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나주 회진(會津), 고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국제 무역항 게시기간 : 2022-02-04 07:00부터 2030-12-31 00:00까지 등록일 : 2022-02-03 12:4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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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진(會津)은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에 있는 마을로 회진임씨(나주임씨) 집성촌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오늘날에는 영산강 중류의 한적한 농촌인 회진 마을 앞 포구(浦口)가 10세기 초반에는 중국을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항구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새롭게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주 회진성(羅州 會津城) 회진 지역의 역사유적·유물로 마한시대로 추정되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사적 제 404호)과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보물 재 2125호)에 이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회진성이다. 나주 회진성(羅州 會津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7호, 1986. 2. 17 지정)은 성곽유적으로 지정되어 지방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소재지는 전남 나주시 다시면 신풍리 산8-1번지 외이고, 면적은 약2.4㎞(76,034평)이다. 회진성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 마을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계곡과, 계곡을 감싸며 쌓은 백제시기의 산성이다. 성벽은 둘레가 2.4㎞에 달하는데 전남 지역뿐 아니라 우리나라 삼국시대 토성 가운데서도 큰 규모에 해당한다. 계곡 주변의 3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는 급경사의 절벽을 깎아내어 성벽을 만들었고, 계곡에는 폭 6m, 높이 6m 정도로 흙을 한층 한층 다져 성벽을 만들었다. 능선의 평탄한 곳을 이용하여 4개의 문을 만들었던 자리와, 남쪽의 낮은 계곡에는 수문(水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나주 회진성은 백제의 축성기법을 살필 수 있고, 그 이후 통일신라시기 성의 수축 양상도 남아있어 우리나라 성곽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1993년 전남대박물관 임영진 교수팀이 회진성을 발굴 조사하여 그 결과보고서로 『회진토성1』(1995년)을 간행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회진토성의 첫 축조 시기는 6세기 후반 이전으로 추정되며, 영산강 유역 옹관고분 사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회진토성은 해발 10-120m의 계곡과 산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 성이다. 규모는 동서 직선거리 약 750m, 남북 직선거리 약 800m, 둘레 약 2,400m이다. 회진토성의 평면형태는 남북이 약간 긴 타원형에 가까운 반달모양을 이루고 있다. 동·서·북쪽 3면은 산 능선의 외면을 깎아 내어 급경사가 되도록 하였다. 계곡 입구에 해당하는 남쪽은 흙을 쌓아 다진 판축으로 축조하였다. 토성 내부 성토층에서 인화문토기편을 비롯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그 시기에 회진성의 수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남문지 퇴적토에서 출토된 기와는 암·수키와 모두 수지문-격자문-복합문의 순서를 보이고 있어 주로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1.나주 회진토성
2. 판축성벽(남벽구간) 회진현[會津縣] 이곳은 본래 백제의 두힐현(豆肹縣)이었는데, 백제 멸망 뒤 신라 문무왕대에 죽군현(竹軍縣)으로 바뀌어 당나라가 설치한 대방주(帶方州)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회진현(會津縣)으로 고쳐 금산군(錦山郡; 지금의 나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인 940년(고려 태조 23) 금산군이 나주로 개칭되었으며, 1018년(현종 9) 나주가 나주목(羅州牧)으로 바뀌었고 회진현은 나주목 관할 하에 회진현으로 고려말기까지 계속되었다가 조선초기에 폐현이 되었다. 회진, 중국 남종선의 기착지(寄着地) 인도에서 성립된 불교가 중국적인 불교로 자리잡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선종의 성립에 의해서였다. 중국의 선종은 남인도에서 중국에 건너온 보리달마에 의해 종파불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에 이어 제2조인 혜가, 제3조인 승찬, 제4조인 도신, 제5조인 홍인에 이르게 된다. 홍인 이후에 신수계와 혜능계로 양분되어 '북수남능(北秀南能)'의 형세를 이루게 된다. 이른바 북종선의 신수와 남종선의 혜능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선종의 제6조 혜능 계통의 선을 남종선이라 부른다. 혜능 문하에는 '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으로 남종선의 기치를 높이 들면서 제7조임을 자임한 하택신회도 있었으나 그의 사후 곧 법맥이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800년 전후에 중국에서 선종이 크게 일어나게 되면서 초기 선사들에 대해 추선작업과 선맥이 정리되게 된다. 그 결과 남종선이라 불리는 혜능 문하는 남악회양계와 청원행사계로 대별된다. 신라하대 선종의 수용단계인 9세기에는 남악회양계의 마조도일 문하의 홍주종이 대세이었으나, 10세기 전후로 한 신라말 고려초의 후삼국 시기에는 청원행사계가 더 두드러졌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900년대 초반 중국에 유학하여 선종을 익히고 귀국하는 승려들이 한반도에 첫발을 내딛은 곳 중의 하나가 나주 회진이었다. 남중국에서 선법(禪法)을 익힌 그들을 안전하게 나주 회진으로 귀국시킨 해상세력은 누구였을까? 10세기 초반 나주를 장악한 해상세력은 왕건이었다. 