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家別傳] 도선(道詵)은 당(唐) 나라에 유학(遊學) 하였을까?(1) 게시기간 : 2021-09-22 07:00부터 2030-12-24 21:26까지 등록일 : 2021-09-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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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家別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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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끄는 말 도선(道詵, 827-898)은 9세기 초반에 태어나 그 말기까지 산 선승(禪僧)이었다. 그는 선승(禪僧)이면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능통(能通)하였다. 그의 사후(死後)인 고려(高麗)·조선(朝鮮) 시기에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대가(大家)로서, 오늘날에도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비조(鼻祖)로 추앙되고 있다. 따라서 도선(道詵)에 대한 연구는 일제시기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불교사, 풍수지리(風水地理), 설화(說話) 등 여러 부문에 걸쳐 지대한 관심아래 꾸준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도선(道詵)이 입당(入唐)하여 당(唐) 나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대가(大家)인 일행(一行)을 사사(師事)했다는 주장이 고려중기(高麗中期)에 제기(提起)되었다. 이와는 달리 도선(道詵)에 관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인 고려중기 의종대(毅宗代, 1147-1170) 최유청(崔惟淸)이 지은 「옥룡사선각국사증성혜등탑비(玉龍寺先覺國師證聖慧燈塔碑)」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도선(道詵)의 입당(入唐)을 부인(否認)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이후 서로 다른 두 가지 견해가 오늘날에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다. 이 가운데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은 일행(一行)의 생몰연대(生沒年代, 683-727)와 도선(道詵)의 생몰연대(827-898)와 현격(懸隔)한 차이(差異)가 있어 얼른 납득(納得)하기 어렵다. 고려중기에 이를 언급한 인물들도 몰랐을 수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게 이해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한편, 도선(道詵)에 관한 연구가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당(入唐) 여부(與否)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연구자는 없다. 그의 임당(入唐)을 믿지 못할 사실로 이해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언제, 누가 그러한 주장을 했는지, 또 정치사회적 배경이 무엇인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 관련기록을 먼저 살펴본 다음, 어떤 정치사회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진 것인지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음으로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언급하지 않은 채 국내에서 적인선사(寂忍禪師) 혜철(慧徹)과 지리산(智異山)의 이인(異人)에게 선종(禪宗)과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배운 사실을 기록한 입당부인설(入唐否認說)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이 제기될 당시의 고려중기의 정치사회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 도선(道詵)이 입당(入唐)하여 당(唐) 나라의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사사(師事)했다는 설(說)과 관련된 기록으로는 다음의 것이 있다. A) 신라 말에 도선(道詵)이란 승(僧)이 있어 당(唐)에 들어가서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돌아와 비기(秘記)를 지어 전했는데 김위제(金謂磾)가 그 술(術)을 배워 상서(上書)하여 남경(南京)으로 천도(還都)하기를 청하였다.(『高麗史』 列傳 35 方技 金謂磾)
B) 동리산(桐裏山)의 조사(祖師)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알아 가지고 돌아왔다.(『高麗史』高麗世系 作帝建) A)는 김위제(金謂磾)가 숙종(肅宗)에게 남경천도(南京遷都)를 주청(奏請)하는 가운데 도선(道詵)이 입당(入唐)하여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귀국(歸國)했다고 주장한 내용이다. 김위제(金謂磾)는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온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자신이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B)는 의종대(毅宗代)에 김관의(金寬毅)가 편찬(編纂)한 『편년통록(編年通錄)』의 기록으로,『고려사(高麗史)』의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된 것이다. 동리산문(桐裏山門)의 선종승려(禪宗僧侶) 도선(道詵)이 당(唐) 나라에 유학하여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은 고려중기(高麗中期) 숙종대(肅宗代) 김위제(金謂磾)가, 의종대(毅宗代) 김관의(金寬毅)가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고려말기, 조선시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전승되고 있다. 고려말기(高麗末期)에 굉연(宏演)이 찬술(撰述)한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에 의하면, 처음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배웠다.일행선사(一行禪師)는 삼교(三敎)를 다 통했고 역시 천도, 음양, 산수에 정통하여 미묘한 것까지 하지 않음이 없었다.1)
