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초대석] 17세기 광주 충신이 읊은 시 뜻은?_전상의의 소회시 게시기간 : 2022-01-25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1-2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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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시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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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상의가 지은 소회시(所懷詩) 이 시는 전상의(1575~1627)가 구성 부사(龜城府使) 시절에 느낌을 읊은 작품이다. ‘구성’은 평안북도에 소재한 지명이다. 전상의가 그의 나이 51세(1625, 인조3) 가을에 구성 부사에 부임하여 정사를 베풀었는데, 이 시는 그 무렵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은 전상의가 세상을 뜬 뒤 광주 외손 집에서 나온 것으로 현전한 유일한 시라는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시 내용을 전상의가 말한 것처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목숨은 한계가 있어서 천년만년 살기 어렵다. 때문에 3월 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양절의 재미있는 놀음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나는 사는 동안 내내 학창의(鶴氅衣)를 입고 쓸쓸한 마음을 품었는데, 나이 들어 구성 지역에서 현감으로 늙어가는구나.
우선 시 속에 등장한 ‘학창의’에 대해 알아보자. 이 옷은 옷 선을 검은 헝겊으로 둘러 마치 학의 깃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 선인들이 평상복으로 많이 입었다. 전상의는 1구와 2구에서 사람 목숨이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며, 특히 삼짇날과 중양절의 놀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하였다. “인생을 즐기자”라는 생각이 살짝 담겨있다라고도 볼 수 있다. 이어 3구와 4구에서 현재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말하였다. 그런데 “쓸쓸하다”와 “해질 녘” 의미를 지닌 ‘소소(蕭蕭)’와 ‘낙일(落日)’ 시어로 인하여 침울한 느낌과 어두운 분위기를 안겨준다. 전상의는 그의 나이 29세(1603, 선조36) 때 무과에 급제했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인으로서 그 기개가 시 속에 드러나는 것이 정상일 텐데, 이 작품에서는 전혀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필자와 비슷한 의문은 『구성공실기』를 엮을 때 이미 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작품을 『구성공실기』에 싣고 나서 “‘해질 녘에 구성에서 현감으로 늙어가는구나’는 평생 만 리 밖 제후에 봉해지고, 초상을 그려 기린각에 걸리는 뜻을 지녔기 때문에 시의 뜻이 이와 같았던 것인가.”라는 말을 덧붙였기 때문이다. 곧, 전상의가 마지막 4구에서 “해질 녘에 구성에서 현감으로 늙어가는구나”라고 읊었던 것은 만 리 밖 제후에 봉해지고, 초상을 그려 기린각에 걸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냈다고 본 것이다. 사실 전상의는 그의 나이 49세 때 인조반정이 일어났는데, 이때 평안남도 개천 군수(价川郡守)로 좌천되었고, 2년 뒤에 한양과 더 멀리 떨어진 구성 지역의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고 있는 시점에 임금이 있는 한양과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을 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기개가 넘치는 무인일지라도 좌천의 쓰라림을 맛본 뒤에 중앙의 요직에 오른다는 기약이 없기 때문에 쓸쓸한 기분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한 맥락을 추적하고서 시를 다시 읽어본다면, 무인 전상의의 시에 기개가 넘치지 못한 까닭을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2. 무과 급제에서 정려(旌閭)를 받기까지 전상의의 자는 희원(希元)이요,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1575년(선조8) 광주군 도천면(현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서 아버지 용(溶)과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상의는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29세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 주부를 시작으로 함경도 갑산 도호부의 운총 만호와 평안북도 강계 도호부의 고산리 첨사, 경기도 통진현의 덕포 첨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44세(1618, 광해군10) 때 내금위 어모장군에 임명되었다. 어모장군은 정3품 벼슬로 주로 임금의 호위와 대궐의 경비를 맡아보는 내금위의 최고 책임자이다. 