왕건은 개성지방의 호족이었으나 예성강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해상세력으로서 강화도에까지 크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그는 궁예의 휘하에 있으면서 강력한 해군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903년 왕건은 나주호족 다린군의 협조 하에 나주를 장악하였다. 나주 장악 이후에 왕건의 해상세력은 중부해역은 물론 서남해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제해권을 확보하게 되기에 이르렀다. 왕건이 나주를 장악한 903년 이후 나주 회진에 기착한 선승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을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0세기 초에 나주·무주에 기착한 선승들 10세기 초에 나주·무주에 기착한 선승들은 선각형미·대경여엄·법경경유·진철이엄이었다. 이들 가운데 법경경유와 진철이엄은 회진으로 기착하였다. 선각형미도 왕건의 도움으로 귀국한 승려였기 때문에 회진으로 귀국한 것으로 보여진다. 형미·여엄·경유·이엄은 ‘해동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士)’로 불리우는 선승으로 모두 왕건과 연결된 승려였다.‘해동사무외대사’란 말은 경유의 비문에 유일하게 나온다. 경유의 탑비인 <장단 오룡사 법경대사보조혜광탑비>에 형미·여엄·이엄은 함께 해동에서 “사무외대사(海東四無畏大士)”라고 한다고 적혀있다. 해동사무외대사는 국내에서 일찍이 선종과 교종사상 모두를 접한 경험을 가졌으며, 선종사상과 교종사상의 교섭문제를 해결하고자 중국에 유학하였다. 이들은 위의 <나말려초 선종법맥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모두 운거도응(雲居道膺)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심인(心印)을 받아왔다. 당시 도응은 교선융합사상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므로 그의 심인을 받아온 사무외대사 역시 교선융합사상경향을 가졌다고 이해된다. 교선융합사상 자체가 후삼국의 혼란을 통합하면서 고려 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고, 실제로 왕건의 통일정책인 호족연합정책과 밀착되었다. 그 중에서도 사무외대사의 교선융합사상경향은 후삼국의 혼란을 종식시키면서 고려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왕건의 호족연합정책과 연결되어졌다. 사무외대사가 왕건 외에 대호족인 황주의 황보씨나 충주의 유씨의 호족 세력과 연결된 것이 이를 알려준다. 나주 회진은 남중국에 유학한 선승들의 기착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회진이 대중국 무역항이었기에 승려들이 이곳을 이용하였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회진(會津)은 뜻 그대로 해상교류의 물자와 인물이 모이는 나루로서 중국을 비롯한 고대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국제무역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회진 풍호(楓湖)나루 회진은 통일신라시대에 해상교류를 통해 수많은 인물들(중국 유학승과 견당사)과 각종 물자가 모이는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대중국 항로는 두 개의 바닷길이 있었다. 서해안 중부지역 당은포에서 출항하는 서해북로와 나주 회진에서 출발하는 서해남로가 그것인데, 이 두 바닷길로 해상교류가 크게 활발했다고 한다. 신라말 고려초의 회진현의 포구는 회진 풍호마을 앞 풍호나루였다. 풍호나루를 통해 남중국에서 조사선(祖師禪)을 익힌 해동사무외대사를 비롯한 선종승려가 귀국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견당사(遣唐使)의 왕래로 인해 인물과 물자가 모여 출항하는 국제 무역항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기 때문에 명실상부하게 회진(會津)이라 불러 마땅하지 않았을까 한다.
3. 풍호나루 유래비
4. 풍호나루 앞을 지나는 황포돛배 회진 풍호나루는 통일신라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하게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그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초에 회진현이 폐현이 되면서 점차로 축소되거나 쇠락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풍호나루는 1970년대까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였으나 영산강 하구언 사업과 4대강 사업으로 영산강의 모습이 크게 변하면서 그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이제는 풍호나루 앞을 운항하는 황포돛배를 통해 1200년 전의 회진의 영광을 상상해 볼 수나 있을까 한다. 풍호나루를 포함한 회진의 모습이 변하기 이전 조선후기에는 어떠하였을까. 18세기에 만들어진 광여도 나주목(廣輿圖 羅州牧, 古4790-58) 지도를 살펴보기로 하자.
회진일대는 조선후기에는 시랑면(侍郞面)이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용문면(用文面)에서 발원한 냇가 문평천(文平川)이 흐르는 들판을 건너 죽포면(竹浦面)에 이르게 되는데, 산 아래에 서창(西倉)과 선소(船所)가 있었다. 선소는 배를 만들었던 조선소로 오늘날의 다시면 죽산리 화동(花洞) 마을 장춘정(藏春亭)이 있는 곳이고, 서창(西倉)은 지금의 다시면 신석리 서창 후석마을 입구라고 전한다. 회진에서 들판을 건너면, 다시면 신석리 석봉마을 앞에 선석(船石)이 있다. 선석은 배를 매어 두던 장치로 배가 드나들었음을 알려주는 석물이다. 이 마을에 나주의 서창(西倉)이 있어서 선박으로 곡식을 운반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18세기 자료이지만, 회진의 인근 지역에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었고, 곡식을 저장하고 그 곡식을 실어 나르는 배가 드나들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와 같이 회진은 고대에서 중세인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인물과 물자가 모여들고 해상교류를 통해 국제적인 무역항으로서 그 역할을 다하였다. 회진의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성격이 나주목(羅州牧)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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