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窓] 전라병영을 찾은 사람들과 민속 생활사 현장 게시기간 : 2021-10-14 07:00부터 2030-12-16 21:21까지 등록일 : 2021-10-13 10:16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문화재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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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병영의 강진 이영과 축성, 1417년 전라병영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원래 1398년(고려 공양완 원년) 광주에 설치했는데 1417년(태종 17)에 강진으로 옮겼다. 군사시설이라 무엇보다도 성이 중요했다. 당시 전라 병사 마천목은 석달만에 축성을 마무리 한다. 원래 도강군(道康郡)이 있었는데, 탐진현(耽津縣)과 합하여 강진(康津)이라 하면서 강진읍에 자리를 잡는다. 원 도강군 터에 전라병영이 자리잡기 때문에 축성도 빨랐던 것이다. 병영의 상주 군관과 이졸들, 관인들, 번을 스러 오가는 전라도 57관의 군병, 상인들, 예인들도 오갔거나 인근에서 살았다. 표류를 했던 “하멜” 일행도 머물렀다. 을묘왜란이나 임진정유왜란을 극복한 기지였으며, 동학농민혁명 전쟁 때는 함락된다. 1895년 군사기능은 막을 내린다. 이후 학교가 들어서고 면소재지로서 행정중심지가 된다. 그 500년의 전라병영 역사는 “문화재”로 남았다. 전라병영성은 국가 사적 제397호, 강진 성동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5호, 수인산성과 병영성 홍교는 전라남도 기념물, 한골목 옛 담장은 국가등록문화재이다. 그리고 철비거북좌대, 조산, 중고마을 큰샘, 사또샘 등은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이다. 1991년 목포대박물관에서 학술조사를 하여 1992년에 전라남도기념물이 되었다. 문화재명은 “전라병영성지”. 1997년 국가 사적이 되면서 “전라병영성”이 명칭이 된다. 앞으로 공간 자체, 즉 “전라병영”으로 문화재 명칭을 삼아 역사성을 이어야할 것이다. 1999년부터 발굴조사도 15차례를 했고 성곽과 치, 여장, 문루 등을 복원했다. 2019년에는 종합정비계획도 세웠다. 해자에서 100개소 이상이 확인된 함정(陷穽) 유구는 국내 최초 사례이다. 이같은 “유적”의 조사, 정비와 함께 관심을 가져할 것이 또 있다. “사람”이다. 전라병영의 영지(營誌)에 따르면 4개면의 민호는 1,889호, 인구는 5,973구였다. 이 가운데 지금의 병영면에 해당하는 고군내면에만 1,388호, 4,286구. 군병은 기병 3,581명, 보병 939명 등 납포군(納布軍)이 9,721명, 어변군관 200인, 교련관 13인 윤회군 등이 1,134명 합하여 10,855명이 나온다. 납포군은 각 고을에 살면서 교대로 일정기간 근무를 하지만 실로 적지 않은 군병. 여기에 각읍의 봉수대 별장 296인, 5개 진관의 보병 33,292명이니 전라병영 관련 군병만 해도 많은 인원이다. 전라도 관찰사의 순행과 연희당, 사압당, 1487년 전라병영 사람들의 기록과 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다. 우선 전라병영에 왔던 전라도관찰사 김종직(1431~1492)의 시. 문장가이자 사림파 학자. 1487년(성종 18) 5월 27일 전라도관찰사로 제수된다. 1488년 5월 7일 한성부 좌윤으로 옮긴다. 관찰사는 전라병사를 겸임하게 되니 순찰을 나섰을 것이다. 문집에 이 시 바로 앞에 “팔월 초일일에 아침 일찍 영암을 출발하여 월출산을 지나다[八月初一日早發靈巖過月出山]”가 있어 1487년 8월 초에 전라병영을 들러 정무 처리. 전라도 각 군현과 군진 관원들의 포폄(褒貶)도 했을 것이다. 1년 2회의 근무평정 작업. 전라도 57관의 수령과 전라도도사 전주판관, 6개 역(삼례, 오수, 청암, 경양, 벽사, 제원), 조경묘령과 별검, 경기전령과 참봉, 전라좌우수영 예하 수군진 만호 등 90여명이다. 관찰사는 수령 등에 대한 포폄을 하여 병사의 동의를 얻고, 병사와 수사는 만호 등 군관에 대한 포폄을 하고 관찰사의 동의를 얻어, 관찰사는 이조(吏曹)에, 병사는 병조(兵曹)에 보고를 하고 본인들에게도 통지를 한다. 이 같은 정무 처리는 동헌이나 누각에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연회도 있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시에는 사압당(射鴨堂)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궁실조에 연희당(燕喜堂)이 나온다. 전라병사의 휴식장소이자 연회장이다. 병사 집무실인 동헌은 운주헌(運籌軒)이고 그 서쪽에 연희당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연희당은 1688년(숙종 14) 병사 민섬이 중건했는데 1851년(철종 2)에 소실되어 윤명검이 중건하였다. 연희당조에 세수의 시가 보인다. 첫 번째가 김종직의 시. 『점필재집』에는 “술 마시다 내상의 벽상운에 화답하다[醉和內廂壁上韻]”라는 제목이다.