고 되어 있다. 「고려국사전(高麗國師道詵傳)」은 제목은 도선전(道詵傳)으로 되어 있으나 당(唐) 나라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신통(神通)함을 주로 언급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도 도선(道詵)이 당(唐)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에게 배웠다고 한다. 또 고려말기에 『주관육익(周官六翼)』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도선이 당(唐) 나라에 들어가서 일행 선사(一行禪師)에게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2)
조선초기(朝鮮初期)의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도 다음 기록이 나온다. 본군 사람의 속설에 전하기를, "고려 때 사람 최씨의 정원 가운데에 오이 하나가 열렸는데, 길이가 한 자나 넘었으므로, 온 집안 사람들이 자못 이상하게 여겼었다. 최씨의 딸이 몰래 이것을 따 먹었더니, 저절로 태기가 있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부모가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았다고 꾸짖고 대숲[竹林]에다 버려 두었는데, 예니레 만에 그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가 와서 날개로 이를 덮고 있었다. 부모에게 여쭈어 가서 보이니, 이상하게 여겨서 데려다가 길렀다. 장성하게 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하였다." 한다. 『주관육익(周官六翼)』에 이르기를, "도선이 당(唐)나라에 들어가서 일행 선사(一行禪師)에게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왔다. 산(山)을 답사(踏査)하는데,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혹령(鵠嶺)에 이르러 세조(世祖)의 집을 지나다가, 그 새로 집짓는 곳을 보고 이에 말하기를, '피를 심을 땅에 【 피[]와 임금[王]은 음(音)이 다르나, 뜻이 같은 까닭이다.】 어찌 삼[麻]을 심는고.' 하고, 말을 마치자 가니, 부인이 이 말을 듣고서 들어가 세조(世祖)에게 고하였다. 세조가 황급하여 신을 거꾸로 신고 뒤쫓아 가서 만나보니, 옛부터 서로 아는 듯하여 같이 유람하기를 청하였다. 함께 구령(鳩嶺)에 올라가서 산수(山水)의 맥(脈)을 살펴보았는데, 도선이 위로 천문(天文)을 바라보고 아래로 시기의 운수[時數]를 살펴보고 말하기를, '이 땅의 맥(脈)이 임방(壬方)인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수(水)와 목(木)이 근간(根幹)이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니, 마땅히 수(水)의 큰 수[大數]를 쫓아서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36간으로 하면, 하늘과 땅이 큰 수[大數]에 부응할 것입니다. 만일 이 비결(秘訣)대로 하면 반드시 거룩한 아들[聖子]을 낳게 될 것이니, 마땅히 그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비봉(秘封) 한 통을 만들어 겉봉에 쓰기를, '삼가 글월을 받들어 백배(百拜)하고 미래(未來)에 삼한(三韓)을 통합할 임금 대원 군자(大原君子) 족하(足下)께 드립니다.' 하였다. 세조가 즉시 이 비결을 좇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이듬해에 과연 태조(太祖)를 낳았다." 한다.3)
조선중기(朝鮮中期)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도 다음 기록이 나온다. 속설에, 신라 사람 최씨가 있었는데 정원 안에 열린 오이 하나가 길이가 한자나 넘어 온 집안 식구가 퍽 이상하게 여겼다. 그런데 최씨 집 딸이 몰래 그것을 따 먹었더니, 이상하게 임신이 되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그의 부모는 그 애가 사람과 관계없이 태어난 것이 미워 대숲에다 내 버렸다. 두어 주일 만에 딸이 가서 보니 비둘기와 수리가 와서 날개로 덮고 있었다. 돌아와 부모에게 고하니 부모도 가서 보고 이상하게 여겨 데려다가 길렀다. 자라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도선(道詵)이라 했다. 그는 당(唐)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워 가지고 돌아와 산을 답사하고 물을 보는데 신령스러움이 많았다. 뒤에 그 곳을 구림(鳩林) 또는 비취(飛鷲)라 했다.4)
고 한다. 영암(靈巖) 출신의 도선(道詵)이 입당(入唐)하여 일행선사(一行禪師)의 지리법(地理法)을 배우고 귀국했다고 하였다. 조선후기(朝鮮後期) 효종(孝宗) 4년(1653)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월출산영암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月出山靈巖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에 의하면 국사의 휘는 도선이니 신라 낭주 사람이다. 어머니는 최씨이니 영암의 성기산 벽촌에서 진덕왕의 말년에 태어났다. 13세에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가서 호위(胡渭)가 지은 우공(禹貢)의 산천설(山川說)에 따라 두루 살펴보고 당가(唐家)의 문물을 익혔다. 당나라 황제가 궁내의 연영전(延英殿)에서 스님을 영접하고 간곡히 부탁하기를 짐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돌아가신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신릉(新陵)의 터를 스님을 초청하여 점복토록 하라는 현몽(現夢)을 받았으니, 스님은 사양하지 말고 가장 좋은 명당 터를 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도선은 피할 수가 없어 조왕신(竈王神)이 지시한대로 황제가 타고 다니는 어마(御馬) 가운데 백색(白色) 말 한 마리를 내려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가장 길한 터를 잡아 바쳤는데, 보는 사람마다 칭찬하기를 천부적으로 타고난 지리(地理)에 대해 특이한 안목을 가졌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어찌 지술(地術)에 대한 능력뿐이겠는가! 천자도 국사로 책봉하였으며, 일행선사(一行禪師)도 이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찬탄하였다.
