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배고픔을 견뎌야 할까, 자식을 팔아야 할까 게시기간 : 2022-02-16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2-02-14 10:5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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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들의 자매(自賣) 문서- 인신 매매가 허용되었다고? 고려 시대 문인 이곡은 시장 구경을 한 소감을 짧막한 글로 남겼다. <시사설(市肆說)>이다. 그는 ‘사람이 매매’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받았다고 했다. 부모가 자식을 팔고, 주인이 종을 팔려고 시장에 늘어놓고 매매하고 있었다. 더 큰 충격은 사람의 값이 개나 돼지 값만도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이곡은 ‘짐승만도 못한 사람 값’의 현실에 대해 개탄한다. 시아버지를 무척 싫어하고 구박하는 아내 때문에 고민하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시장 구경을 하고 나서 한 꾀를 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시장에 가서 보니 사람을 매매하는 곳도 있다면서, 건장한 남자는 값이 훨씬 더 비싸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님을 팔자고 제안한다. 다만 튼실한 남자가 값이 더 나가니 아버님을 튼실하게 만들어 몸값을 올려 팔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며느리는 그날부터 부지런히 시아버지를 봉양했다. 시간이 흘러 시아버지의 몸값이 비싸질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며느리는 어느 새 동네 효부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비록 옛이야기지만 시아버지를 판다는 아이디어를 낸 것을 보면 사람 매매가 실제 있었던 듯하다. 지금은 사람 매매 곧 인신(人身)매매가 범죄행위이다. 조선시대에도 양민이 자신을 파는 자매(自賣)행위를 하거나 자손들을 매매하면 처벌한다는 법규가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대명률에 의해 법적으로 금지했지만 구속력은 약했다. 1690년에(숙종 16년) ‘자매하거나 자매한 자를 매입한 자는 대명률에 따라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처한다.’는 명이 내려졌고 이 수교(受敎)는 『속대전』(1744년)에 정식으로 수록되었다. 법에 의하면 자신을 스스로 팔거나 그 자매자를 산 사람은 모두 곤장 100대, 강제 이주 당하여 3년을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법대로 되지는 않았던 듯하다. 양민들은 자신을 팔았고, 자식들도 팔았다. 심지어 자식들을 팔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문서도 작성했고, 그 문서의 법적 보호를 위해 관청이 공인(公認)해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른바 자매(自賣)문서는 이렇게 하여 만들어졌다. 자매문서는 자매명문(自賣明文), 자매문기(自賣文記) 등으로 불린다. 표면적인 의미는 ‘자신을 판다.’는 말이지만 실제 조선시대에는 자신 뿐 아니라 부모 또는 가족이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을 팔면서 작성한 문서까지 포함한다. 이 문서에는 판매자, 구매자, 팔리는 대상, 증인 등이 기재된다. 아울러 ‘왜 파는지’ 그 이유도 간략하게 또는 자세하게 기술하기도 한다. 또 이 거래의 판매자는 자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장(手掌)을 그렸다. 판매자가 자신의 이름이 쓰여진 부분에 손을 놓고 그 손모양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다. 매매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매문서의 법적 효력과 문서에 적힌 내용을 보호받기 위해 관청에 소지(所志)를 올려 공식적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기아(飢兒)에서 기아(棄兒)로 아이들은 부모에게 속해 있다고들 생각한다. 부모와 자식이 종속적 관계라는 의미이다. 이럴 때 부모는 아이들을 보호, 양육, 지원할 책임이 있고 여겨진다. 또한 동시에 아이들을 지배할 권리도 부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조선시대 자식을 ‘파는 일’도 권리라고