어모장군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당시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전상의가 이 어모장군 직책을 언제까지 수행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49세(1623, 인조원년) 때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평안남도 개천 군수로 자리를 옮긴다. 임금이 있는 궁궐에 있다가 먼 개천 군수 부임했으니 좌천된 셈이다. 인조반정은 어떤 사건인가? 광해군 및 집권당인 대북파를 몰아내고 당시 능양군을 왕으로 세운 정변이 아닌가. 새로운 임금이 정변을 통해 들어섰으니 이전 임금의 호위를 맡은 전상의가 좌천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도 있다. 이후 2년 뒤 51세 때 구성 부사로 자리를 옮긴다. 개천은 평안남도에 있고, 구성은 평안북도에 있으니, 이제 점점 궁궐과 멀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으로서 임금 곁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 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구성 수령 시절에 감회를 우연히 읊다」 시를 통해 “쓸쓸한 마음 품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2년 뒤 53세(1627, 인조5) 때 정묘호란이 일어난다. 정묘호란은 훗날 청나라를 세운 후금(後金)과 조선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1627년 1월 중순에 시작하여 3월 초에 끝이 났다. 1627년 1월 중순 압록강을 건넌 후금군은 함경남도 의주를 기습 공격하였다. 별안간의 공격에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던 조선은 평안북도 곽산도 막아내지 못하였다. 파죽지세로 후금군은 청천강의 안주성에 다다른다. 안주성은 평안남도에서 한양으로 이어진 중요 요새지였다. 그만큼 조선과 후금 모두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의주가 침략 당하자 인근의 부사 및 현감 등을 안주성에 속속 모여들었다. 후금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후금이 의주를 처음 공격할 때가 1627년 1월 13일이고, 안주성에 도착한 때는 같은 달 20일이었다. 한반도에 들어선 후금은 불과 7일 만에 함경북도와 남도를 거쳐 평안남도까지 이른 셈이다. 마치 달걀을 포개놓은 것과 같은 누란지위(累卵之危)의 다급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때 평안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안주 목사 김준(金浚)은 중영(中營)을, 구성 부사 전상의는 남영(南營)을 각각 맡기로 하였다. 전상의는 이제 무인으로서 남영인 백상루(百祥樓)에 진을 치고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후금에 비했을 때 조선의 전투 상황은 절대 열세였다. 즉, 병사 수와 무기 모두 후금에 비할 때 터무니없이 부족하였다. 때문에 전상의 장군(이후 장군 호칭을 사용함)은 병사들에게 당부하기를 “지금 모자란 것은 무기이니 너희들은 함부로 낭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첫 번째 전투를 승리하였다. 첫 번째 전투는 승리했으나 이튿날 싸움은 후금에 몰리는 상황에 이른다. 급기야 평안 병사 남이흥과 안주 목사 김준은 화약고에 불을 놓아 자결하자고 말한다. 전상의 장군은 마지막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남이흥ㆍ김준 두 사람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이흥과 김준 부자는 화약고에 불을 질러 순절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사람은 백상루의 전상의 장군 뿐이었다. 전상의 장군은 전세(戰勢)가 열세에 처한 것을 이미 알고서 병사들을 향해 “빨리 피신하여 살길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상루에서 한 시위로 세 개의 화살을 날려 적군을 여러 명 죽였으나 열세에 처한 상황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싸우던 중에 전상의 장군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았는데, 아픈 것도 참고 계속 화살을 쏘며 싸웠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적병은 눈앞까지 이르니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예감하였다. 전상의 장군은 임금이 계신 한양을 향해 4배를 한 뒤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하니 백상루 아래로 떨어졌다. 이러한 광경은 후금 병사까지 감동시키는데, 때문에 그들은 전상의 장군을 충신열사라 칭하며, 일반 병사와 구분하였다. 이때 전상의 장군의 나이 53세였다. 전상의 장군은 이제 세상을 떴다. 이후 나라에서 예우를 했는데, 우선 1627년 2월 7일에 자헌대부 병조 판서 겸 의금 부사에 추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6일에 안주에서 장군의 시신을 모셔다가 무등산 아래 평두산에 예장(禮葬)한 뒤 사패 30리를 하사하였다. 1684년(숙종10) 전라 관찰사 이사명(李師命)의 요청에 의해 숙종이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내렸다. 전상의 장군이 세상을 뜬 지 58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1879년에 편찬한 『광주읍지』에 광주 충신으로 총 14명을 거론했는데, 이 중에 정려를 받은 사람은 고경명(高敬命)ㆍ김덕령(金德齡), 그리고 전상의 장군이다. 이리하여 이 세 명을 아울러 ‘광주의 3충신’이라 일컫게 되었다.
