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 기행] 맛이 좋으니, 선물이 되고 뇌물이 되었겠지 숭어 게시기간 : 2022-01-26 07:00부터 2030-12-17 21:21까지 등록일 : 2022-01-24 09:39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맛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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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있는 김대감 집에 석작 몇 개가 도착했다. 전라도 나주에서 조운선을 이용해 마포에 도착한 것을 수레로 옮겨 온 것이다. 봉제사를 앞두고 곳간을 살피던 안방마님이 급히 주문한 것이다. 첫 번째 석작 뚜껑을 열어보니 꾸덕꾸덕 말린 숭어다. 또 다른 석작에는 옅고 은은한 호박색을 띤 숭어어란이다. 숭어는 제물로 올리고, 어란은 대감님 글벗이 찾아오면 술상에 올리려고 부탁한 것이다. 조선시대 숭어를 찾는 양반집 풍경이 이랬을 것이다. 당시 숭어는 종묘는 물론 양반네 제사에 올리는 물목이었다. 발해시대 중국에 보내는 조공이었고, 조선조에는 왕에게 보내는 진상품이었다. 또 왕은 신하에게 내리는 은사품이었고, 혼사를 앞둔 부모가 챙기는 품목이었다. 수어(秀魚)나 숭어(崇魚) 명칭처럼 생김새도 맛도 으뜸이었다. 이렇게 수요가 많으니 공물이나 세금으로 숭어를 준비해야 하는 어민들 고충은 오죽했을까. * 물고기 중에 으뜸, 숭어는 우리나라는 모든 해역에서 서식하며 숭어, 가숭어, 등줄숭어 등이 있다. 추운 겨울에는 수심이 깊은 바다로 내려갔다가 봄이 되면 떼를 지어 강하구나 연안으로 몰려와 알을 낳는다. 주로 개흙을 긁어 새우나 갯지렁이 유기물을 섭취한다. 봄이면 알에서 깨어난 어린 숭어들은 강어귀에 무리 지어 오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숭어는 크기에 따라 부르는 다르다. 제일 작은 숭어 새끼를 ‘모치’라고 한다. 그냥 통째로 묵은 김치에 싸 먹거나, 구워 먹는다. 지금은 구경하기 어렵지만 포장마차에서 간혹 볼 수 있었다. 또 모치로 젓을 담기도 했다. 더 크면 ‘참동어’, 조금 더 크면 ‘손톱배기’, ‘댕가리’, ‘무구럭’, 그리고 7년은 자라야 ‘숭어’라 했다.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까지 생각하면 아마 물고기 중에 가장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이름으로 도리포에서는 큰 것은 숭어, 작은 것은 ‘눈부럽떼기’라고 부른다. 잡은 숭어가 작아 ‘너도 숭어냐’라고 했다가 화가 난 숭어가 눈을 부릅떴다는 것이다. 숭어 눈에는 투명한 보호막, 일종의 눈꺼풀이 있다. 이 막은 늦여름부터 자라 겨울이면 완전히 눈을 덮는다. 그래서 겨울에는 연안에서 그물에 잘 걸린다. 눈꺼풀이 없고 바닷물이 맑을 때는 그물을 보고 뛰어넘는다고 한다. 겨울에 숭어가 많이 잡히는 이유이기 하다.
<자산어보>에는 숭어를 ‘치어(鯔魚, 속명 秀魚)’와 ‘가치어(假鯔魚, 속명 斯陵)’로 구분했다. 오늘날 어류도감에 따르면, 가숭어는와 숭어에 해당한다. 가숭어는 ‘몸통은 둥글고 검은색, 눈은 작고 누런색, 머리는 납작하고 배는 희다’고 했고, 숭어는 ‘모양은 진치(眞鯔)와 같고, 다만 머리가 조금 크고 눈은 검고 크며, 더욱 빠르며, 흑산에서는 이 종 뿐이다’라고 했다. 숭어와 가숭어를 두고 지금도 일반인들이 헷갈리는데 이렇게 명확하게 구분했다는 것이 놀랍다. ‘숭어’와 ‘가숭어’는 눈을 보면 확실히 구분된다. ‘숭어’는 큰 검은 눈동자를 금테가 감싸고 있고, ‘가숭어’는 작은 검은 눈동자 주변으로 노란안경을 썼다. 모양새를 보면, 숭어는 머리가 크고 통통한 유선형이며, 가숭어는 머리가 납작하며 선이 살아 있는 날렵한 유선형이다. 자산어보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역에 따라 가숭어를 참숭어라 하고, 숭어를 참숭어라고 하기도 한다. ‘참’은 최고이자 으뜸이라는 의미이다. 가숭어는 봄철에 알을 낳는다. 그래서 산란 전 겨울부터 초봄까지 맛이 좋다. 숭어는 겨울 알을 낳기 때문에 맛이 없어 ‘개숭어’라고도 부르지만, 보리가 익어갈 무렵에는 살이 오르고 맛이 좋다. 그래서 ‘보리숭어’라고도 불렀다. 여름철에는 가숭어든 숭어든 맛이 없다. 그래서 여름숭어는 개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했다. 무안에서는 가숭어는 참숭어, 숭어는 개숭어 혹은 보리숭어라고 부른다. * 제물과 선물, 조공과 은사품 ‘숭어’ 에서 1919년 1월 종묘, 명성황후 신위를 모신 경효전, 순명황후 신위를 모신 의효전에 천신하는 물품에도 숭어(水魚)를 올렸다.1)또 무진년(인조 6, 1628) 고산 윤선도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자가(自家 : 대군)께서 마른뭉어, 마른대구어 등과 함께 마른 숭어를 보내기도 했다. 녹우당에 보관되어 있는 ‘1928년 윤선도(尹善道) 은사장(恩賜狀)’의 기록이다. 9월 28일에 내가(善道) 병을 앓고 있을 때, 자가(自家 : 大君)께서) 생치(生雉) 1마리를 보내주었다. 10월 27일에 自家께서 납약(臘藥) 3종류와 붓 5자루, 먹 2개를 보내주었다. 이상의 사항이 누락되었기에 등서(謄書)해 둔다.2) *납약은 내의원에서 만든 약으로, 납일에 임금이 신하에게 하사하는 약의 일종이다.