光緖三年丁丑十月初四日朴生員主宅前明文 右明文事當此凶年奄遭夫 喪而所生三男妹幾至沒死之 境故不得已一所生女浮蠂年十 二歲二所生女順德年九歲決価 錢文貳拾兩依数捧用以活所生 子之意成文納于右宅而日後 更無他言憑考次成文事 母寡召史金[右手章] 訂筆 朴定心[着名] 고창 장두 광산김씨 집안 소장. 1877년 과부인 어머니 김조이가 딸 부섭과 순덕을 박생원에게 팔아넘길 때 작성된 자매명문(自賣明文). 3남매가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아들은 팔지 않고 딸들만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召史 金이라는 글자 위에 오른손을 놓고 손모양을 그대로 그린 수장(手掌)이 있다. 여겼던 듯하다. 광서 3년은 1877년(고종 14년)이다. 이 때 김조이는 자식을 팔았다. 그녀에게는 3명의 자식이 있었다. 아들 한 명, 딸 둘이었다. 큰딸 부접이는 열두 살, 작은딸 순덕이는 아홉 살이었다. 지금이라면 겨우 초등학생이다. 김조이는 그 딸 둘을 박생원에게 팔았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을 즐거이 팔겠는가. 그런데 심지어 문서까지 작성하여 증명했다. ‘이후에 다른 말이 없도록 증빙하는 것’이라는 내용까지 넣었다. 혹여나 나중에 다른 말이 나거나 집안의 다른 사람이 자식 판 사실을 부정하고 되돌려달라는 소송에 대비하였다. 삼남매가 사이 좋게 살았는데, 그 중 딸 둘을 떼어내 팔아야 했던 김조이의 속마음은 어땠을까. 그녀가 이 자매(姉妹)를 팔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생활고였다. 가족 생계를 책임졌던 남편이 죽었다. 흉년까지 겹쳤다. ‘먹고 살아갈’ 길이 없어졌다. 먹거리도 없다. 먹거리를 구할 여력도 없다. 네 식구가 거의 굶어 죽기 직전에 다다랐다. 김조이가 택한 방법은 딸아이 팔기였다. 어떻게 할 방안이 도무지 없어 부득이하게 팔았다. ‘부득이’라는 말은 매매 문서에 많이 나오는 일종의 관습적 어휘다. 하지만 앞뒤 맥락에 따라 이 어휘를 쓸 때의 마음은 각각 달랐으리라. 논밭을 팔 때에는 아깝고 아쉬울 터이다. 낳아 10여 년을 기른 딸을 팔 때는 어떠했을까.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지 않을까. 1876년은 기록적일 만큼 가뭄이 심했다. 기우제를 자주 지냈다. 4월 한 달 동안 다섯 번, 5월에는 3번 지냈는데 특히 사직단에서 특별 기우제를 지낼 때 왕이 직접 향축을 전하기도 했다. 6월에만 여섯 번을 올렸으니 거의 5일 걸러 한 차례씩 기우제를 지냈던 것이다. 가뭄이 왕의 통치에 주요한 문제로 부상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 해의 강우량은 평소의 연평균에 비해 30% 이하였다고 한다. 4월 즈음에 벼를 심으면 5,6월에 논에서 벼가 자라 가을에 여물게 되는데, 비가 오지 않아 모내기조차 쉽지 않았고 벼가 자라기에도 마땅찮은 환경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을 수확은 기대할 것이 없었다. 가뭄의 영향은 그 다음해까지 미치게 된다. 겨울에서 봄까지 먹거리 부족으로 백성들의 굶주림, 배곯기는 심해져갔다. 1876년 전후의 가뭄은 조선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다. 이 즈음 중국은 더 심해 하북의 네 성(省)에서만도 9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었다고 한다. 1877년은 그들의 기억 속에서도 몸서리칠 정도로 참혹한 기근의 해였다. 기상 변화가 심해 백성들의 삶이 거의 파괴된 지경이었던 것이다. 김조이는 남편이 죽어 생계도 막막했다. 그녀는 과부였다. 조선시대 과부의 처지는 다른 여성과 달랐고, 사회에서 기대하는 것들도 있었다. 어느 과부는 남자 종이 식량을 얻으러 간 사이 겁탈당할까봐 자살하기도 했다. 과부는 그 만큼 성적 겁탈 위협에 노출되었다. 그에 비해 과부에 대해 사회는 수절이나 정절 등을 요구했다. ‘남편 없는 여성’이라는 ‘미망인’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 죄를 지은 듯 행동해야 했다. 물론 김조이의 경우 양반 계층 여성은 아니어서 이런 기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선 후기 사람이다. 계층에 상관없이 과부는 ‘남편 잃은 여성’임을 자처하고 ‘거의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을 만큼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생계를 위해 무작정 나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먹고, 목숨을 부지하고, 자식을 키우는 일은 고난으로 다가왔을 터이다. 결국 그녀는 먹거리를 확보하여 목숨을 부지할 방책으로 딸 매매를 결심했던 것이다. 두 딸의 몸값은 20냥이다. 조선시대 쌀값이 1섬당 5냥 정도였다고 하니 냥20이면 4섬이다. 1섬이 144Kg정도였으니 20냥어치 쌀이라면 276Kg이다. 지금의 20Kg 포장쌀 18포대 정도인 셈이다. 이 정도 양이면 김조이와 아들, 두 식구가 목숨은 부지할 것이었다.
