 「三韓」 6) 『海東繹史』 속집 제8권 「地理考」8 「百濟」 「疆域總論」 7) 『星湖僿說』 제19권 「經史門」 「駕洛伽耶」 8) 박대재, 「삼한시기 논쟁의 맥락과 접점」(『한국고대사연구』87, 2017.09, 한국고대사학회), 37쪽. 9) 최성락, 「전남지방의 마한문화」(『마한·백제문화』12,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0), 153쪽. 10) 최성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주류성, 2018.04), 22쪽의 표1-1 「영산강유역 고대문화의 편년」 참조. 이 표는 최근 10여 년간 축적된 고고학 자료를 토대로 제시한 것으로 여기서는 이 표를 기준으로 삼았다. 11) 金元龍, 「馬韓考古學의 現狀과 課題」(『마한·백제문화』12,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90), 8쪽에서는 마한시대를 전기(기원전 200년∼기원후 200)와 후기(기원후 200∼369)로 나누었다. 12) 지금 고고학계에서는 전남지역에 마한이 기원전 3세기로부터 기원후 6세기 중반까지 자리잡았다는 견해가 강하다. 이에 따르면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는 800여 년의 긴 역사를 갖는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정적 견해도 있다. 즉 그런 가설이 성립하려면 경기·충청·전라도 지역을 관통하는 정치 문화적 정체성과 계승성이 먼저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 답을 찾기 어렵다고 보아 이를 과감한 가설이라고 비판한다. 강봉룡,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 성격론 -그간의 논의를 중심으로-」(기획특집 :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새로운 조명 『지방사와 지방문화』3-1, 2000.07, 역사문화학회) 참조. 이 글에서는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에 대하여 ‘마한’ 대신 ‘옹관고분사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13) 최성락, 「馬韓論의 實體와 問題點」(『박물관연보』9, 목포대 박물관, 2000.11), 16쪽. 14) 『東史綱目』 부록 상권 하 「雜說」 「三韓後說」 15) 韓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그중 정약용은 韓의 명칭이 중국 전국시대의 韓과 무관하며, 토착민들이 그 酋豪를 추대하여 ‘韓’이라 지칭한 데서 삼한의 전신인 韓國(辰國)이 성립하였다고 하였다. 문창로, 「星湖 李瀷(1681~1763)의 삼한 인식」(『한국고대사연구』74, 2014), 254쪽. 16)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말까지의 영산강 유역 고대사회의 실체를 마한이 아닌 신미제국(新彌諸國)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견해도 있다. 최성락, 앞 책, 374∼389쪽. 글쓴이 고석규 목포대학교 前 총장, 사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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