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이야기] 한산에 한 채의 집 있는데 게시기간 : 2021-12-22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1-12-21 10: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옛 그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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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에 한 채의 집 있는데 집에는 난간에 벽도 없다지.
여섯 개의 문 좌우로 통하고 집 안에선 푸른 하늘 보인다네. 방들은 텅 비어 쓸쓸하고 동쪽 벽이 서쪽 벽을 친다네. 그 속엔 아무것도 없으니 사람이 와도 아까울 것 면했네. 추위가 오면 약한 불을 피우고 배고파지면 채소를 익혀 먹는다네. 배우지 않은 시골 노인이지만 소와 장원을 널리 두어 모두 지옥 같은 일이 되네. 한번 들어가면 어찌 일찍이 끝나겠는가. 깊이 잘 생각해 보라 생각하고 생각하면 법칙을 알게 되리. 태어난 지 30년 항상 천리만리를 떠돌았네. 강에 가면 푸른 풀과 합치되고 변방에 들어가면 붉은 흙먼지 일으켰네. 단약을 만들어 헛되이 신선이 되고자 했고 글을 읽고 겸하여 역사를 읊었네. 오늘 한산으로 돌아와 강물을 베고 겸하여 눈을 씻네. 무등산 산중에서 아롱동 송운산장주인 아산초부 짓다. 寒山有一宅 宅中無欄隔 六門左右通 堂中見天碧 房房虛索索 東壁打西壁 其中一物無 免被人來惜 寒到燒軟火 飢來煮菜喫 不學田舍翁 廣置牛莊宅 盡作地獄業 一入何曾極 好好善思量 量量知軌則 出生三十年 常遊千萬里 行江靑草合 入塞紅塵起 鍊藥空求僊 讀書兼詠史 今日歸寒山 枕流兼洗目. 於無等山中 啞聾洞松韻山莊主人 雅山樵夫作.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1926-2014)이 한산시(寒山詩)를 화제(畵題)삼아 깊은 산중에 은거하는 삶을 그린 그림이다. 한산은 중국 당나라 때 살았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인물로, 이름은 알 수 없고 천태(天台) 시풍현(始豊縣) 한암(寒岩)의 깊은 토굴에 있으므로 한산(寒山)이라 하였다. 그는 시를 지으면 나무와 바위 위에 써 놓았는데 그렇게 남긴 시가 300여 수에 이르고 이를 국청사(國淸寺)의 한 스님이 모아서 편집했다고 한다. 아산 조방원은 화제시로서 한산시를 가장 많이 사용했으며 이와 관련된 그림을 즐겨 그려 다수의 작품을 남겼다. 아산 조방원 조방원은 1926년 전남 무안군에서 태어나 스무 살 무렵 1945년에 남농 허건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배웠다. 당시 허건은 전통산수 화풍에서 벗어나 동생 허림의 영향으로 일본화의 신화풍이 가미된 독창적인 화풍을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허건은 ‘남화연구원(南畵硏究院)’을 열어 후진을 양성했다. 조방원을 비롯해 청당 김명제(金明濟, 1922-1992), 도촌 신영복(稻邨 辛永卜, 1933-2013), 백포 곽남배(白浦 郭楠培, 1929-2004)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됐다. 허건은 제자들에게 ‘내 그림을 본뜨지 말고 개성 있는 자신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제자들 역시 허건의 필법과는 다른 각자의 개성을 보여주며 한국화단에서 주목할 만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조방원은 허건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욕우(欲雨)>로 입선을 하였다. 제4회 국전에서는 <효(曉)>(1955)라는 제목으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5회, 6회, 7회까지 그의 작품은 거듭 특선을 차지했고, 서울 개인전을 통해 중앙과 지역 미술계에 위상을 단단히 뿌리내리며 화단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자신의 고향인 무안에서 바라보이던 목포팔경의 하나인 ‘아산(牙山)’을 따와 호를 지었던 조방원은 이후 맑고 곧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산(雅山)’으로 바꾸었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독재 시절에는 어지러운 세상사를 보고는 차라리 벙어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아산(啞山)’이라 쓰기도 했다.*) 목포에서 광주로 기반을 옮겨 1957년부터 광주에 화실을 마련하고 작품을 제작했다. 1978년에는 무등산 자락 담양 지곡리에 화실을 꾸렸으며 1990년대 초 곡성 죽곡 연화리로 다시 옮길 때까지 이곳에서 자신의 화풍을 구축했다. 이 무렵은 그의 화풍이 뚜렷해진 시기이며, 이 때 관지에 주로 ‘무등산 산중에서 아롱동 송운산장주인 아산초부’라 썼다. <산중문답>에도 그리 써있다. *) 문순태, 「크고 아름다운 산, 雅山」, 『아산 조방원』(열화당, 2001), p. 25.