세류영은 군율이 엄한 곳이라는 고사가 있으며 전라병영의 별칭이다. 강진 출신의 해암 김응정(1527~1620)의 시조에 “가난을 파려하고 세류영에 도라드니”라는 구절도 있다. 시어에서 인일(人日)은 음력 정월 초이렛날을 말한다. 원추리는 꽃이 7∼8월에 핀다. 월출산 시를 보면 영암을 지나 전라병영을 거쳐 승평군(순천도호부)으로 이동한 것 같다. 월출산을 지은 시에 8월 1일이라 표기하고 있어, 병영은 원추리 꽃이 피는 8월 초일듯. 인일이 음력 1월 7일인데 일곱 가지 채소 국을 먹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시를 읊는 풍속의 고사가 있다. 어쩌면 ‘7일의 인일’이라기 보다 ‘일곱가지 채소’의 의미를 형상화 한 것 같다. 사압당에서의 연희는 병영의 들녘이나 수인산 언저리에 지천으로 널린 야채와 산나물 일곱가지가 아니었을까. 세상사, 인생사를 말하다가 술기운이 돌자 시 한 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곤(南袞)의 시도 있는데, 1511년(중종 6) 11월 25일(신미)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니 순행 길이었을 게다. 양곡 소세양(1486~1562)의 병영중창기도 1530년 전라관찰사 인연이다. 1650년에 세운 작천석교(鵲川石橋) 신창비도 병사 선정비와 함께 있다. 병영성 가까운 작천에 세운 11칸의 석교 기록. 우암 송시열(1607~1689)은 1688년 7월 연희당기를 짓는다. 담헌 이하곤(1677~1724)은 진남루에 올라 시를 읊는다. 1722년(경종 2) 11월 8일이다. 장인인 옥오재 송상기(1657~1723)의 유배처에 인사차 남행길. 송상기는 이하곤의 시에 차운시를 짓기도 한다. 이 무렵 눈이 한자쯤 쌓였다고 한다. 강진 사람들은 “근년에 보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이렇듯 여러 기록이 있다. 더 찾고 모아야 할 것이다. 병사가 성안 줄당기기 보기를 독려, 1892년 전라병영에서는 군졸들이 편을 가려 줄당기기[索戰]를 했다. 병사는 주민들에게 성안에 들어 와 줄당기기를 보도록 영을 내린다. 아침을 먹고 나서서 장대 앞에서 행해지는 줄당기기를 보았다. 어느 해는 밤부터 줄당기기를 구경하기도 했다. 사람사는 모습이나 민속 생활사는 기록이 거의 없지만, 단편적이지만 확인된다. 1892년부터 1894년 사이 3년에 걸쳐 ‘삭전(索戰)’을 했던 기록. 강진 유생 강재 박기현(1864~1913)이 남긴 일기 『일사(日史)』에 5회가 나온다. ① 1892년 1월 15일 을해. 아침을 먹은 뒤 병영 장대 앞에서 색전(索戰)을 구경하였다.[『日史』 壬辰正月 十五日 乙亥 晴 朝後 賞索戰於將臺前]
② 1893년 1월 15일 기해. 나는 (전라병영) 장대(將坮=將臺) 앞에서 색전을 구경했다.[癸巳元月 十五日 己亥 余翫索戰于將坮前] ③ 1894년 1월 11일 기축. 어제 밤부터 밤에 색전을 구경했다.[甲午正月 十一日 己丑 自日昨夜 夜觀索戰] ④ 1894년 1월 13일 신묘. 맑음. 밤에 병공(兵公, 병사)이 영을 전달하기를 성내(城內)로 들어 와 삭전을 구경하라고 했다. 나도 또한 구경하러 갔다.[十三日 辛卯 晴 夜兵公傳令 入索於城內 而玩戰焉 余亦觀光] 라병영의 줄당기기 ‘삭전(索戰)’은 병영 소속 장졸의 동질감과 공동체 단합의 집단놀이로 행해졌을 것이다. 전라병사가 영을 내려 관내 민인이 보도록 한 것을 보면 관의 입장에서 보면 민심 위무와 민정 안정을 통한 주민 통치의 편의성을 따르려 한 것을 볼 수 있다. 