光緖二十年甲午三月二十六日梁生員墻內宅前明文 右明事當此歉年生活無路哛除良偶 得身病至於死境而況又無父女子同 至塡壑乃已故不得已而身女子九 歲乙酉生名푸接一口身乙価折錢文 伍拾兩依數捧上是遣右宅前 永永放賣爲去乎日後族屬中 如有爻象則以此文告 官 卞呈事 金푸接母寡許召史[手掌] 證筆鄭仁華 鄭景春 현 소장처는 원광대학교 박물관이다. 과부인 허조이가 9살 딸을 팔 때 작성된 자매명문. 딸의 몸값은 50냥이며 양생원 집으로 팔려갔다. 원래 소장처는 보성 박실의 제주 양씨 집안이었다. 허조이의 사정도 김조이와 다르지 않다. 남편은 병들어 죽었다. 흉년까지 겪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형편에 놓였다. 그래서 아홉 살 딸을 양생원에게 팔고 50냥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의 형편을 ‘구렁텅이에 빠진’ 것으로 묘사했다. 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가족 모두 구덩이에 빠져 죽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1877년과 마찬가지로 1893년과 1894년에도 전라도 지역의 가뭄은 심했고 흉년이었다. 15여 년 동안 풍년보다는 흉년이 더 많았다. 흉년으로 인한 먹거리 부족으로 인해 굶주리는 백성들의 수는 더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먹거리 부족 및 배고픔 상황과 이에 대한 사회 집단 반응 양상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먹거리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경우 사회 집단은 처음에 결속하여 공동급식소도 설치하면서 서로 나눈다고 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각자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흩어지고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도둑질, 폭력이 난무하게 되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가족간의 친밀감, 신뢰도도 깨져 결국 가족을 서로 파는 데까지 이른다고 한다. 김조이나 허조이는 이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른 셈이다. 물론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 초기에는 가족끼리 협력하여 먹거리도 구하고 서로 위로했을 터이다. 하지만 흉년, 배고픔이 계속되고 남편까지 죽어 생계 꾸리는 일이 막막해지자 구렁텅이에 빠져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배고픔과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누구나 갖는 감정이다. 막다른 상황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벗어날 방법이 있다면 감행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서 자식을 팔았을 터이다. 흉년과 굶주림으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어려워졌을 때, 조선시대 국가는 어린아이를 파는 일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허락하거나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아마 그것이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아이들을 ‘구매’한 사람들은 아이에게 일을 시키면서 먹을 것을 주니 아이도 먹고 살 수 있고, 아이를 판 부모는 ‘상품’값으로 먹거리를 살 수 있는 돈이 생겼으니 적어도 굶어서 죽지는 않은 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팔린 아이들은 대체로 노비나 고용인으로 살게 된다. 노비가 되면 그 자손까지도 자동적으로 노비 신분에 속하였다. 신분 세습 사회였기 때문이다. 노비는 일반 양민에 비해 거주, 이동에 제한이 있었다. 팔려가 남의 집 종이 된 아이들은 주인의 뜻에 맞춰 움직여야 했다. 부모나 가족을 만나려면 아마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팔려간 아홉 살 아이는 배고프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가족에 대한 마음의 배고픔이 생겼다. 굶주렸던 아이는 이렇게 가족으로부터 버려졌다. 투명한 고통의 문서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에 사는 한 여인의 사연이 인터넷에 올랐다.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딸들을 팔아 남편과 아들을 먹여살려야 한다고 했다. 김조이와 허조이의 상황과 거의 비슷했다. 딸을 팔아야 하는 그녀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쉽지 않다. 문서는 담담하다. 굶주림의 위협감, 죽음에 대한 공포, 배고픔 견딜지 자식을 팔지에 대한 갈등, 자식을 팔아넘겨야 하는 고통 등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길이 없다거나 부득이하게 팔아야 한다는 말만 쓰여져 있다. 이런 표현만으로는 그녀들의 고통을 다 담아낼 수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 팔려야 하는 아이의 마음은 문서의 어느 부분에도 표기되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묻혀 있다. 자매문서는 파는 이와 팔리는 이의 투명한 고통을 담고 있다. 볼 때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도움 받은 글들> 김덕진(2008),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 푸른역사.
김재호(2005), 「자매노비와 인간에 대한 재산권, 1750-1905)」, 『경제사학』 38, 경제사학회. 멍레이‧관궈펑‧궈샹양 외, 고상희 옮김(2013), 『1942 대기근』, 글항아리. 박경(2008), 「자매문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하층민 가족의 가족질서」, 『고문서연구』 33, 한국고문서학회. 샤먼 앱트 러셀, 곽명단 옮김(2016), 『배고픔에 대하여』, 돌베개. 이준호‧이상임(2018), 「19세기 농민운동의 기후학적 원인에 대한 연구-‘동학농민운동’을 중심으로」, 『동학학보』 46. 전경목(2013), 「조선후기 자매의 원인과 양태」, 『전북사학』 43, 전북사학회. 정형지(2003), 「조선시대 기근과 정부의 대책」, 『이화사학연구』 30, 이화사학연구소. 차재운(2012), 「소사(召史)의 변천에 대한 연구」, 『한국어학』55, 한국어학회. 한국학자료센터 호남권역, http://hnkostma.org/emuseum/service/ 고종실록, http://sillok.history.go.kr/search/inspectionMonthList.do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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