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사적 전라우수영의 흔치 않은 조선시대 건조물 ‘방죽샘’ 게시기간 : 2022-02-18 17:00부터 2026-12-31 23:59까지 등록일 : 2022-02-18 14:45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
||||||||||||||||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다. 2016년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에 올려 진 사진을 보면 장방형 판석으로 잘 짜여진 우물이 먼저 눈에 든다. 보통 “성(城)”이라 하면 관방시설이나 행정치소로서 성곽과 관아를 연상한다. 그리고 이를 알리는 대부분의 사진은 성곽, 성터, 관아, 건물터에 대한 것이다. 또한 간략한 연혁과 함께 성곽의 길이와 높이, 쌓는 방법 등을 적고 “앞면 3칸 건물 규모로 팔작지붕” 운운의 설명을 덧붙인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 외형과 함께 또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할게 그 시설 또는 기구의 운영에 관한 것이고, 그를 기반으로 살았던 사람들과 생활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든 문화재명칭 “전라우수영”과 첫 사진으로 설명이 나오는 “우물”로만 본다면 성곽과 관아 시설물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 또한 연유가 있다. 전라우수영이 처음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992년이다. 전라남도 기념물(제139호)로 지정되었으니 올해가 30년이 된다. 그 무렵은 전라우수영 성지 안에 면사무소가 있던 터였다. 면 소재지가 되어 시가지가 되면서 성곽은 대부분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산쪽으로는 원형이 남은 곳도 있긴 했지만, 근대기 이후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전라우수영 500년의 역사는 묻혀지고 터만 남게 되어 “성지(城址)”로 문화재명칭을 삼았던 것이다. 문화재 지정이 되고도 도시계획 변경이나 주민들의 생활관 관련하여 구역 해제에 대한 민원도 제기되었다. 몇 번인가 현장에 문화재위원과 함께 나선 기억도 난다. 그러던 중 2006년에 또 다른 문화재 지정논의가 있게 된다. 우수영성 안에 있는 우물의 문화재 지정에 대한 것이다. 잘 다듬은 기다란 판석을 육각형으로 잘 짜 맞추어 조성한 우물. 성안 사람들은 “방죽샘”이라고 불렀다. 여러 논의를 거쳐 전라남도 기념물로 이미 지정된 전라우수영성지의 지정구역을 확대하는 것으로 변경 지정하게 되었다. 건조물로 본다면 유형문화재일터이고, 생활사와 연관시키면 민속문화재가 될 것이다. 그런데 따로 지정하는 것은 “점(點)” 단위 문화재 관리 방안이기에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를 하게 된 것이다. “전라우수영”이라는 공간과 시설을 넓게 보아 “면(面)” 단위 보존 관리로 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여기에 “방죽샘”은 전라우수영의 건조물 가운데 남아 있는 거의 유일한 시설이라는 것도 방점이 찍혔다. 전라우수영에는 관찬 기록이나 고지도에 객사, 동헌, 내아, 태평정, 운주루, 중군, 중영, 작청, 우청, 좌청, 장교청, 군기고, 독제당, 관서재, 망해루, 청해루 동서남북문 등 관아건물이 보이지만 그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관아는 아니지만 건조물이라 할 수 있는 우물 이, 그것도 원형을 간직한채, 전라우수영은 1895년 폐영되었지만 주민들은 마을제를 지내면 보존해 왔던 것이다. 학술조사나 진행되고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논의가 제안되면서 학술대회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문화재의 보존과 현주 주민의 사용의 측면에서는 부딪침이 있었다. 그 한 계기가 보존 측면으로 흐르게 된 것은 문내면사무소의 이전이었다. 2009년부터인가 논의가 있다가 2012년에 신축하여 이전을 한다. 