3. 전상의 장군이 이엽(李燁) 꿈에 나타난 사연은? 18세기에 광주(光州) 출신 농은(農隱) 이엽(1729~1788)이라는 문인이 있었다. 이 분이 1769년(영조45) 2월 21일 밤에 전상의 장군의 꿈을 꾸었다. 장군이 순절한 지 143년 지난 뒤의 일이었다. 전상의 장군과 이엽은 동향(同鄕) 사람이라는 것 빼면 이어질 수 있는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이엽의 꿈에 장군이 나타났으니 예사롭게 볼 일은 아닌 듯하다. 전상의 장군은 꿈을 통해 이엽에게 안주성 전투 때 어떻게 싸웠으며,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를 우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무인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 뒤에 임금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예우를 다하지 못한 현실에 서운한 감정을 드러낸다. 이에 세 편의 시를 지어 이엽에게 읊어준다. 다음 시는 전상의 장군이 꿈에서 읊은 첫 번째 작품이다.
전상의 장군은 안주성에서 자신이 싸우다 죽었던 일을 시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시 세 편을 모두 읊은 장군은 이엽에게 자신의 처지가 살아서도 불우했는데 죽어서도 불우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엽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또 내가 수립한 것은 김준과 취지가 다르니 그 같은 당(堂)에 배식(配食)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혹시 본 주 선비들의 의론이 그치지 않고, 읍 중 사당에서 제사를 받들어준다면, 이것이 나의 오랜 소원이다.
(『구성공실기』, 「제현찬술」) 전상의 장군이 이엽 꿈에 나타난 궁극적 목적을 담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위 인용한 내용을 간추리면, 우선 장군은 김준과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같은 당에 배식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였다. 김준은 누구인가? 바로 안주성 전투에서 화약고에 불을 질러 순절했던 사람이 아닌가. 김준은 사후에 고부(古阜) 정충사(旌忠祠)에 배향되었다. 그런데 1684년 장군에게 정려를 내릴 때 고부와 광주는 고향이 거의 같다하여 나라에서 김준이 모셔진 정충사에 함께 모시라고 했던 것이다. 전상의 장군이 이엽 꿈에서 말한 ‘같은 당’이란 바로 김준이 모셔진 정충사를 이른다. 그러나 전상의 장군은 고부 유림의 반대에 부딪혀 정충사에 모셔지지 않았다. 이어 광주 포충사(褒忠祠)에 모셔질까 했는데, 이것도 수포로 돌아갔다. 아마도 이엽의 꿈에 나타난 시기가 이런 저런 논의를 계속하고 있던 시점이라 생각한다. 전상의 장군은 1849년(헌종15)에 이르러서야 광주 경렬사(景烈祠)에 정지(鄭地) 장군과 함께 배향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1871년 대원군 서원 훼철령에 따라 사당이 헐려 또 다시 편히 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4. 오보(誤報)로 인한 오해와 그리고 그 여파 마침내 ‘전상의 장군 유적보존회’를 중심으로 1979년 8월 24일에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입구에 신도비가 세워지고, 1985년 10월 21일에 충민사(忠愍祠)를 완공하였다. 전상의 장군이 안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지 358년 만에 개인 사당을 완공한 것이다. 아무런 인연이 없는 이엽의 꿈에까지 나타나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음을 하소연했던 전상의 장군. 이제 좀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을까? 그러나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일이 있었다. 충민사를 착공한 시점은 1982년 8월 28일이었다. 그런데 1983년 여름에 서울의 인사동 골동품 가게에 전상의 장군의 유품 40여 점이 들어왔다. 가게 주인은 ‘전씨(全氏)’라는 말만 듣고, 당시 새마을중앙회장 전경환(전두환의 동생)에게 연락했고, 전경환은 전상의 정군이 자신의 조상인 줄 알고 유품을 샀다. 전경환은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전상의 장군과 본인의 본관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유품의 가치는 인정하여 진품은 중앙국립박물관에, 복사본은 충민사에 기증한다. 이리하여 전경환의 이름이 충민사의 준공기념비에까지 새겨지게 되었고, 지역 언론에서 전상의 장군을 전두환의 조상이라 보도하였다. 잘못 보도를 했던 것이다. 지금도 전상의 장군이 전두환의 조상이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기 때문에 수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뿐만 아니라 오보로 인해 지금까지 충민사를 가기 꺼려한다는 말이 들리니 그 여파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상의 장군과 전두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참고 자료> 『광주읍지』(1879년)
『구성공실기』 『숙종실록』 노성태, 「전상의 장군의 생애에 대하여」, 『구성공 전상의장군 실기』, 한국문화원연합회 광주광역시지회, 2010. 박선홍, 『무등산』, 금호문화, 1998. 이종일, 「전상의 장군의 생애와 사상」, 『향토문화』 15, 1996. 글쓴이 박명희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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