고 되어있다. 도선이 13세에 당나라 황제의 초청을 받아 대행황제(大行皇帝)의 신릉(新陵)의 터를 잡아주었다고 한다. 그는 황제의 명당터를 잡아준 공로로 당나라의 국사에 책봉되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일행선사(一行禪師)까지도 도선의 지리법에 대해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감탄해 마지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울러 같은 비의 비음기에는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이 지은 「유명조선국전라도영암군월출산도갑사국사도선비음명(有明朝鮮國全羅道靈巖郡月出山道岬寺國師道詵碑陰銘)」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기도 하자.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문화재청)
(전략)
신승(神僧)이라 불리우던 스님 있으니 그가 다름 아닌 도선국사네! 위대하신 고려 초의 도선국사는 민족 위해 태어나신 용상이시다! 어떤 분야 학술이나 무불통(無不通)이나 그 중에 뛰어남은 지술(地術)이라네! 당황제가 현몽(現夢)받고 유택(幽宅)을 위해 예를 갖춰 사신 보내 초빙해 가다 중국 가서 황제 위해 점복해주고 일행선사(一行禪師) 친견하고 지술(地術)을 받다 스님께서 중국에서 수학한 다음 마음 가득 채우고서 귀국하였네 귀국 후엔 송악터를 살펴보고서 오백년의 도읍터라 지상(地相)을 보다! (후략) 로 되어있다. 앞의 내용을 정두경이 다시 시(詩)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비의 좌측에 새겨진 이수인(李壽仁, 1601-1661) 지은 글에 의하면, 前略) 나이 동년(童年)이 되기 전에 월남사(月南寺)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그 후 당(唐)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를 친견하고 지술(地術)에 대한 그의 법을 모두 전해 받았다. 그 후 곧 귀국하여 일구일수(一丘一水)의 명사(名寺)와 거탑(巨塔)이 국사가 점복(占卜)하여 창건한 곳이 아님이 없을 정도였다.
고 적혀있다. 이에 따르면 도선이 월남사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고 한 내용이 추가 되어 있는데, 이는 새로운 주장으로 주목된다. 그 후 그는 당나라에 들어가 일행선사를 친견하고 지리법을 전수 받았다고 하였다. 조선말기 대둔사 승려 범해각안(梵海覺岸)이 지은『동사열전(東師列傳)』 도선국사전(道詵國師傳)에 따르면 (도선이) 13세에 당나라의 배를 얻어 타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일행선사가 언젠가 제자들에게 ‘고을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나의 도를 전할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문인들 가운데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달려와 아뢰기를 ‘오늘 고을 물이 逆流 합니다’고 했다.
일행이 그 말을 듣고 곧 가서 장삼을 두르고 몸가짐을 단정히 한 다음 문 밖으로 나가자 그 때 마침 도선이 찾아 뵈오려 마악 당도하는 것이었다. 일행이 ‘기다린지 오래이거늘 왜 그리 늦었는가? 하며 함께 크게 기뻐하면서 즉시 도선을 맞아들여 머물도록 했다. 도섬이 그의 술법을 모두 터득하고 나서 떠날 뜻을 비치자 일행은 작별에 임해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게 되었구나! 부디 잘 가게.... 하며 아쉬어 했다.5) 로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도 도선이 이경석 찬술의 비와 마찬가지로 13세에 당나라에 들어갔으며, 그가 일행선사(一行禪師)를 직접 만나 그의 지리법을 모두 터득하여 귀국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말기-조선말기 도선의 입당과 일행사사설은 고려중기의 김위제나 김관의의 기록과는 달리 보다 구체적이다. 또한 도선이 13세에 당나라 황제의 초청으로 입당하여 일행선사(一行禪師)를 직접 친견하여 지리법을 배웠다고 되어있다. 도선이 입당하여 배웠다는 일행(一行)은 어떤 인물인가? 당나라 사람인 일행(一行, 683-727)은 속성(俗姓)이 장씨(張氏)이며 중국(中國) 거록(鉅鹿) 사람이었다. 일찍이 출가하여 북종선(北宗禪)의 보적(普寂)에게 선법(禪法)을 받고, 당양산(當陽山)의 오진(悟眞)으로부터 율(律)을 배웠으며,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의 홍경으로부터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웠다. 또 그는 역상(曆象)과 음양오행(陰陽五行)에도 정통하였다. 그는 특히 선무외(善無畏)에게서 밀교(密敎)를 배워 『대일경소(大日經疏)』를 지었으며, 또 금강지(金剛智)로부터 다라니비인(陀羅尼秘印)을 배웠다. 그에게는 그 밖에 『섭조복장(攝調伏藏)』『석씨계록(釋氏系錄)』『개원대연력(開元大衍曆)』 등의 저서가 있었다. 경사(經史)를 널리 배웠고 특히 천문역산(天文曆算), 음양오행(陰陽五行), 참위(讖緯)의 학문에 정통했다고 한다. 그는 칙명으로 『구당서(舊唐書)』 율력지(律曆志)에 편입된 「대연력(大衍曆)」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풍수지리가이며 천문가였던 셈이다.6) 그런데 그는 727년 (唐 開元 15年)에 장안(長安) 화엄사(華嚴寺)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도선이 일행에게 배웠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도선은 827년(新羅 興德王 2년)에 출생하여 898년(新羅 孝恭王 2년)에 입적한 인물이다. 