전라남도에서는 2010년 2월에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가치가 있다고 심의하여 해남군에 지정신청서를 제출하도록 한다. 학술대회 등 준비 끝에 신청서를 제출한다. 이때의 신청 명칭은 “전라우수영성”. “전라우수영성지”에서 “지(址)”를 제하고 명칭을 삼았다. 문화재청에서 전문가 조사가 실시되었다. 2015년 7월 14일이다. 안내 설명차 현장에를 갔다. 현수막이 보인다. 이런 일이? 문화재청 관계관도, 전문가 학자들도 놀랐다. 지정예고나 지정고시가 아니라, 지정신청에 따른 전문가 조사를 이렇게 반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대단하다는 것. 전국에서는 없는 일이라 하면서 그저 기분들이 좋아 보였다. 문화재 지정이라 하면 소유권 제한 때문에 꼭 민원이 따르는데, 조사하는 것부터 환영이라니... 문화재 구역 관련해서 여러차례 현장에서 부대꼈던 나 자신도 의외였다. “반세기의 기다림! 전라우수영성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문내면민 일동” 이같은 분위기는 전라우수영을 위해서 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신청서 작성팀에서 설명을 마치자 제안할 것이 있다고 나섰다. “전라우수영성”으로 지정신청을 했지만, “성(城)”이 위주가 되는 것 보다는 역사공간의 의미를 살려 “전라우수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라는 제안. 2012년에 여수 석보(麗水 石堡) 사적 지정 사례를 예시 하였다. “석창성” 또는 “석창성지”라 한 것을 영(營)-진(鎭)-보(堡)의 개념에 따라 석보(石堡)라는 공간으로 명명하여 지정한 바 있다. 문화재청 조사위원들이 가면서 논의를 하였는데 긍정적으로 답이 왔고, 결국 2016년에 9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라우수영성지(전라남도 기념물)-전라우수영성(사적 신청)-전라우수영(사적 지정)” 글자 한두자이지만 서로 차이가 있다. 명칭 변화는 지정문화재 보존관리 차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아 있는 잔존 성벽[營城址]→성곽 건조물 유적[營城]→당해 기구의 관할 공간[營]으로 의미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面)” 단위 문화재 관리와 관련하여 또 하나 특기할 사항이 있다. 전라우수영과 관련이 바로 되는 원문성(轅門城)까지를 지정구역에 추가한 것이다. 원문이란 군영(軍營)이나 진영(陣營)의 바깥 문 정도로 보면 되겠다. 물론 성도 함께 있다. 문제는 상당한 거리에 떨어져 있다는 것. 원문성은 기록상으로도 전국에 몇 안되는 희귀성도 있다. 부랴 부랴 조사를 추가로 하여 신청서를 보완해 제출하였다. 당시 고용규위원과 현장을 함께 조사하였다. 거리가 4키로가 넘는다. 원문성은 고흥의 녹도진, 통영의 삼동수군통제사영 등에 기록이 있지만, 국가 사적 구역으로 들어간 곳은 없다. 기념물 가운데 사적은 그 자체가 공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면”단위 문화재로 관리되는데, 마땅한 문화재명칭 부여를 통하여 해당 문화재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고 보존관리에 있어서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라우수영은 사적 지정으로 치자면 6년 세월이지만, 전라남도 기념물로 문화재 지정격을 부여하여 가치를 확산시켜 나간 것으로 치자면 30주년이다. 사적 지정 이후 종합 정비계획이 수립되고 발굴조사가 진행중인데, 관아나 성곽 등 시설물 복원을 넘어 그 안의 “사람과 생활”의 복원이 함께 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와 관련하여 다시 살필 것이 앞에서 언급한 우물 ‘방죽샘’이다. 정교한 짜맞춤도 인상적이고 성안 주민들의 보존 의지는 지금도 이어진다. 신성시하고 있다. 그런데 방죽샘 옆의 자그마한 비석들이 눈길을 끈다. 중수비라 한 것도 있고 육안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어 살피니 ‘雍正 二年 甲辰(1724년)’, ‘乾隆 十七년 壬申(1752년)’, ‘嘉慶 九年 甲子(1804년)’ 등이 보인다. 