생략과 함축의 과감한 수묵 표현 조방원의 작품은 대체로 수묵을 강조한 산수화와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특히 중심이 되는 부분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간략하게 처리하여 화면 안에서 조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림2 조방원, <만추>, 1970년대, 종이에 옅은 색, 65.2×84.3cm, 부국문화재단 소장
그림3 조방원, <도강>, 1980년대, 종이에 옅은 색, 125.3×161cm, 부국문화재단 소장 가을 비바람이 부는 단풍 숲길에 큰 짐을 등에 진 소와 그 뒤를 추위에 움츠린 소년이 따라간다. 고목들은 짙은 농묵과 담묵에 적절한 변화를 주어 표현되어 있다. <만추(晩秋)>는 1970년대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발묵과 갈색톤의 담담한 색조를 보여준다(그림 2). 1980년대 제작된 <도강(渡江)>은 까만 소와 사람들이 탄 나룻배가 푸른 물길을 따라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그림 3). 화면 근경에 물기 많은 짙은 먹으로 굵은 나무둥치와 삐죽 마른 가지를 과장되게 그렸다. 바위는 비교적 담묵으로 표현하고 그 위에 태점을 찍었다. 마른 나무와 가지를 그리는 이런 표현법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조방원 회화의 특징이 드러나는 시기이다. 산수 풍정에 소와 목동, 초가와 큰 고목, 아이들 등 풍속화 같은 점경인물을 통해 개성적 필묵법을 시도하였다.*) 이와 함께 단순한 먹 선묘의 농담 변화와 붓질에 강약을 조절하여 담백하면서도 관조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중문답>은 조방원이 1994년 전남 곡성으로 작업실을 옮기기 전 제작된 작품이다.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나 깊은 산 속 조용히 은거하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림이다. *) 이태호, 「남도 바다가 낳은 화가들, 한국미술사를 빛내다」, 『남녘의 서정』(부국문화재단․갤러리b, 2019), pp. 107-109.
파랑새에게 묻다 항상 『한산시집』을 곁에 두고 읽었던 조방원은 그와 관련된 그림을 즐겨 그렸다.*) 한산이 남긴 시는 자연과 함께 있는 즐거움을 노래하거나 세상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대체로 허망한 삶을 깨우치고 진정한 도를 구하라는 주제가 주류를 이룬다. 이 시들 중 조방원이 주된 화제로 사용한 시는 대부분 깊은 산중에 은거하고자 하는 뜻이 담긴 것들이다.
깊은 가을, 깊은 산 속 시커먼 고목들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초가집에 외양간의 검정 소와 소년이 여물통에 앉아 있는 파랑새를 발견하고 조심스레 바라보고 있다(그림 1-1). 파랑새는 한국에서는 여름 철새이다. 곧 겨울이 올 텐데 이 파랑새는 아직까지 이 곳에 머물러 있다. 소년과 검정 소는 이를 걱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뜻밖의 파랑새에 놀란 것일까. 그림을 살펴보면 화면 중앙에 초가집을 두고 그 주변에 특유의 고목을 짙은 농묵으로 표현하였다. 화면 오른쪽 근경 야트막한 각이진 바위는 군데군데 부벽준을 써서 담묵으로 표현하였다. 곳곳에 이끼점(苔點)을 찍었다. 집 주변의 옹기나 장작더미, 가옥의 세부적인 부분도 신경 써서 묘사했다. 집중된 구도와 그 외의 충분한 여백을 두어 구성이 시원하다. 중심이 되는 부분을 강조하고 나머지는 생략하거나 간략히 처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아늑하면서도 고즈넉한 공간이 탄생한다. 우리는 파랑새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파랑새. 하지만 파랑새를 찾아 깊은 숲에도 가보고 들판너머도 가 보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던 파랑새가 낙심하여 집에 돌아와 보니 바로 자기 집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는 이야기. “우리가 불행한 것은 자기의 행복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은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삶에 대한 깨달음 속에서 얻을 수 있다는 뜻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보는 우리도 검정 소의 큰 눈과 소년의 호기심 어린 눈을 따라 파랑새에 시선이 머문다.
그림1-2 조방원, 산중문답, 검정소와 소년
그림1-3 조방원, 산중문답, 파랑새 아산(雅山), 그리고 산수 조방원은 한산시를 통해 자연에 대한 삶의 태도로서 깨달음과 경외를 그림에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평생을 수묵화의 본질과 가치를 ‘자연’에서 찾았다. 조방원에게 자연은 소재로서의 산수 자연일 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로서의 자연이다.*) 그는 자연에 대한 경외와 선인들의 작품을 통해 얻은 수묵에 대한 깊은 인식을 바탕에 두었다. 사생을 통한 실경에 근거를 두면서도 끊임없이 산수자연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조방원은 간소화된 선과 먹과 붓의 깊이감을 가지고 현대화하여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70대를 전후해 말년에는 더욱 선종화 같은 단순화와 추상적 격조로 이상경을 추구하며 무르익은 노경을 맞았다. 묵노헌(墨奴軒)을 통해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지역문화 발전을 위해 남도국악원과 옥과미술관을 건립하는 등 미술문화계 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했던 그는 제자들에게도 자연의 이치와 동양의 사상을 깊고 넓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서와 와유를 통해 선비정신을 실현하려 했던 그의 그림은 그렇기에 자유로우면서도 문인화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된다. *) 이선옥, 「아산 조방원 수묵화의 특징과 화풍 변천」, 『雅山 조방원』(광주시립미술관, 2017), p. 156.
참고문헌 및 인용출처 문순태, 「크고 아름다운 산, 雅山-雅山 趙邦元의 삶과 예술」, 『雅山 趙邦元』, 열화당, 2001, pp. 19-31.
이선옥, 「아산 조방원 수묵화의 특징과 화풍 변천」, 『雅山 조방원』, 광주시립미술관, 2017. 이태호, 「남도 바다가 낳은 화가들, 한국미술사를 빛내다」, 『남녘의 서정』, 부국문화재단․갤러리b, 2019. 최하림, 「먹산수와 無爲의 사상」, 『雅山 趙邦元』, 열화당, 2001, pp. 7-18. 글쓴이 김소영 전남대학교 교육혁신본부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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