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서와 옛편지] 실학의 마음을 품은 책, 『환영지(寰瀛誌)』 게시기간 : 2021-10-20 07:00부터 2030-12-24 21:21까지 등록일 : 2021-10-18 14:37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
고문서와 옛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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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다·함께’ 바다의 자라로 성장하기를- <구구주도(九九州圖)>, 세계에 대해 질문하게 하다 지리책은 왜 읽고 보는 것일까. 지리책은 어떤 장소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담는다. 한 지역의 상대적 위치, 지형이나 기후, 산물(産物) 등의 내용이 있다. 지리책은 다른 책들과도 조금 다르다. 이미지가 있다. 그 지역이 어디쯤 있는가를 보여주는 지도가 대표적 이미지이다. 지역의 산물(産物), 도로 모양, 산과 물줄기, 건물 위치와 모양 등을 그려 놓은 지리책이라면 더 좋다. 지리책은 내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그곳’이 어디쯤 있는지 가늠하게 해주고, ‘그곳’의 길은 어떻게 생겼는지, 산은 어디쯤 있고, 어떤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준다. 직접 가보지 않아도 ‘그곳’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세상에 ‘그곳’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이곳’과 ‘이곳’이 얼마나 닮고 다른지, ‘그곳’을 이해하게 해준다. 지리책이 독자를 유혹하는 강력한 매력이다. 위백규가 지리책을 만들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그가 지리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환영지』를 만들게 한 것은 <구구주도(九九州圖)>였다. 이 지도를 보면서 그는 ‘정말 세상이 이럴까, 조선 밖의 땅덩어리는 정말 이렇게 생겼을까. 지도 저 끝 세상은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을 계속 던졌다. 직접 보지 않아 믿기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좁은 견문으로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일도 우스웠다. 『장자』 <秋水>를 보면 개구리와 자라가 나온다. 개구리는 우물 속에 살면서 자기가 사는 세계가 훌륭하다고 여겨 넓디 넓은 바다에 사는 자라를 초대했다. 자라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우물이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위백규는 자신이 개구리처럼 되어 ‘드넓은 바다 세상을 아는 자라의 비웃음을 사는 건 아닐까’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 동쪽 끄트머리, 바닷가 궁벽한 곳에 항상 벽지에 사는 사람, 크고 큰 천지에 비해 바다의 게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가 체험하지 못한 조선 밖 세계의 모습을 그린 구구주도를 보고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일은 스스로 비웃음을 불러들이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환영지』에 실린 마테오 리치의 <천하도>. 위백규가 서문에서 말한 <구구주도>라고 한다.(출처:『존재전서』하) 목판본 『환영지』. 정서본에 있는 <천하도>가 목판본에는 없다. ‘이 사이에 있어야 할 구구주도가 빠진 듯하다.’는 주가 달려 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디지털아카이브) 조선 땅끝 장흥에서 세계를 주유(周遊)하다. <구구주도>를 베껴 그린 후 그 뒤에다 중국 13성(省)지도, 조선 8도 지도, 고금의 기록들을 덧붙였다. 『환영지』 1차 원고였던 듯하다. 그의 나이 32세인 1758년이었다. 『환영지』 만들기 작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즉시 수정하거나 정서(正書)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과거공부를 위해 한양에 머물던 시간도 많았기 때문이리라. 거의 10여 년이 지난 1770년에서야 서문을 썼다. 출판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61세 때인 1787년이었다. 그 동안 작성해두었던 원고를 하성도(河聖圖)와 함께 살피면서 수정했다. 1차 초고가 만들어진 지 거의 30여 년이 지났으니 그 사이 내용 변화도 있었다. 