가장 빠른 것이 1724년 중수이니 그 이전부터 있었던 역사성이 증명된 셈이다. 그래도 언제가 자세히 판독을 하고 정리를 해 봐야지 생각만 한 채 시간이 흘렀는데, 2020년 7월 1일 탁본조사를 하였다. 방죽샘은 문내면 서상리 서상(西上)마을에 있다. 서상마을은 면소재지로부터 동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외마을, 서쪽으로는 서외마을과 접해있고, 남쪽으로는 서하마을, 북쪽으로는 동리마을과 인접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때 황일면에 속한 마을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도 기록이 보여 오래된 마을 임을 알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서하, 서외, 남상 일부, 동리 일부와 함께 법정리인 서상리에 포함되어 문내면에 속하게 되었다. 서상마을 방죽샘은 서상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을 정비하여 관리상태는 아주 좋다. 이 우물은 기둥 6개를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장방형의 판석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각각 다르지만 육각형에 가깝다. 기둥의 상부는 연꽃 봉우리가 조각되어 있다. 세월 탓인지 곳곳에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 우수영 지역에서는 서상마을 방죽샘과 동내마을 새샘이 풍수지리상 호랑이 눈을 상징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1970년까지는 마을에서 금줄을 치고 방죽샘 제사를 모셨다. 생활공간이면서도 신성성을 부여한 것이다. 방죽샘에 대한 얘기는 담장 건너집의 어르신과 탁본조사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해설사[장명수님]와 우수영 원로 한분이 설명해 준다. 우수영의 원로, 바로 그분이 2015년 전라우수영 사적 지정조사 때 현수막을 내걸었던 전라우수영성사적보존회의 회장 정춘원님. 1949년생이시다. 사실 인연은 그 전부터 있었다. 문내면사무소가 신축하여 옮기고 원래 면사무소의 보존문제가 논의될 때이다. 헐어내고 다른 시설을 짓는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보존 방안 문의차 도청으로 연락이 와서 현장에서 뵈었다. 2012년 9월 22일이다. 1953년 석조 건축물로 건축적으로나 향토학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보존하자는 의견을 냈다. 사실 권고에 머무를 뿐이었지만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보존이 되었다. 전라우수영은 원래 전라수영으로 설치한다. 지금 자리에 들어 선 것은 1440년(세종 22)이다. 당시 해남 황원곶. 고려말기 1377년(고려 우왕 3)에 옥구에 수군처치사영이 설치된 뒤, 1408년(조선 태종 8) 무안 대굴포(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 1432년(세종 14) 목포를 거쳐 이설한 것이다. 1479년(성종 10)에 여수(당시 순천도호부)에 또 하나의 수영이 들어서면서 그쪽을 좌수영, 해남을 우수영이라 한다. 이 두 곳은 ‘전라 수군’을 넘어 ‘조선 수군’의 본거지가 된다. 특히 전라우수영은 서남해의 바다를 방어하는 기지로서 임진란 때 명량대첩의 본부라 할 것이다. 조선을 구한 해상의병도 이곳을 발판삼았다. 17세기 중기에는 17곳의 첨사진과 만호진을 관할했다. 전라우수영에도 호지(濠池)와 우물[井]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수영 : 성의 둘레는 2천 4백 48척이며, 옹성이 네 개, 연못이 하나, 우물이 2개[右水營 : 城 周二千八百四十八尺 瓮城四 壕池一 井二]”라는 『대동지지』 해남 영아(營衙)조의 내용이다. 군사시설에도 우물이 필수적이다. 우수영에 있는 우물 2개소에 대한 명칭이나 위치가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 남아 있는 방죽샘이 2개소 가운데 1개소로 보인다. 