一行이 활동할 당시 도선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것이다. 도선과 일행은 그들의 생몰 연대가 겹치지 않아 직접 면대(面對)하여 사사했다고 보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말기의 이후의 기록은 믿기가 어렵다. 그것은 고려중기 김위제나 김관의의 기록을 보고 후대에 전사(傳寫)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앞의 A), B) 사료에서 언급되었듯이 김위제․김관의는 도선이 직접 일행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일행의 지리법을 전수받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김위제나 김관의도 일행과 도선이 생전에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표현을 썼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도선은 입당하여 일행(一行)이 아닌 또 다른 인물로부터 일행(一行)의 지리법(地理法)을 전수받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나말려초 입당(入唐) 선승(禪僧)들의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법관계(傳法關係)이다. 나말려초 시기에 입당하여 당나라 선승에게 선법(禪法)을 인가받고 신라·고려에 귀국햇던 선종승려를 표로 정리해 보면 <표1>과 같다.
그들의 입당연대와 귀국연대, 전법사승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그런데 도선의 경우, 그와 관련된 가장 신뢰할만한 기록인 최유청 찬술의 도선비에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만하다. 결국 도선이 입당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위제(金謂磾)·김관의(金寬毅)가 도선(道詵)의 입당(入唐)·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왜 주장하였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다. 그런데 김위제(金謂磾)는 숙종(肅宗)에게 남경천도를 건의하였다. 그런데 숙종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여 조카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다. 따라서 숙종의 즉위에는 적지않은 문신들의 반발이 뒤따랐다. 숙종은 이러한 문신들의 반발을 억제하기 위한 방도로 김위제로 하여금 남경천도를 주장하게 하였던 것이다. 천도는 문신들의 세력근거지를 박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김위제(金謂磾)는 이러한 숙종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등의 남경천도를 강하게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이 도선의 풍수지리설을 이어 받았고, 도선은 중국 풍수지리설의 대가인 일행에게 전수받았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김위제가 도선이 일행의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았다고 하는 도선을 높이어 남경천도를 합리화 시키고자 함이었다. 한편, 의종은 인종대 인주이씨, 정안임씨 두 외척세력의 득세로 인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한 왕이었다. 그가 불교, 풍수지리에 깊은 관심을 표시한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유교보다는 불교, 풍수지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유교가 문신들의 이념적 기반이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불교,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은 문신에 대한 견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편찬된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은 의종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김관의(金寬毅)는 불교와 풍수지리를 이용하여 왕건의 가계를 윤색하였을 뿐 아니라 고려왕실의 신성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관의(金寬毅) 역시 도선(道詵)의 입당(入唐)과 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주장함으로써 도선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높이기 위해 도선의 입당(入唐)·일행사사설(一行師事說)을 주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 『朝鮮寺刹史料』下(寶蓮閣 影印本, 1980년) 377쪽
2) 『世宗實錄』地理志 靈巖郡條 3) 『世宗實錄』151 地理志 靈巖郡條 4) 『新增東國輿地勝覽』35 靈巖郡 古跡條의 崔氏園 5) 梵海 撰․金侖世 譯, 『東師列傳』(광제원, 1991) 46-47쪽 6) 『宋高僧傳』5 唐中岳嵩陽寺 一行傳 및 『舊唐書』191 方技 一行傳. 글쓴이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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