반면 주민의 입장에서는 가족까지 참여하여 관광을 한 것을 보면 축제적 욕구의 충족과 오락을 추구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정월 보름을 전후하여 몇 일간에 걸쳐 한 것을 보면 정초의 신앙성과 주술성, 생산의 풍요 등은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듯 싶다. 『일사(日史)』는 1891년부터 1903년에 이르기까지 장흥 강진 일대 향촌 사회의 동향과 함께 박기현을 중심으로 하는 인근 유생들과의 교유관계, 사회 민속 생활사 자료를 알 수 있는 기록이다. 특히, 갑오년(1894년)을 전후한 시기 장흥·강진 일대의 동학농민혁명군측과 관군측의 동향, 당시 전투상황 등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이 일대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자료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06호(1999.02.26 지정)이다. 전라병영 악공의 후예, 가야금 명인 함동정월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 및 병창의 산조부분 인간문화재 함금덕(咸金德, 1917~1994). 예명은 함동정월.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보유자. 강진, 특히 병영 일원에서는 함동정월 명인의 부친[咸一權, 일명 영권, 일곤]이 전라병영의 악공(樂工)이라 전해 온다. 국악계에서도 알려진 사연. 그런데 자료를 보니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咸采龍]가 악공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1895년(고종)에 간행한 『호남영지』(규장각 소장, 규12189) 가운데 『전라병영영영지』를 보면 군병조에 취타군(吹打軍)이 두군데 보인다. ① 취타군 400명은 납포군인데 각 읍에 소속되어 있다(吹打軍 四百名 ..... 以上納布軍 散在各邑)
② 취타군(吹打軍)은 7명인데 돌아가면서 입직하고 병영 곁에서 거주한다.(吹打軍 七名 ..... 輪回入直 居在營下) 군병이란 군역의 의무를 지닌 양인 신분의 정남(丁男)을 말한다. 남자 16세 이상이면 병역의무자가 된다. 상근 형식으로 현역병 근무하는 경우도 있고, 1년에 2필의 군포만을 내고 복무를 면제 받기도 한다. 납포군이다. ②에서 취타군 7명의 윤회 입번은 상근형식이다. 거주지도 해당 관청 부근. 그래서 '居在營下', 즉 병영성 곁에 거주한다고 표기. 취타군의 취(吹)는 부는 악기, 타(打)는 치는 악기이다. 명칭으로만 보자면, 함씨가 사람들은 피리와 북에 능했다고 하니 '취타군'으로 볼 수 있겠다. ②의 '취타군'은 상근이고, 전라병영성 곁에서 거주한다 하고, 함씨집안의 생가도 성밖 '지로리'로 전해지고 있어 ‘전라병영 악공’은 ‘전라병영 취타군'을 말한다고 하겠다. ①의 취타군 400명은 상근 복무를 않고 군포만 내고 각 고을에서 살았다. 조선후기 전라도 56개 고을이니 군현 평균 7명쯤. '윤회 입번', 곧 정해진 근무 시간을 따라 돌아가며 차례에 따라 근무(入番) 한다니, 근무시간 외 성밖 지로리 집에 있을 때에는 그곳이 풍류방이 되었을 것이다. 함동정월 부친 함일권의 출생연도가 1881년인데 전라병영이 폐영되던 때(1895년)로 보아도 열다섯이다. 군역의 의무를 지니는 열여섯에는 이르지 못한체 전라병영은 막을 내린다.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한다면 함동정월의 할아버지 함채룡이 전라병영의 악공, 취타군이었을 가능성이 더 많다.
글쓴이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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