초기에는 이미지가 50개 정도였는데 69개까지 늘어났고 다시 66개로 정리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번거로운 것을 빼고, 덧보태야할 정보나 지식이 증가했던 것이다. 하성도와 내용 수정을 마치고 목판 10개를 새겼지만 더 이상 진행하지 못했다. 경제적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10장의 목판과 정본(正本), 초고본이 있었다. 『환영지』에는 지도가 많다. 우선 마테오 리치가 그렸다는 <천하도>가 있다. 위백규는 <구구주도>를 보고 웃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천하도>였던 듯하다. 한반도 조선을 나타낸 지도(朝鮮八道總圖), 중국 땅을 보여주는 지도(朝鮮八道道), 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보여준 지도(西洋諸國圖)뿐 아니라 한양(漢陽圖)부터 제주도(耽羅圖)까지 각각 한 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지도가 있다. 요동(遼東圖)과 일본의 지도도 있다. 조선부터 요동과 만주 벌판, 중국 땅을 거쳐 서양까지 뻗어가고, 동쪽으로는 일본까지 아울렀다. 조선, 중국의 땅을 한눈에 파악하고, 다시 각각의 지역으로 나누어 그 지역에 속하는 지명을 보여준다. 장흥에서도 전 세계를 들여다보며, 세상의 넓음과 다양함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환영지』는 지도만 보여주지 않는다. 상권의 구천팔지도(九天八地圖)부터 하권의 역대연표도(歷代年表圖)까지 모두 64개의 이미지와 표가 들어 있다. 하늘의 별자리 그림, 역대 관직 및 조선의 관직, 관복의 이름, 제왕들의 궁전 그림, 중국과 조선의 물산 그림, 군대의 진법 그림(兵陣圖), 중국 황제들의 능호, 역대 연표와 연호, 음악과 관련한 내용(九變樂成圖), 심지어는 인간의 신체 구성에 관한 내용(人身五行圖), 오행과 사람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내용(人物分配五行圖), 24절기 등도 표로 보여준다.
『환영지』의 <황명십삼성총도>(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지도도 조선을 비롯하여 중국, 지구 위에 있는 대륙들과 그에 속하는 나라들을 거의 다 보여준다. 하늘, 땅의 모습과 같은 천문(天文)·지문(地文)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여러 제도나 문물 곧 인문(人文)까지 두루 포함하고 있다. 이른바 천·지·인 삼재(三才)에 관한 지식 정보의 종합서로서 단순한 지리지가 아니다. 『환영지』에 삼재도(三才合應圖)를 그려 넣은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지리지에는 없고 『환영지』만이 갖고 있는 특별함이며 개성이다.
명성은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세상에 나오다 위백규가 비록 간행하지는 못했지만 『환영지』 명성은 인근에 퍼진 듯하다. 1794년 당시 해일이 일어나 호남 지역 피해가 컸다. 정조는 서영보(徐榮輔)를 보내 강진을 비롯한 여섯 지역의 피해를 조사하고 백성들을 위로하게 했다. 서영보는 각 지역을 돌면서 피해 상황을 조사하는 한편 지역 인재들에 대해 탐문도 했다. 조정으로 돌아가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보고서에 ‘장흥의 진사 위백규는 학식이 해박하다.’고 하면서 천거했었다. 위백규의 행장에 의하면 서영보가 장흥 지역에 와서 각종 정보를 탐문하는 과정에서 ‘위백규의 명성을 들었고, 그가 저술한 글들을 열람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서영보의 보고서에는 위백규가 쓴 『경서차의』만 언급되었지만, 아마 구두 보고를 통해 『환영지』를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조는 즉시 『환영지』를 올려보내라는 명을 내렸다. 정조는 호학군주답게 매우 다양한 책들을 두루 읽고, 규장각을 지어 서적들을 정리, 보관했다. 한편으로 초계문신제도를 만들어 규장각 전속 문인들을 선발하여 지속적으로 책을 만들고 간행했다. 정조의 독서 범위는 경서에 한정되지 않았다. 세간에 유명한 책들도 직접 보고 평가했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가 사대부들 사이에 자주 언급되자, 직접 읽고서는 『열하일기』의 문체를 문제삼기도 했다. 백성들의 저술과 독서물에도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군주였다. 아마 ‘위백규가 해박하다.’는 서영보의 말을 듣고, 『환영지』가 어떤 책인지 직접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터이다. 워낙 급하게 떨어진 어명이어서 전라감사가 위백규에게 어명을 전하자 급히 책을 싸서 올려보냈다. 그 이후의 사정에 대해 족손 위영복(魏榮馥)은 이렇게 말했다.