우수영 서상마을 방죽샘 곁에 있는 중수비 가운데 1724년(경종 4, 雍正 2) 명문이 있어 축조 시기는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해남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우물로 보인다. 중수연대와 참여자를 알 수 있어 조선 시대 우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만하다. 중수비는 모두 5개가 있다. 1724년(경종 4, 雍正 2) 중수비는 앞면에 대시주 양심(梁潯)과 시주 4인, 감역 절충 이지만(折衝 李枝萬)등 4인, 그리고 존위, 좌상, 공, 공양 등 직임과 인명을 새겼다.1) 1752년(영조 28, 乾隆 17) 중수비는 앞면에 시주, 감역, 별좌, 공원, 화주, 존위 등의 직임과 인명(18인), 뒷면에 연기를 새겼다.2) 1804년(순조 4, 嘉慶 9) 중수비는 한 면에 연기와 4언 8구의 찬문, 지은이[製車□□]와 글씨를 쓴 사람[書李□□]을 새겼는데 성씨까지만 보인다. 찬문은 “돌을 다듬어 공사를 마치고 옛일을 이어서 지금을 기술하네 돌아보며 기르듯 산신께 잔치하니 맛 좋은 샘물이여 깊은 골을 받치소서 큰 물 모여 마르지 않고 날아서 나오듯 그치지 마소서 천년 또 만년토록 허물어지지 않고 흐려지지 마소서”라는 내용이다. 다른 면에 감역, 화주, 간사, 별좌 등의 직임과 인명을 새겼다.3) 1907년(光武 11) 중수비는 앞면에 감동 전주사 전풍주 등 6인과 사수(社首) 김재운 등 4인, 대시주 등의 직임과 인명, 뒷면에 연기를 기록하였다.4) 1948년(단기 4281년) 중수비는 시주 6개마을(서하, 선두, 서상, 남상, 서외, 남하), 감역 6인의 인명을 새기고 뒷면에 연기를 기록하였다.5) 이처럼 방죽샘에는 1724년, 1752년, 1804년, 1907년, 1948년 중수비가 있다. 시주와 감동, 감역, 별좌, 공원, 화주, 존위, 좌상, 공양 등 여러 직임과 인명을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중수비에는 6개 마을(서하, 선두, 서상, 남상, 서외, 남하)이 시주로 참여하고 있다. 조선후기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해남의 대표적 우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방죽샘 우물 탁본조사는 김희태, 황호균, 장모창, 이수경, 성대철이 참여했다. 해남군에서 실시한 관내 우물 문화재 전수 조사의 일환이었다. 마을유래지 등 문헌상 580개소였는데 현지조사를 해보니 272개소였다. 95개소를 골라 『해남의 우물』(해남군, 2021)을 냈다.
1) [앞면] 大施主 梁潯 施主 張漢柱 丁南奎 文尙彩 丁南樞 監役 折衝 李枝萬 閑良 葛敏弼 金大呂 李義昌 尊位 朴桂益 痤上 朴世九 公 崔泰潤 供養 金時鳴 郭時海 [뒷면] 雍正二年甲辰三月 日. 중수비문은 세로 표기인데 이 글에서는 이어쓰기 형식으로 제시한다.
2) [앞면] 施主 朱德三 朴千水 金命大 施主 廉又興 金項石 金明九 施主 金益厚 監役 朴師謙 朴重大尊位 崔錫泰 幹事 金世奉 別佐 邵回芳 公員 崔啓亨 化主 金萬壽 化主 廉又儉 宣ㅁㅁ 丁昌說 田有秋 [뒷면] 乾隆十七年壬申九月 日立. 3) [1면] 治石告訖 纘古述今 乳復燕山 泉甘盘谷 渾淵不渴 飛出無窮 天且萬年 不頹不濁 製車□□ 書李□□ 嘉慶九年[甲子]三月日 [2면] 監役 朴碧東 李喜苓 梁達洙 李時恒 化主 金鱗海 張再良 田昌垕 申元淡 幹事 崔奉世 林啓喆 梁達泓 別座 李應啓 尊□ 公□ 石□ 冶□ 助□ 4) [앞면] 監董 前主事 田豊主 金章煉 林玟根 前主事 張亨遠 李道俊 田俊錫 社首 金在云 林璟槇 朴武(晨) 大施主 □ [뒷면] 光武十一年 5) [앞면] 重修紀念碑 施主 西下里 先頭里 西上里 南上里 西外里 南下里 監役 金相午 朴泰春 李明奎 文有一 金泰俊 鄭金南 [뒷면]檀紀四千二百八十一年戊子二月 日立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
Copyright(c)2018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All Rights reserved. | ||||||||||||||||
· 우리 원 홈페이지에 ' 회원가입 ' 및 ' 메일링 서비스 신청하기 ' 메뉴를 통하여 신청한 분은 모두 호남학산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 호남학산책을 개인 블로그 등에 전재할 경우 반드시 ' 출처 '를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