이 문서에는 ‘윤선도집에 하사하여 보냄’이라는 글과 함께 ‘건문어(乾文魚) 1미(尾), 건대구어(乾大口魚) 3미(尾, 장인복(長引鰒) 2주지(注之), 건수어(乾秀魚) 2미(尾), 생치(生雉) 2수(首), 생선(生鮮) 2미(尾), 홍소주(紅燒酒)8) 5병(甁)’과 함께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장인복은 전복 살을 띠처럼 길게 저며 말린 것을 말하며, 주지는 한 묶음을 말한다. 또 숭어는 경조사에서 올렸던 물목이었다. 순창 전주이씨 서간에는 ‘부모님의 기일이 임박했는데 시장에서 구하기 어려워 인편으로 잉어와 숭어를 구하는 편지도 있다.3)또 나주임씨 임가 보낸 간찰 ’1880년(고종17) 1880년(고종 17) 12월 3일 林胤相이 曲湖 阿谷宅에 문안을 겸하여 자신의 손녀가 혼인하는데 필요한 생선류를 부탁하기 위해 보낸 簡札‘에는 생어, 소수어, 모치어를 보내달라 기록했다.4) 曲湖 阿谷宅 入納
庚辰臘月初三族從胤相頓 生魚小秀魚二尾其外毛致魚買送如何 婚時用之耳
<해동역사>를 보면 발해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할 때 외교 선물로 숭어를 준비했다. 조선시대 숭어 중에서 으뜸으로 평양의 대동강에서 잡은 동숭어를 최고로 쳤다. <승정원일기>에는 고종 때 대왕대비전의 생일잔치에 동숭어회를 올렸다. 지금도 평양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냉면과 함께 대동강 숭어국이 꼽힌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기대승이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도 ‘동숭어’를 선물로 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받아 달라고도 기록했다. <도문대작>에는 ‘수어는 서해에는 어느 곳에나 서식한다. 경강의 것이 가장 좋다. 나주에서 잡은 것은 매우 크고, 평양의 것은 겨울에 잡은 것(동숭어)가 맛있다’고 했다.5) 역시 평양의 동숭어를 꼽았다. 아마도 겨울철 얼어붙은 대동강에서 잡은 숭어가 아닐까 싶다. 경강은 뚝섬에서 양화도 인근, 나주는 영산강을 말한다. 효종3년(1652)에 흉년이 심했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4월 24일)을 보면, 부제학 민응형은 호남은 특히 흉년이 심해 전세개정은 어렵더라도 공물을 감면해야 백성들이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뢰었다. 특히 호남이 상황이 더욱 심한데’, 어공(御供, 임금에게 바치는 물건)으로 쓰이는 건숭어는 머리와 꼬리를 빼고 한 자나 되는 것으로 그 값이 열 사람이 열흘 동안 연명할 쌀 열 말에 이른다니 그 고충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싶다.