정조께서 맨 먼저 이 환영지를 뽑아 지목하여 한양으로 올려보내라고 했고, 감사가 서서 재촉했기 때문에 전체를 다 베껴 쓸 겨를 조차 없었다. 올려보내고 나니 미완성된 초고만 집안에 남아 있게 되어 보관하였다. 집안사람들과 문도들이 모두 다 한스러워했다. 내가 노곡(蘆谷)에 갔을 때 사문 신앙여(申仰汝)를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책에 관해 말하게 되었는데, 앙여는 자신이 이 책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가서 살펴보니 번거로운 것을 잘라내고 긴요한 것들만 취했으니 정본을 베껴 쓴 것이었다. 이 책이 문인 집안에서 거의 7,80년 동안 잘 보관되었다가 내가 다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魏榮馥 <寰瀛誌跋> 『茶遺稿』권3)
위영복이 쓴 <환영지발>. 정조에게 바친 이후 『환영지』 정본(正本)을 찾아 목판본으로 간행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였다. 한양으로 올려 보낸 것은 1787년 위백규가 목판으로 간행하려고 초고를 퇴고, 수정하여 정서한 정본(正本)이었을 것이다. 임금이 보는 어람용이니 초고 상태를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지체할 수 없어 집안 보관용 정본을 다시 만들 여유는 없었으리라. 결국 미완성 상태인 초고만 집안에 남게 되었다. 1770년에 1차로 완성했지만 위백규나 위씨 집안에서는 이것을 완성본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목판 출간을 위해 정리한 1787년 원고를 완성본으로 여겼다. 이 정본을 다시 보게 된 것은 7,80여 년이 지난 뒤였다. 신앙여(申仰汝) 집에 정본이 잘 보관되어 있어 족손인 위영복이 볼 수 있었다. 신앙여는 신두선(申斗善)으로 구한말 학부대신을 지냈던 신기선(申箕善)의 형이다. 충청도에 살았고 임헌회(任憲晦)를 사사했다. 유중교는 충청도 선비 중 마음에 드는 이로 지목하기도 했다. 위영복은 『환영지』정본을 충청도에서 만난 것이다. 이를 보면 『환영지』는 그 동안 필사 상태로 유통되면서 널리 퍼진 듯하다. 장흥에서 생산된 『환영지』가 멀리 충청도까지 퍼졌고, 관심 있는 이들이 베껴둠으로써 개인 집안 소장서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위영복이 남의 집안에서 잘 보관되어 있는 자기 집안 선조의 전적을 보았을 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놀람과 반가움이 벅차오르는 순간이었을 터이다. 마침내 『환영지』는 1882년에 목판본으로 출간되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위백규는 호남의 실학자로 일컫어진다. 그는 장흥에 살면서 농사와 독서를 병행했다. 시가 <농가구장>이 농부로 산 결과물이라면, 『환영지』는 독서와 연구의 결과물이다. 농부와 독서인. 위백규가 명실상부한 실학자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삶에서 이 둘을 환상적으로 잘 융화시킨 결과이리라. 그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개구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함께 모두’ 바다의 자라가 되기를 바랐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학자적 마음이 아닐까. <도움 받은 글> 『다암유고』, 한국역대문집총서DB
『존재전서』하, 경인문화사, 1974. 『존재집』, 한국고전종합DB 『환영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디지털아카이브, http://yoksa.aks.ac.kr 김봉곤(2016), ‘『환영지』를 통해 본 존재 위백규의 역사지리인식’, 『역사와실학』 61, 역사실학회. 고석규(2020), ‘세계를 담은 존재 위백규의 『환영지(寰瀛誌)』’, <호남학산책>, 한국학호남진흥원, https://www.hiks.or.kr/HonamHeritage/2/read/703. 배우성(2014), 『조선과 중화』, 돌베개. 글쓴이 김기림 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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