숭어는 강과 바다를 오가는 어류지만 바닷물고기이다. <난호어목지>는 숭어를 민물고기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강, 금강, 영산강 등 상류까지 숭어가 올라왔던 것도 이런 숭어의 생태적 특징 때문이다. 영산강 하구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나주 영상포 사람 중에는 구진포 앙암바위까지 올라온 숭어와 장어를 잡아 생계를 잇기도 했다. 산사람만 아니라 귀신들도 숭어를 좋아하는지 제물에 숭어가 곧잘 오른다. 숭어는 민물과 바닷물을 오가는 어류이다. 이를 두고 민속학에서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영물로 여겼다. 큰 굿이이나 제사에 올렸다. 바닷물이 턱밑까지 올라왔던 나주에서는 제사에 숭어를 올렸다. 서울 진오귀굿에서는 숭어가 망자를 상징하기도 했다. 숭어는 영산강이나 한강이나 낙동강이나 강어귀의 터주대감이다. <동의보감>에는 숭어가 갯벌을 먹으므로 백약에 어울린다. 했다. 연안이 깨끗하고 갯벌이 오염되지 않았던 시절에 어울리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 숭어는 갯벌에 유기물을 먹고 자란다. 숭어가 앉은 자리는 뻘도 고소하다고 했지만 이젠 아니다.
* 몽탄 어란과 도리포 숭어 숭어는 회로 먹고 말려서 찜을 해먹고 탕으로 먹는 서민음식이지만 어란은 양반들이 즐겼다. <전어지>에는 ‘사오월이면 알이 배에 가득 차는데, 두 개 알집을 함께 꼭지에 매달린다. 낱알이 작으면서 차지며 부드럽고, 햇볕에 말리면 색이 호백과 같은데 부유하고 권세 잇는 사람들이 진귀한 반찬으로 여긴다’라고 했다. 영산강의 감탕에서 잡힌 숭어의 알로 만든 어란을 으뜸으로 쳤다. 어란을 얇게 썰어 혀 위에 올려놓으면 눈 녹듯 고소한 향기와 함께 사라진다. 야박할 만큼 얇게 썰어 입천장에 붙이고 술 한 모금 머금고 혀로 살살 굴리면서 먹는다. 고급 술안주였다. 이게 진상품 ‘영암어란’이다. 이젠 전설이 되었다. 더 이상 몽탄숭어로 만든 어란을 맛 볼 없다. 숭어는 그물을 이용한 정치망, 자망, 육소장망과 뜰채와 낚시를 이용해 잡는다. 전라남도에서는 건강망이나 각망이라 부르는 정치장이나 자망을 이용해서 많이 잡는다. 숭어는 겨울에 회로 즐겨 먹는다. 겨울 숭어 맛 모르고 봄을 맞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특히 정월에 먹는 숭어회는 도미회가 울고 갈 만큼 찰지고 식감이 뛰어나다. 다만 갯벌을 좋아하는 탓에 청정한 갯벌이나 먼 바다 섬 주변에서 잡는 숭어가 좋다. 특히 청정하고 생물다양성이 높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갯벌에 서식하는 숭어라면 안심이다. 도리포가 있는 무안갯벌은 우리나라 제1호 습지보호지역이다. 신안갯벌도 대부분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자산어보>에도 숭어는 ‘맛은 달고 농후한데, 어족 중에 제일이다’고 했다. <용재총화>에는 중국사신이 조선의 숭어를 맛을 보고 감탄하여 이름을 물어, 수어(秀魚)라고 알려줬으나 ‘수어(水魚)’ 알아들어 어리둥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선사시대 먹을거리를 살필 수 있는 조개무지에서도 숭어 뼈가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숭어와 인간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다.
1) 李王職 禮式課에서 1919년부터 1924년까지 종묘, 경효전, 의효전에 천신한 물품을 편철한 ‘薦新件’(출처, 디지털장서각)
2) 『고문서집성 3 -해남윤씨편 정서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번역문은 2016년-2017년 한국고문서 정서·역주 및 스토리텔링 연구사업 연구결과물임(출처, 한국고문서자료관). 3) 출처, 호남권 한국학자료센터. 4) 출처, 디지털장서각 간찰 380. 5) 한국고전종합DB에는 ‘동숭어’를 ‘냉동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고종 23년 병술(1886) 10월 22일(신사))에 ‘동숭어회’가 소개된 것 등으로 볼 때 숭어맛이 가장 좋은 겨울철에 잡은 숭어를 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以司謁口傳下敎曰, 進味數大小膳, 旣有磨鍊矣, 大王大妃殿進湯進饅頭進茶之節, 竝依丁丑年例爲之, 侍座大小膳, 竝置之, 五味三器, 當有磨鍊, 初味以小饅頭·果骨湯·生鰒膾各一器, 二味以三色梅花軟·絲果·雜湯·鷄蒸各一器, 三味以三味漢果·羘湯·秀魚蒸各一器, 四味白蓼花·海蔘湯·羊肉熟片各一器, 五味以蹲柿·猪胞湯·凍秀魚膾各一器磨鍊, 大殿東宮侍座排設, 以簾外爲之, 前導以下各差備等擧行之節, 成笏記肄習事, 分付。 출처 : 한국고전종합DB(승정원일기, 고종 23년 병술(1886) 10월 22일(신사) 맑음) 글쓴이 김준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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